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큰애 숙제를 봤더니 주제가 '우리 가족 자랑하기'다. 아이들 숙제라 하지만 아무래도 초등학교 저학년은 부모가 조금은 도와줘야만 한다.

우리 가족을 개략적으로 소개하고 가훈을 적은 다음, 이제 본격적으로 가족을 자랑하는 부분에 왔다.

"윤호야, 네가 다른 아이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우리 가족만의 특징을 적는 거야? 어떤 것을 말 하고 싶어?"

그동안 우리 가족만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것을 해오지 않았나 자부했는데,아이는 쉽게 연필을 들지 않는다. 연신 "몰라." 하고 가볍게 대답하고 마는 거다. 그래도 우리 가족의 '정체성이 없다'는 것에는 수긍되지 않는다. 다만 아이가 그런 방식으로 적는 것에 익숙하지 않겠지 하는 합리화가 금방 이어진다.

"그러면 윤호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우리 가족 하나 하나를 자랑하는 거야. 아빠, 엄마, 동생, 그리고 윤호 순으로 말야."

아이가 이 방식이 쉽다고 느껴졌는지 동의를 한다.

"맨 처음, 아빠. 윤호가 생각하기에 아빠는 어떻다고 생각해? 친구들에게 무엇을 자랑하고 싶어?"

동양인의 기본 습성상 이렇게 얘기할 때는 기본적으로 쑥쓰럽다. 그래도 숙제는 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에 쑥쓰러움을 누르고 답을 유도해본다. 그런데 쉽게 답할 줄만 알았던 큰애가 두번째 찬물을 끼얹는다.

"몰라. 아빠가 얘기 좀 해 줘요."

몇 번 물어봐도 쉽게 상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이제 한 발 물러서고 팔짱만 끼고 있을 수는 없다. 쑥쓰럽지만 카드를 하나 슬쩍 비춰줘야만 한다.

"얘기할 게 없어? 뭐 있잖아?"
"뭐요?"
"(삐질삐질...)... 음.. 예를 들면?"
"예를 좀 들어봐요."

이 즈음이면 물러서지도 못한다. 무언가 내가 말려가는 느낌이다. 이제 우리 가족에 대한 자긍심이나 정체성을 아이에게서 찾아야겠다기 보다는 내 자존심이 더 이상 구겨지지 않는 것이 더 급선무가 되어버린다.

"예를 들면, 동생이 아빠보고 아빠는 항상 웃는다고 하잖아. 그리고 너희들과 같이 놀기 위해서 노력하는 편이고... 뭐 그런 거..."

이때 갑자기 아이가 "아하. 아, 생각났다!"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쁠 수가.. 내 자존심이 더이상 구겨지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 그래! 적어봐. 윤호가 느끼는 대로 적는 거야."

내가 주문하지 않아도 아이는 거침없이 적어나갔다. 다 적어놓은 게 이렇다.

"우리 아빠는 우리들과 잘 놀아준다.(단, 시간 있을 때만)"

아이는 진솔하다. 결코 사교적인 언사를 하지 않는다. 아이가 쓴 "(단, 시간 있을 때만)"이라는 표현이 내 안일함을 후빈다. 느낀 대로 말하고 쓴다. 그래서 거울이다.

그래도 내심 몇 마디 적을 줄 알았다. 그런데 단 한 마디 적어놓고, 그것에서마저 단서를 단다. 아빠에 대한 신뢰는 단서조항이 있는 신뢰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몇 초가 지나니 인정이 된다.

모든 게 그렇다. 성적표이든, 인사고과든, 건강진단표이든 자신이 했던 것 이상으로 기대하는 법이다. 그러니 받아들고는 대부분 실망하고 만다. 나 역시 아이가 맨 처음 우리 가족에 대해 공란의 답지를 제출하는 것에 1차적으로 실망하고, 아빠에 대해서도 선뜻 답을 못하다가 답을 해도 단서 달린 답을 한 것에 2차적으로 실망하고 만다. 나는 그동안 성적표나 인사고과를 받아들 때 항상 의연한 편이었으나, 이번에 아이가 매긴 성적표에 대해서는 담담해지지가 않는다.

그러다가 그래.. 이게 내 성적표지.. 시간이 약간 지나서야 아이의 냉철한 판단이 고마워지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는 거울을 넘어 우물물처럼 보인다. 자만심을 가지게 하는 거울이 아니라 저 멀리에서 일렁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자신을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우물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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