언어를 배우는 것은 단순히 말과 글을 배우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하나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국인은 단순히 영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에 걸맞은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다. 언어가 다르면 생각도 다르기 마련이다.
‘생각이 말(언어)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말(언어)이 생각을 지배한다‘ 라는 소쉬르의 이야기를 기억하자.
철학적 삶은 ‘더함‘이 아닌 ‘덜기‘에 있습니다. 철학은 우리에게 각자의 삶에서 무엇을 덜어 낼지 말해줍니다. 어떤 것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기에 특별해지는 삶이 바로 철학적 삶입니다. 철학적 삶이 특별한, 그래서 근사한 이유는 철학이 각자의 삶에 어떤 ‘포기‘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삶‘의 비밀은 진정한 시간, ‘지속‘에 있다. ‘지속‘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까닭이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지속‘을 통해 질적인 차이가 만들어지고, 그 질적인 변화로 인해 본성이 바뀐다. ‘지속‘은 양적인 변화가 아닌 질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더 나은 삶은 ‘지속‘을 통해서 가능하다. 우연히 집어든 책 한 권을 읽다가 동이 터오는 독서. 깔깔거리고, 훌쩍거리게 만드는 독서. 마음을 울리는 글귀 하나에 꽂혀 온종일 읊조리게 만드는 독서. 이런 ‘지속‘된 독서는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지속‘은 ‘더 나은 삶으로 이끈다. ‘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것은 두꺼운 논문 100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랑에 대해 눈뜨게 만든 얇은 시집한 권이다. 아니, 그 시집의 어느 시 한 구절이다. ‘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것은 무미건조한 100명과의 만남이 아니다. 조바심과 설렘으로 ‘지속되는 단 한 명과의 만남이다. 뜨겁기에 ‘지속‘ 된, ‘지속‘ 되었기에 뜨거운, 그 만남이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 만남은 베르그손의 말처럼 반드시 지속 자체를 관통할 수밖에 없다. ‘지속‘을 관통했기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것이니까. ‘더 나은 삶은 ‘지속‘을 통해 질적으로 변화된 삶이다.
잊지 말자. 결국 잘산다는 건,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상처를 최소화하는 거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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