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1
최명희 지음 / 한길사 / 199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혼불』에서 강모, 효원, 강실이는 때로는 주인공 같고, 때로는 시대상을 설명하기 위한 주요 등장인물 같다. 카메라의 초점이 이들에게 맞춰질 때는 그 시대상은 배경으로 물러서지만, 초점이 일제시대 생활과 세시풍속으로 맞춰지면 이들 주요 등장인물이 배경으로 물러선다. 3대에 걸쳐 전개되는 이야기와 심혈을 기울여 복원한 당시 문화는 각각 씨줄과 날줄이 되어 서로 엮인다. 그리고 엮임으로써 서로가 살아난다.

독자들을 당시 문화에 젖어들게 하지 못한 채 이야기에만 빠져들게 하는 것은 어쩌면 유희다. 당시의 문화와 세대 변화의 흐름에 대한 체화가 없이 강모의 갈등과 효원과 강실이의 내면을 그려내는 것은 손 끝에 의존하는 작법일 뿐 가슴을 울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혼불』은 당시 문화를 살려냄으로써 이야기 또한 살려내고 있으며, 부수적으로 어느 역사책, 어느 다큐멘터리보다 더욱 사실적이고 강한 힘으로 당대의 경험을 독자들에게 선물한다.

역사와 문화야 다른 것으로 살려낼 수 있다고 하지만 민초들의 걸쭉한 입담과 사투리는 문학작품 아니면 살려내기 힘들 것이다. 이의 복원은 소설의 또 다른 공로일 것이다. 『태백산맥』이 전남 벌교 사투리를 복원해냈다면, 『혼불』에서는 전북 남원 사투리를 복원해냈다. 이는 당 고장 사람들에게는 축복이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자산일 것이다. 최명희씨의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마모되지 않는 모국어 몇 모금을 고이게 하고 싶다'는 염원은 강한 울림으로 후세에 길이 남게 되었다. 남원은 최명희씨로 인해 『춘향전』, 『흥부전』에 이어 '3대 소설'을 완성한 셈이기도 하다.

입담과 사투리, 그리고 서민들의 문화는 단지 이 소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주요 갈등 축 위에 덧칠된 것이라기보다 이 소설을 이루는 주요한 구성요소 중 하나다. 미하일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의 주인공은 그레고리만이 아닐 수 있다. 러시아 내전이라는 시대상과 당대의 수많은 인물상을 그레고리라는 인물을 중심축으로 하여 그려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혼불』 역시 그러하다. 고리배미와 거멍굴의 사는 인물상은 단지 매안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한 주요 배경 설명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이야기를 가지면서 소설의 중심축과 어울려 총화를 이루어낸다.

『혼불』을 두고 한편에서는 시대변혁적인 내용을 담아내지 못하고 양반 종가집의 혈통과 문화를 계승하려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다는 비판이 있는 듯 하다. 『고요한 돈강』은 그레고리라는 좌파와 우파 가운데서 갈팡질팡 휩쓸리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기운을 읽어내고 전달하는데는 전혀 손색이 없었다. 『혼불』의 강모 역시 전통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나 이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우유부단한 인물로 나온다. 결국 강모는 청암부인의 영혼의 부름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자유의지의 부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으로써 갈등을 하는 것이다. 양반 종가집의 혈통과 문화를 계승하려는 아름다움을 그려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의지가 결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이 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소설은 만나기 힘들 것이다.

『혼불』은 최명희씨가 살아 있을 때는 그의 혼심의 공력이 다 투여된 작품이었고, 그렇기에 그가 생을 다한 이후에도 그의 '혼불'이 어려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운 작품이 되었다.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는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는 최명희씨의 얘기는 정경을 묘사하는 시어 같은 한 문장에서도 그 공력이 그대로 전달될 정도다.

『혼불』의 한 문장 한 문장이 허투로 다가올 수 없는 이유는 그 문장 하나 하나에 최명희씨가 자신의 생을 쪼개 넣어 만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독자는 최명희씨에게 조금씩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많은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게 빚을 졌다는 느낌이 드는 책은 『혼불』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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