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사고는 야만인의 사고도, 미개인이나 원시인의 사고도 아니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 세련화되었다든가 길들여진 사고와는 다른,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의 사고다.
《야생의 사고》

‘문명의 사고‘로써의 계획은 쓸모없다. 아니 그 계획은 우리의 삶을 더 큰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삶의 우발성과 우연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야생의 사고로 사는 것! 이것은 가장 먼저 ‘야생의 사고‘는 ‘문명의 사고‘ 보다 열등한 것으로 규정짓고 있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오감과 직관을 믿고 온몸으로 삶을 살아내려는 ‘브리콜뢰르‘가 되려고 할 때 가능하다. 이것이 내가 레비-스토로스에게서 배운 삶의 지혜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그의 삶의 맥락이 만들어낸 언어 규칙을 거의 맹목적인 수준으로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만의 언어 규칙을 상대에게 강요하느라 대화할 수 없을 테니까. 물론 여기서 맹목적이란 말이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상대를 신처럼 떠받들라는 말은 아니다. 상대의 언어 규칙을 파악한다는 말은 결국 그의 삶의 맥락을 파악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 인간인지라, 진중하고 섬세하게 타인의 삶의 맥락을 파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대화, 그것은 사랑이 없다면 애초에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없는 대화는 설득과 싸움, 그리고 포기가 난무하는 폭력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대화할 수 없다. 사랑하지 않기에 그들의 삶의 맥락에 관심이 없고 그래서 그들의 언어 규칙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니 대화가 안 된다면 상대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까?"

쿤에 따르면, 과학은 연속적이고 누적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단절적인 과정으로 진행된다. 비단 과학만 그럴까?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과학의 변화가 불연속적이고 단절적인 과정으로 진행되듯이 우리도 그렇다. 나의 믿음과 달리 공부, 운동,
업무 등 어떤 분야이든 연속적이고 누적적으로 발전하기보다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불연속적이고 단절적인 계단식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물론 그 불연속과 단절(성과)의 임계치까지 가는 과정에서 연속적이고 누적적인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노력의 양이 충분하다면 노력의 방향을 점검해야 한다. ‘노력‘은 의지의 문제이지만, ‘노력의 방향‘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혁명의 문제다. ‘노력의 방향‘은 ‘노력‘ 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혁명만이 노력의 방향을 바꾼다. 이전 세계관을 폐기하고 새로운 세계관에 눈을 뜨게 만드는 혁명. 그런 혁명이 없다면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노력의 방향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저 하던 대로 더 노력할 뿐. 우리가 그리도 원하던 불연속적 · 단절적인 발전은 노력 자체가 아니라 노력의 방향전환에서 온다.

패러다임의 전환도, 그걸 끌어낼(과학)혁명도 결국 우리 내부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극렬한 정서적 불안정을 불러일으키는 "개종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에 패러다임 전환의 성패가 달렸다. 어쩌면, 슬럼프는 개종의 경험을 받아들일 내면의 강건함이 없다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생은 틀렸으니 리셋을 해야 할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 없다! 배치를 달리하는 것으로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제껏 나와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이질적인 항들의 배치 속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존재로 생성된다. 지금의 모습을 긍정하면서 다른 배치를 구성하는 것으로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