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 - 어른을 위한 동화
정호승 지음, 박항률 그림 / 현대문학북스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그동안 '어른들이 읽는 동화'라는 부제가 달린 책에 그다지 눈길을 주지 않았다. 간혹 가벼운 읽을 거리를 찾을 때 손에 잡기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는 작위적인 설정이나 비유에 실망한 적이 많았다. 차라리 잘 쓰여진 '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오히려 큰 울림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만약 나처럼 이렇게 '어른들이 읽는 동화'에 실망해온 사람이라면 정호승 시인이 쓴 <모닥불>을 한번 읽어볼 것을 정말 추천하고 싶다.

내가 아는 정호승 시인은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라고 얘기하거나,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 지금 당장 내 목을 베어 가십시오'라고 너무나도 도발적이고, 너무나도 직설적인 사랑법을 얘기하는 시인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닥불>을 읽고서야 그가 얘기하는 '사랑'의 참뜻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책을 '사물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쓰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에 그는 혼을 불어넣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사물에 그는 허리를 굽혀 가까이 다가가서 애정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런 시선이 던져지자 그 사물은 우리 가슴을 울리는 얘기를 풀어냈다. 종과 그 종을 치는 종메 사이의 관계, 자물쇠와 열쇠 사이의 관계, 물과 나룻배 사이의 관계, 나무와 그 아래서 쉬는 여인 사이의 관계... 이런 관계는 그저 우리가 흔히 보는 관계일 뿐이나, 정호승 시인의 관심이 던져지면, 관심이 사랑으로 바뀌고, 사랑이 사물에 혼을 불어넣어 그 사물은 다른 언어로 얘기하기 시작한다.

서로가 서로를 아프게 하는 종과 종메 사이를 그려내는 것은 시인이 아니라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정호승 시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린 서로 함께 아픔으로써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는 거야. 어떻게 고통 없이 아름다워질 수 있겠니'라고 말한다. 서로가 잘낫다고 우기던 자물쇠와 열쇠가 다른 하나가 없이는 자신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자물쇠가 망치에 부서지는 간결한 문장 하나를 통해 얘기하고 있기도 하다.

그가 그리는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가 한 곳을 바라보는 사랑'이다. 하나가 하나를 딛고 일어서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가운데 더 많은 것을 얻어가는 상생의 사랑이다. 서로 애절하게 갈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고통의 과정을 겪어야만 완성되는 사랑이다.

그러나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주변에 보이는 사물을 다시 한번 보게한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고난 다음 길가에 쌓여있는 눈더미의 잔해나, 과일가게에서 과일을 담고있는 광주리나, 사무실에 걸려있는 시계나 이 모든 것들에게 관심을 가지면 그게 다른 모습으로 외화되어 많은 얘기를 들려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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