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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 서현의 우리도시기행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나온 것이 1993년이다. 이 책은 답사여행이라는 실용적 가치 외에 지적 충만함은 물론 철학까지 주었다. 이 책 덕분에 문화유산은 전문인의 영역에서 일반인의 영역으로 걸어나왔다. 그러나 그 지적 충만함과 철학을 좀 더 절실히 느끼기 위해서는 먼 거리를 움직여야만 했다. 가지 않은 곳은 그저 여백을 상상에 의존하여 채워야만 했다. 그러면서 독자들은 문화유산에 깃든 철학의 통렬함에 시원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철학이 깃든 것이 비단 문화유산뿐이겠는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이 시대의 철학이 가장 잘 깃들어 있는 유형물은 바로 도시일 것이다. 그러나 이 도시는 실용적 가치가 없다는 점에서 문화유산보다 훨씬 읽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의 저자 서현씨는 '도시는 청자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청자가 한 잔 술을 담았다면 도시는 시민의 인생을 담기 때문이다.
당대의 철학을 가장 농축하고 있는 것은 문학도 사찰도 청자 백자도 아니다. 이들은 2차적 성징물일 따름이다. 오히려 이들보다 사람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도시 자체가 가장 잘 농축해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시에서 살아갈지언정 그 도시 자체를 읽지 않는다. 그 도시 자체에 당대를 살아가는 철학이 얼마나 짙게 배어있는지를 논하지 않는다.
건축가인 저자는 단지 건축물만을 논하지 않았다. 건축물은 그 거리와 그 도시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쓰여진 20여 개의 거리는 우리가 익히 아는,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어제도 오늘도 다녔던 바로 그 길들이다. 이 책은 그 길들에 대한 평론이 아니라, 그 길들을 있게 한 오늘의 현실에 대한 평론이다. 그리고 그 평론을 통해 그 길들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현 주소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얼굴임을 알게 된다.
이 책을 통해 그 현 주소를 알아가고 그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는 과정은 부끄러워하고 분노하고 통렬함을 느껴 가는 과정이 된다. 그 거리에 여러 사회계층의 사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하고, 갑자기 커버린 육체가 부실함을 여지없이 드러내듯 우리 경제의 감춰진 모습을 남김없이 비추기도 하고, 화장기 사이로 주름을 숨길 수 없듯 우리 사회의 모순이 그 거리에 여지없이 투영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저자는 '시민이여, 이 거리에 침을 뱉어라'고 주문한다. 거리를 걸으며 분노하라고 말한다. 새로운 거리와 거리문화를 만드는 첫 번째 발걸음은 먼저 분노하고 침을 뱉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걸어다니고 있기에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이 익숙함과 먼저 결별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거리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거리를 읽을 눈이 없거든 이 시대의 문화를 논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제 생각 없이 걷던 거리를 오늘은 거리에 다가서서 거리를 읽으려 한다면 이는 순전히 이 책의 공이 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