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걸으면서, 도시에 살면서, 우리 주변 건축물들을 따뜻한 시선이나 비판적인 시각으로 한번 보고자 한다면 이런 책들이 어떨런지요? 저 같은 비전문가도 읽기 쉬운 좋은 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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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누구인가
김진애 지음 / 한길사 / 2000년 4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2003년 11월 27일에 저장
절판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04년 10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2003년 11월 27일에 저장
구판절판
20세기 건축
크리스티나 하베를리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03년 11월 27일에 저장
품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
서윤영 지음 / 궁리 / 2003년 9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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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사색하는 삶' 같은 인생이 잔잔하게 젖어들어오는 책으로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도록 하며, 사색의 여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책들이다. 선물로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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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2002년 03월 18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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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모순이 가장 집약된다는 감옥에서 신영복님이 건져올린 명징한 글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나무에게서 배운 인생의 소금같은 지혜들
우종영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1년 3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2002년 03월 18일에 저장
구판절판
나무박사 우종영님이 나무를 통해서 전하는 인생의 지혜
작은 씨앗을 심는 사람들
폴 플라이쉬만 지음, 김희정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4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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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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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오아시스 같은 채마밭을 둘러싼 아름다운 이야기
인생
김용택 지음 / 이레 / 2000년 12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2002년 03월 18일에 저장
절판
평생 진뫼마을에서 살면서 자연과 하나된 김용택님의 삶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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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살림지식총서 207
박명덕 지음 / 살림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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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군 외암리 민속마을. 냇가가 흐르고 그 건너편에 약 80채의 한옥과 초가로 이루어진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다른 민속마을과 다른 점은 관광을 위해 일부러 조성한 마을이 아니라 500년 전부터 예안 이씨 집성마을로 형성된 부락을 그대로 보존해오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가옥의 배치나 돌담길, 가구 내 살림살이 이 모든 것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 선조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정겹다. 복원한 가옥을 둘러보거나 옛날 충청도 양반가옥을 담 너머로 구경하다 보면 한옥의 멋과 과학,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제 한옥이 ‘삶’에서 한켠 물러나 ‘보존’의 대열에 들어서버린 것이 무척이나 아쉽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한옥은 자연과 어울리게 지었다.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개울물이 흐르는 곳에 자연을 닮은 형태로 지었다. 집을 짓기 위해 터를 그리 파헤치지도 않는다. 약간 땅을 다진 다음 그 위에 바로 올린다. 그렇기에 마루나 방이 높이 올라가는데, 대신 자연을 해치지 않게 된다. 또 차경(借景)의 정신은 얼마나 자연친화적인가. 선조들은 자연을 집 안으로 끌어 들여 요란하게 조경을 하기 보다는 외부 자연의 수려한 풍경을 정원의 일부로 생각했다. 마루에 앉아 보면 곧 산야가 정원이었던 셈이다. 자연친화적인 요소는 그 외에도 곳곳에 배어 있다. 창이나 문에 바른 한지만 해도 그렇다. 한지는 함습기능이 있어 여름철 습기를 차단할 뿐 아니라 문을 닫아도 집 밖의 풀벌레소리,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연친화적인 구조를 갖고 있기도 하다.

한옥에는 우리 선조들의 멋과 과학 역시 서려 있다. 한옥 하면 우선 온돌과 대청이 생각난다. 온돌은 겨울용 시설이고 대청은 여름용 공간이다. 온돌은 적은 연료로 효과적으로 방을 따뜻하게 하고 있어 서양에도 그 가치가 알려지고 있으며, 대청은 앞뒤가 일직선으로 트여 있어 바람이 이 통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지나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여름에 시원하다. 좀 더 세밀히 관찰해보면 더 재미있다. 양옥집과는 달리 한옥은 안방과 대청의 높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방은 주로 앉아서 생활하는데다 따뜻한 난방을 하려다보니 천장이 낮고, 대청은 서서 다니는 공간인데다 시원한 느낌을 주려다보니 천장이 높아진 것이다. 참으로 과학적인 구조인 셈이다.

이런 대청마루에 누워 바람을 은은하게 맞으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여유로움과 시원함이 느껴진다. 누워서 서까래와 대청 옆 벽면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한옥 구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처마 역시 보면 볼수록 즐거움을 준다. 처마를 앞에서 보면 양쪽 끝이 조금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 앞쪽으로도 좀 더 튀어나오면서 부드러운 곡선미를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처마 끝의 높이가 올라간 것은 ‘귀솟음’, 끝이 앞으로 튀어나온 것은 ‘안쏠림’이라고 하는데, 이는 처마를 일직선으로 할 경우 양쪽이 쳐져 보이는 착시현상을 막기 위한 의도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셈이다. 한옥 역시 알면 알수록 즐거움이 눈으로 익혀지는 법이다. 

한옥에는 또 ‘비어있음’의 철학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공간의 경우 중국은 화려하고 일본은 인공적으로 꾸미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마당을 비어있는 공간으로 생각하여 나무 심는 것을 피했다. 마당에서 다양한 일과 놀이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루 역시 여러 기능을 할 수 있는 다목적공간으로 만들어졌다. 비어있음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채울 수 있는 법이다.

또 한옥은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양의 집들은 옥외공간과 옥내공간이 뚜렷하게 구분되고 내부공간도 벽과 문으로 철저하게 폐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반면, 한옥은 열려 있다. 각 마당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으며, 문은 떼어내거나 완전히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되어 있기도 하다. 서양 집 현관에 들어서면 집 구조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으나, 한옥의 대문에 들어서면 가옥 구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열린 구조는 가족끼리 만나 어울리는 문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안방 창호문에 달린 조그만 유리 역시 안과 밖이 소통하는 재미있는 소도구이다.

『한옥』을 읽다 보면 고즈넉한 고가에서 하룻밤 묵고 싶어진다. 그런 고가의 툇마루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면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는 느낌이 들 것이며, 밤에는 창호문을 열어놓고 밤하늘 별을 감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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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의 성 -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성의 인류학, 개정판
헬렌 피셔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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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드 보부아르는 1949년에 발표한 ‘제2의 성’에서 ‘여성이란 순전히 경제 및 사회적 세력들의 산물이며,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감안한다면 가히 혁명적 접근이었을 것이다. 차별과 그 차별을 낳는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엄중하게 지배하고 있었기에,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부차적인 모순으로 취급되곤 했다.

그러나 이제 여성은 태어나기도 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는데 어느 정도 수렴해가고 있다. 물론 이런 인식의 보편화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여전히 ‘제2의 성’에 머물러 있다. 왜 여성이 제2의 성에 머물러 있고, 또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제1의 성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해석은 근대에 들어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이에 대한 인류학자 헬렌 피셔가 『제1의 성』에서 접근한 방식은 매우 신선하다.

『제1의 성』의 저자는 먼저 남녀의 차이에 대해 주목한다. 예를 들면 여성들은 일직선이 아니라 거미집식으로, 서로 관련 있는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남성들은 초점을 한 곳에 집중하고, 구획을 짓고, 항목별로 차곡차곡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이를 거미집 사고와 계단식 사고로 이름 지어 대별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낳은 열쇠를 저자는 수십, 수백만년 동안의 진화 과정에서 찾고 있다. 위험한 야수를 뒤쫓을 때 남성들은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던 반면, 선조 여성들은 매우 위험스런 조건에서 어른의 손길을 오랜 동안 필요로 하는 아기들을 키우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결정과정에서도 항상 여러 복잡한 변수를 생각하고, 또 말도 모르고 의존도가 높은 갓난 아기들의 요구사항을 끊임없이 읽어내다 보니 짐작이 발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사고방식이 다르게 진화해 온 것인데, 남성이 제1의 성인 시대에서 여성의 사고방식은 종종 덜 논리적이고, 덜 이성적이고, 덜 구체적이고, 심지어 덜 지적이라고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사회관계에서도 그대로 투영된다. 사회관계에서 남성들은 자신을 계급구조의 틀에 넣으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여성들은 협동과 조화, 즉 지지라는 네트워크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진화과정에서의 차이를 전두엽 앞쪽 피질의 구조가 남성과 여성 간에 어떤 차이가 있고, 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과학적 근거를 함께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차이로 인해 여성이 앞으로는 ‘제1의 성’으로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인류의 진화과정을 통해 얻는 언어와 관련된 재능, 타인의 몸짓과 자세, 얼굴 표정 그리고 다른 언어적인 단서를 읽을 줄 아는 능력, 섬세한 감수성, 감응력, 우수한 촉각․후각․미각․청각, 인내력,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거나 생각하는 능력, 어떠한 이슈든 넓게 전후 맥락으로 보는 폭넓은 시각, 장기적인 기획을 선호하는 경향, 네트워킹과 협상에 뛰어난 재능, 보살핌을 베풀려는 충동, 협력과 의견 일치를 옹호하고 다른 사람을 이끌 때도 평등주의 원칙을 택하려는 성향 등을 이 사회는 점점 더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들 들면 기업체들이 상하 계급적인 관리 구조를 해체하고 평등주의적인 팀 플레이를 강조하고 나섬에 따라 네트워킹과 의견 일치를 잘 이끌어내는 여성들의 능력은 앞으로 더더욱 중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1의 성』의 접근법은 신선하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언급할 때 우리 사회는 보통 우성과 열성의 관점에서 구조화한다. 그러나 그 구조화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남성관에 의한 구조화일 수밖에 없다.

인류는 정주생활이 시작된 최근 1만여년 동안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집중해서 돌파하려는 ‘계단식 사고’ 방식에 좀 더 치우쳐 왔다.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환경문제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환경문제 또한 남성-여성의 문제 등 여러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거미집 사고’일 것이다. 최근에 급격하게 한 쪽으로 치우친 추를 바르게 되돌리는 작업은 여러 영역에서 진행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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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의 박물관 이스탄불 기행 - 세계 인문 기행 5 세계인문기행 5
진순신 지음, 성성혜 옮김, 이희수 감수 / 예담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제목을 먼저 음미해서는 안된다. 원제는 ‘Savages and Civilization'인데, 한국어판으로 되면서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짜릿한 선택적 어구가 그 뒤에 붙었다. 그러나 제목처럼 이 책은 자극적이지도 않으며, 숨 가쁜 논쟁이 이어지는 책도 아니다.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은 긴 호흡을 요하고 있다. 잭 웨더포드는 각 장마다 세계의 한 곳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 곳은 아프리카의 말리가 되기도 하고, 러시아의 바이칼호가 되기도 하고, 아메리카의 볼리비아가 되기도 한다. 원주민의 삶을 자세히 투영해보거나, 야만과 문명의 양상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한올 한올 풀어가고 있다.

이 책은 그러면서도 인류문명을 시대순으로 얘기하고 있다. 현재의 땅에 서서 현실을 묘사하면서 그 속에서 인류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현재 우리 세계에 아직도 여러 문명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의 단증이기도 하다.

저자는 크게 역사를 3단계로 나눈다. 고대문명에서 15세기경까지 이르는 부족문화와 다양성의 문화가 존재하는 시기다. 원시시대부터 유목민문화, 정착생활, 세계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진보를 가져오는 원동력은 서로 다른 문화집단 간의 역동적인 긴장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나, 각 문화집단은 그 나름대로 제 기능을 훌륭히 수행해왔다는 것을 얘기한다. 나아가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일으켰다는 것 또한 놓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농경은 채집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지만, 기대 수명이 짧아지고 키가 작아지며 질병이 많아지고 영양 상태가 나빠지며 주기적으로 기근을 겪는 등의 대가를 치렀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 다음이 근대의 국민문화와 세계 질서가 대두되는 시기다. 그러나 국민문화와 세계 질서는 접촉이 있을 때마다 부족민과 다른 문명을 끊임없이 파괴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세계의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문화를 창조하려고 애썼으나, 근대의 국민주의 문화는 그들이 지배한 넓은 지역에서 획일성을 강요한다.

획일성은 파괴를 낳는다. 유럽에서 싹튼 세계문명은 유럽을 빠져나와 카나리아 제도, 카리브해 원주민, 아메리카 주민, 폴리네시아 원주민 사회를 깡그리 말살해갔다. 현대 세계는 반대나 변이나 일탈을 거의 용납하지 않았고, 특정 사회체제에 맞는 획일적인 주민들을 요구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하여 지금의 세계문화의 혼란기에 접어들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 혼란의 정체는 지금이 위기의 끝에 서 있다는 진단과 일맥상통한다. 역사적으로 전쟁이나 역병, 환경교란 등의 이유로 비교적 갑자기 무너진 문명의 예가 많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단일한 지구 문명으로 통일되어 있어 단지 한 문명의 몰락이 아니라 세계문화의 몰락으로 곧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저자는 더욱 심각성을 두고 있다. 한 부분의 멸망은 연쇄 반응을 일으켜 지구 전체를 휩쓸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최근 1만년이라는 기간은 채집으로부터 모종의 어마어마하게 뛰어난 생활방식으로 옮겨 가는 과도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낙관적으로 보든, 비관적으로 보든,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의 커다란 한 시대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문명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이 순간, 저자는 우리 문명 스스로 아마겟돈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난제는 획일적으로 살지 않으면서 조화롭게 사는 것, 즉 상업, 대중문화, 통신 등과 같은 세계적인 힘에 의해 통일되면서도 종교나 민족성 등과 같은 분야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평화로이 유지하는 것이다.”라고 답하고 있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닥칠 위험이 있는 문제들을 우리가 극복하려면 모든 문화가 지니고 있는 모든 지식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클라이브 폰팅은 ‘녹색세계사’를 통해 세계사를 환경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바 있다.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은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을 통해 언어의 다양성 말살이 우리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 책도 비슷한 맥락에 서 있다. 문명의 발달과정이 파괴의 역사를 걸어왔다는 지점에서는 환경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고, 문명의 다양성 입장에 굳건히 서서 문화 또는 문명의 획일성이 문명의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얼마전만 해도 문화적 상대성은 상대편 문화에 대한 똘레랑스를 뜻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관점은 다소 점잖은 태도로 느껴진다. 상대방이 없으면 자신도 없다는 절박감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제목은 수정되어야 한다. 야만과 문명은 분리된 다트판으로 우리가 화살을 던져 살아남을 쪽을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다. 둘 다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해야 하며 그 관점에서 그 둘은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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