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1
최명희 지음 / 한길사 / 199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발자크, 프로이트 등 한 인간의 삶을 홀로그램처럼 생동감 있게 불러일으킨 초상화가 슈테판 츠바이크, 고대 로마에 쌓여 있는 먼지와 케케묵은 냄새를 털어버리고 로마역사에 생기를 불어넣어 우리 눈 앞 가까이 가져다주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 그들이 재현한 것이 서구의 역사나 위대한 인물이었다면 최명희씨가 『혼불』을 통해서 재현한 것은 우리의 근대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아간 평범한 인물이었다.

『혼불』은 소설이되 '허구'의 구성이라기보다 우리의 가까운 시대, 우리의 가까운 모습의 '재현'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사실을 모사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그 시대 한 가운데로 최명희씨가 걸어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쓰면서 피렌체에서 몇 km 떨어진 마키아벨리 별장에 이르는 길 등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자신의 눈으로서가 아니라 마키아벨리의 눈으로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혼불』의 최명희씨 역시 그렇다. 각 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이전에 최명희씨는 이 소설의 무대가 된 남원 매안마을의 풍광을 장중하고 아름다운 시어로 묘사하곤 한다.

그러한 글을 읽을 때면 최명희씨가 매안마을의 노적봉이 올려다보이는 곳, 바로 그 곳 들녁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곳에 서 있는 최명희씨는 매안 이(李)씨들의 영혼을 흡입하고 그들의 마음을 공유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온 신경을 대본의 상황 속으로 몰입시키려는 연기자 같고, 닳아빠진 조그만 공룡 뼈에서 공룡의 모습을 혼신하여 그려내려는 고고학자 같다. 도저히 형체를 알 수 없을 듯 하던 공룡 뼈가 살아 있는 공룡으로 형상화되어 가듯,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려는 최명희씨의 몰입에 의해 매안마을은 아연 예전의 모습으로 살아나 청암부인의 기운이 들녘을 뒤덮게 되고, 이런 최명희씨의 인입은 금방 독자들의 인입으로까지 전염되어 버린다.

『혼불』의 최대의 힘은 이러한 흡인력이다. 인물간의 갈등과 사건의 복선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끌어들이는 흡인력도 아니고, 이야기의 전개과정이 스펙타클하여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인력도 아니다. 잉크에 담겨진 리트머스지의 모세혈관을 타고 잉크 빛깔이 서서히 물들어 결국 리트머스지 전체가 잉크에 잠겨버리듯, 독자들을 서서히 젖게 하여 어느덧 독자 자신을 1940년대의 생각과 상황 인식으로 이끌어버리는 흡인력이다.

『혼불』은 강모, 효원, 강실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이야기를 끌고가는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설명이 부족하다. 또한 일제시대 남원 매안마을의 양반 종가집 며느리의 3대 이야기를 엮어내는 대서사시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못하다. 일반 소설식 이야기 전개방식에 의하면 맞는 표현일지 모르나 최소한 『혼불』에는 합당한 표현은 아니다.

보통의 소설은 몇몇 주인공을 설정하고, 이 주인공들간, 또는 다른 사람들간의 갈등관계를 그려내고, 그 다음 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형상화해낸다. 일반적으로는 가전제품 사용설명서 첫부분에 해당 제품의 부품과 용어를 설명하는 장이 오듯, 소설의 전반부에서는 그 소설을 구성할 요소들이 나온다. 그리하여 강 실핏줄들이 모이고 모여들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가며 종내에는 하나의 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가듯, 각 열거된 요소들이 하나의 이야기 또는 하나의 주제의식 아래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는다. 열거된 모든 요소들은 이야기 전개에 필수 요소들이며, 주제의식에 벗어난 사건 전개는 모두 생략된다.

그러나 『혼불』은 이야기 중심의 소설이 아니다. 모든 사건들은 단지 클라이막스를 위해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보통의 소설이 단일한 주제의식 아래 그 주제의식과 관련된 그물망 같은 잎맥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생략된 나뭇잎이라면, 『혼불』은 그 잎맥 사이 사이를 혼신의 힘을 기울여 채워놓은 꽉 찬 나뭇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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