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시로 만난 ‘선물’ 괴테도서관 공동작업해요
한겨레 임종업 기자
» 언어의 이쪽과 저쪽에 있던 최두환-레기네최씨는 시를 매개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하여, 독일이든 한국이든 어드메에 산들 상관 있으랴. “내 고향은 종교와 언어 그리고 부부의 인연”이라는 정서는 위와 너머를 지향하는 시 세계에서는 하등 이상할 게 없을 터이다. 70대라고 보기 힘들 만큼 천진스러운 것도 그 탓이지 싶다.
한국의 책쟁이들/(21) 독문학자 최두환-레기네 부부

한강에서 상도터널을 지난 뒤에는 그냥 다 잊자. 그렇잖으면 내내 시대착오 증세로 멀미를 할 터이니까. 버스에서 내려 뒤로 돌아. 행길과 나란한 옆 언덕길을 톱아오르고 샛계단을 오르면 느닷없이 나타나는 구조물. 도저히 대문이랄 수 없는 크기의 암청색 철문. 커다란 쇠고리를 부여잡고 탕탕! 이리 오너라, 라고 해야 할 법하다.

최두환(72)-레기네최(71)의 성채.

“독일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좋은 부부는 하늘이 맺어준다.’ 한국에서는 남녀의 결혼을 ‘하늘과 땅’의 결합으로 비교하는 것 같습니다. 글쎄요. 남편은 항상 위에 있고 아내는 항상 아래에 있어야 합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남편에게 아내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아내에게도 남편은 하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하늘의 보물, 즉 천보입니다. 국보보다 훨씬 더 귀중한 천보입니다.” (레기네, ‘주례사’, 1999)

이들은 은퇴한 독문과 교수. 남편은 중앙대에서, 아내는 서강대에서 17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5년 독일 괴팅겐에서 서른, 스물아홉 늦은 나이에 신접살림을 차려 올해로 마흔두 해를 함께 살았다.

독일서 5년 펜팔끝 결혼해 한국서 교수직
김지하 시 독역하고 파우스트 오역 바로잡아
집안 층계참엔 토마스 만, 큰방엔 온통 괴테
“오랫동안 동무처럼 지낼 책만 사죠”
출판사 차려 한국엔 괴테, 독일엔 퇴계 전파

1960년 ‘첫 만남’을 떠올리는 이들의 얼굴은 상기됐다. 독일어를 익혀야 하는 총각과 아시안에 눈 동그란 처녀는 말동무였다. 쾰른 로센몬탁 사육제. 라인 강변을 거닐며 헤르만 헷세의 <싯타르타>를 화제 삼았다. “달이 항상 차 있지 않듯이 사랑도 기운다.” “단지 달라져 보일 뿐, 구름 위에도 달은 빛난다.” 하이쿠식 대화는 본-괴팅겐 편지교환으로 이어졌다. “우정은 평행선처럼 지속된다”는 비유에 “보이지 않는 평행선의 끝은 교차돼 있다”는 화답. 펜팔남녀는 5년 뒤 더 이상 편지교환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서로에게 선물인 이들의 첫 작품은 김지하 시 독역. 구명운동이 전개되던 과정에서 주어캄프 출판사가 그의 시 번역을 맡겨왔다. 2년이 걸려 김지하 시선집 <황토 및 그 밖의 시들>(1983)이 최두환과 샤르 슈미트의 공역으로 출간됐다. 하지만 ‘오적’만 제외하고 모두 최씨 부부의 번역이다. 한국어를 아는 남편이 초역을 하고 독일인 아내가 독일어 시 답게 마감했다. 독어본 김지하의 시를 읽어본 한 독문학 전공자는 시편이 운률에 맞고 무척 우렁차다면서 번역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평했다. 레기네는 독역에서 자기 몫은 1/3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고, 남편은 레기네가 언어감각이 있으며 외우는 시가 50여편이라고 말했다.

독역땐 남편이 초역 아내가 감수

82년, 84년 각각 입국한 이들은 대학강단에 섰다. 아침에 부부로 헤어진 이들은 저녁이면 다시 연인으로 만났다. 그 사이의 시간은 각자의 제자 만들기. 최씨는 독일시 특히 괴테의 <파우스트>를 가르쳤다. 1부를 강독하면 한학기가 끝났다. 레기네는 독일원전 강독, 독어회화, 독일문화 등을 가르쳤다. 살가운 성격 그대로 독일어성서 강독, 독일인교회 성가대 등 과외활동도 활발했다. 그들의 교수시절은 독문학과 전성기와 겹친다. 전국 독문과가 72개에 이르렀을 정도. 의욕적으로 가르친 만큼 보람도 컸다. 제자들은 대기업에 쉽게 입사했다.

정원 너머 멀리 아파트군이 보이는 일층 침실. 최씨의 최근 관심사를 반영하는 책들이 서가에 꽂혔다. 풍류도에 관한 책들. “최치원이 쓴 ‘난랑비 서문’에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어 이를 풍류라 하는데 이는 유불선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는 내용이 나와요. 그 맥은 퇴계 이황에게까지 이어졌어요. 명산대찰을 돌며 쓴 시를 보면 알아요. 퇴계를 근엄한 성리학자라고만 알고 있지만 자기를 벗어나 대자연과 합일하고자 하는 풍류도가의 면모가 숨어 있어요.”

» 부부가 벽에 붙여놓은 사진과 쪽지들.
토마스 만 서가가 우두커니 선 층계참을 지나 이층에 오르면 남면한 가장 큰 방이 괴테한테 주어져 있다. 나머지 작은 방은 브레히트, 독일시, 철학 등 기타. ‘괴테의 방’은 창을 뺀 사방이 온통 괴테, 괴테다. 다섯 종의 괴테전집, 자연과학 저작집, 대화집, 샤롯테 폰 슈타인 서간집 등 일차 자료와 동시대를 산 실러의 저작들과 학술논문 등 이차 자료들이다. 1881년 이래 독일의 괴테학회에서 낸 두 가지의 연간 학술지와 1994년 이래 한국의 괴테학회에서 낸 학술지가 나란히 꽂혔다. 전자는 독일 괴팅겐 고서점에서 운좋게 만난 것이고, 후자는 그가 회장으로 있는 동안(1994~98) 간여해 펴낸 것이다. 독어판 괴테전집 중 완결본은 바이마르판. “3대에 걸친 작업인데다 중간에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편집방침이 바뀌고 했지만 유일한 완본입니다. 나머지는 선집이라고 보면 돼요. 일본에서는 학생용 함부르크판을 토대로 번역한 ‘전집’이 있어요. 우리는 물론 전집이 없어요. 60년대 말 ㅎ출판사에서 6권으로 선집이 나왔는데 악명이 높았어요. 역자 이름을 도용하고 번역도 엉망이어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는 오역의 예로 <파우스트>를 들었다. 잘못 꿴 첫 단추는 파우스트가 50~60대의 노 교수라는 것. ‘밤’ 장면에 나오는 독백을 노교수의 인생 한탄으로 이해해 ‘아!’ 또는 ‘아아!’로 시작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파우스트의 나이는 30살. 따라서 그 감탄사는 학문과 일상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의 번역은 ‘악!’이다(27쪽, <파우스트>, 시와진실, 2000).

쪽지에 “최두환 선생, 문 다드세요”

다시 일층으로 내려오다 현관 벽에서 맞닥뜨린 커다란 쪽지. “최두환 선생, 문 다드세요.” 삐뚤빼뚤 필체에 낯선 표기법이다. 아무래도 최씨가 꼬리가 길고 레기네는 추위를 타는 모양이다.

“괴테의 ‘은행나무잎’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둘이 하나가 된 것일까/ 하나가 둘로 나뉘어진 것인가/ 그대는 느끼지 않는가/ 내가 하나이면서 둘인 것을.’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은행잎을 보고 좋은 부부가 어떠한 것인가 알 수 있습니다. 아래 쪽은 하나로 되어있고 위 쪽은 둘로 나뉜 은행잎처럼 하나의 가정을 이루되 남편과 아내는 각기 개성을 존중해야 합니다.”(윗글)

각자의 제자 만들기가 끝난 지금 그들은 이제 다시 하나가 되어 공동작업을 한다. 박희진 시인과 이퇴계의 시를 독일어로 옮기는 일. 박 시인의 것 100편은 올해 안 슈트트가르트에서 나올 예정이고 퇴계는 샘플 번역단계다. “퇴계와 괴테의 자연관은 아주 비슷해요. 시인이 자연이고 자연이 시인이죠.” 최 교수는 괴테를 ‘독일의 풍류도인’이라고 말했다. 괴테와 퇴계는 우연하게도 소리값이 거울상이다.

틈새시간. 비스마르크시대, 바이마르공화국시대, 빌헬름시대의 시가지와 생활사를 기술한 <베를린> 3부작, <고딕시대 생활사>. “분단시절 동독에서 나온 책 가운데 민중생활사 연구가 출중해요. 사회주의권이어서 그렇지 싶어요.” <고요아침 나라로 떠난 여름여행>(에른스트 폰 헤세 바르테크, 1895). 그 무렵 유행처럼 번졌던 귀족들의 동방여행기 가운데 하니다. “남편은 책 고르는 안목이 뛰어나요. 지금 필요치 않더라도 자료가치가 있거나 앞으로 읽고 싶은 책을 사는 편이에요. 나는 꼭 필요하고 오랫동안 동무처럼 지낼 책만을 사고요. 하루살이 베스트셀러를 사지 않는 것은 똑같아요.”

노부부가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눈치없이 오래 머문 것. 시간착오 멀미가 겨우 가라앉자 파우스트의 밤이 창가에 넘실댔다.

유러피언이라고 자칭하던 독일여인이 낯선 땅에서 24년째. 가끔 고향이 그립지 않을까. “내 고향은 나의 남편과, 나의 종교가 있는, 그리고 남편과 일상어로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서울입니다.” 그리고 창문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집은 20여년전 그대론데 사람과 나무만 늙어갈 뿐이네.”

“재고·반품 쌓였어도 상관없어요”

괴테 컬렉션 출간과 괴테도서관 설립 꿈을 가진 그들은 2000년 괴테자서전에서 따와 ‘시와진실’이라는 출판사 간판을 걸었다. 지금까지 20여권을 냈지만 <파우스트> <서동시집>만 나간다. 대문간 차고를 개조한 창고 가득 재고와 반품책이다. “대부분 박희진 시집이오. 12권으로 내기로 한 전집이 4권까지 나왔어요. 거의 반품으로 되돌아 오고 있지만 개의치 않아요. 괴테의 대작 <서동시집>도 사후 70여년이 지난 1900년까지도 초판이 출판사에 재고로 남아 있었으니까요.”

“어느 날, 하느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들이 내 희귀한 선물을 잘 유지하였느냐? 너희의 얼굴을 내보이라! 기쁨과 희망이 잘 보존돼 있느냐?”(윗글) 낭만파 노부부의 표정에 그 대답이 담겼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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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인 살림살이 조금 나아졌지만…
  • 문화부 2006년 실태 조사 결과 나와 창작관련 月收 100만원 이하가 절반
  • 신형준기자 hjshin@chosun.com
    입력 : 2007.03.15 01:04
    • 한국 문화예술가들의 생활이 “조금 향상됐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문화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13일 ‘문화예술인 실태조사’의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는 지난해 말 문학·미술·건축·사진·음악·국악·무용·연극·영화·대중예술 등 10개 분야로 나뉘어 전국의 문화예술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문화부는 월 평균수입의 증가를 예로 들며 “예전보다 살림이 조금 나아졌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창작 등 문화예술 본연의 업무로 월 201만원 이상을 버는 문화예술인은 23.9%로 2003년 조사치 16.9%에 비해 7% 포인트가 올랐다. 월 평균 101만~200만원의 소득을 올린 문화예술인도 20%로 2003년 14.3%에 비해 5.7% 포인트가 증가했다. 아울러 월평균 100만원 미만의 비율은 56%로 2003년 69%에 비해 많이 줄었다.

      그러나 직종별로 수입은 큰 차이를 보였다. 창작 등 본연 업무로 월 평균 201만원 이상 수입을 올린 직종은 건축 64.5%, 대중예술 43%, 영화 36%, 국악 30.5%였지만, 문학의 경우 97.5%가 월 100만원 이하였고, 사진도 91%, 미술도 75.5%가 월 100만원 이하였다.

      다만 벌이와 ‘주변의 평가에 대한 만족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중예술(34.5%), 영화(29.5%), 국악(26.5) 등이 ‘높다’고 답해 상위권을 차지했으며, 창작 활동으로 인한 벌이가 가장 떨어지는 문학도 24.5%가 ‘높다’고 답했다. 그러나 창작 활동으로 인한 수입이 가장 높은 건축은 10%만이 ‘높다’를 택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문화예술 본연의 일’을 통한 월 평균 수입이 ‘없다’고 응답한 사람(27.2%)을 포함해 ‘월 100만원 이하’라는 대답이 56.1%에 달해 ‘문화예술’이 여전히 고달픈 길임을 드러냈다. ‘문화예술 본연의 업무’란 소설가가 소설을 쓰거나, 화가가 그림을 그려서 번 돈을 말한다. 화가가 미술학원 강사로 번 돈은 포함되지 않는다. 창작 활동뿐 아니라 모든 직업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은 201만원 이상이 52.5%(2003년 50%)였으며, 100만원 이하는 21.1%(2003년 25.6%)였다.

      박승범 문화관광부 예술정책팀 사무관은 “창작 활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월평균 수입으로 볼 때 100만원 이하의 비율이 크게 떨어졌다는 점이 반갑다”며 “열악하지만 상황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1인당 연간 국민총소득(GNI)은 2003년 1516만원에서 2006년 1740만원(추정치)으로 15% 정도 증가했다.(한국은행 통계)

     

    • [만물상] 가난한 문화예술인

    이선민 논설위원 smlee@chosun.com
    입력 : 2007.03.15 22:51 / 수정 : 2007.03.15 23:04

      • 주목 받던 젊은 시인 김수영이 1955년 서울 마포 집에서 닭을 치기 시작했다. 시작(詩作) 말고 번역을 열심히 해도 먹고살기 힘들었다. 닭 시중하는 아이 만용이를 두고 부부가 양계에 매달렸지만 그도 영 신통치 않았다. ‘모이 한 가마니에 430원이니/ 한 달에 12만~13만원이 소리없이 들어가고/ 알은 하루 60개밖에 안 나오니… 여편네의 계산에 의하면 7할을 낳아도/ 만용이의 학비를 빼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한다’(만용에게). ▶2004년 연극협회가 조사해보니 절반 넘는 연극인이 부업을 하고 있었다. 영화·TV 단역부터 우유·신문 배달, 대리운전, 공사장 막일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81%가 스스로를 ‘저소득층’으로 분류했다. 의료보험을 든 사람이 60%였고 국민연금과 산재보험료를 내는 이가 33%, 7%에 불과했다. ▶문화관광부가 조사해 그제 발표한 문화예술인 월수입을 보면 201만원 이상과 101만~200만원이 24%와 20%다. 2003년 조사보다 7%, 6%씩 늘었다. 월 100만원 이하는 69%에서 56%로 줄었다. 그러나 물가 오른 걸 생각하면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건축 분야는 201만원 이상이 61%였고 문학은 0.5%밖에 안 돼 분야별로 들쭉날쭉이다. 영화·무용·음악은 201만원 이상이 20~33%였지만 ‘없다’도 23~28%나 돼 장르 안에서 양극화가 심했다. ▶주머니가 두둑하다 해서 예술적 성취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을 펴면서 예술인 지원에도 적극적이었지만 그 덕에 뛰어난 작품이 나오지는 않았다. 공산 치하 러시아와 중국에선 파스테르나크, 솔제니친, 바진(巴金) 같은 위대한 작가가 배출됐지만 개혁·개방 후 뛰어난 작가와 작품은 오히려 줄었다. 그렇다고 문화예술인에게 이슬만 먹고 창작에 전념하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탈리아는 예술인 직능조합에 가입한 사람에게 싼 보험료로 의료보장을 해준다. 네덜란드는 초년 예술가에게 사회복지 수당을 준다. 우리 연극계도 2005년 복지재단을 만들어 연극인의 생계·교육·의료비 지원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자구책과 함께 국가와 사회도 문화예술인 복지에 관심을 기울일 때가 됐다. 문화예술인도 기본 생활을 꾸릴 수 있어야 선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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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표야, 하늘나라선 중학교 잘 다니지”



    하루하루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백혈병 소년과 그 어머니의 가슴 저미는 사랑 이야기가 책으로 출간됐다.

    이 책은 본보가 1월 27일 보도한 ‘백혈병 소년이 남기고 간 1년 9개월 삶과 죽음의 기록’의 완결편이다.

    2005년 4월 1일 백혈병 판정을 받은 이정표(13) 군은 올해 1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작가가 되길 꿈꿨던 정표는 투병생활 내내 일기를 썼다. 숨지기 사흘 전, 의식이 남아 있던 날까지 연필을 놓지 않았다.

    본보는 정표의 일기를 재구성해 우리가 때때로 헛되게 보내는 시간을 부여잡고 사투를 벌여 온 투병 어린이의 일상을 소개했다. 이 보도 이후 파랑새출판사는 정표의 일기와 어머니 김순규(41) 씨의 글을 모아 300쪽 분량의 책을 펴냈다.

    다음은 김 씨가 2005년 정표의 담임교사에게 보낸 편지의 한 토막.

    “잠깐 눈을 붙이면서 정표가 말합니다. ‘내일은 이렇게 아프지 않겠지. 내일은 오늘보다 덜 아프겠지. 아마도 오늘이 제일 아픈가 보다.’ 곁에서 이 못난 어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겪어 보지 못한 엄청난 고통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을까, 손을 잡고 지지해 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 정표 자리 그대로 비워두세요. 선생님! 꼭 다시 (정표를) 학교에 보낼게요.”


    백혈병을 앓던 이정표 군이 1월 14일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년 9개월간의 투병생활을 기록한 일기가 책으로 출간됐다. 13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에 진열된 ‘정표 이야기’를 한 어린이가 읽고 있다. 김미옥 기자

    정표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모자의 소원은 기적처럼 하나씩 이뤄지고 있다.

    정표의 꿈처럼 지은이가 ‘이정표’로 된 책이 출간됐다. 이제 정표는 작가 지망생이 아니라 유고 작품을 남긴 작가가 됐다.

    그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서울 등촌초교에서는 지난달 14일 그에게 명예졸업장을 선물했다.

    어머니 김 씨는 “졸업장을 주기 위해 정표의 이름을 부르는데 마치 아들이 살아있는 듯 느껴졌다”며 감회에 젖었다.

    김 씨는 가족과 함께 ‘정표 이야기’ 책을 들고 5월경 일본 골수은행을 찾아갈 생각이다. 2005년 10월 27일 한 일본인에게 골수 이식을 받은 정표는 입버릇처럼 일본 골수은행을 가고 싶다고 말해 왔다.

    김 씨는 “책 출간을 위해 정표의 흔적을 정리하는데 다 찾은 것 같아도 또 새로운 것이 계속 나왔다”며 “남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게 큰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파랑새출판사의 김진 팀장은 “정표를 통해 삶에 대한 겸손함을 배웠다”며 “미국 등에서 정표의 일기를 번역하고 싶다는 문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파랑새출판사는 책 수익금의 1%를 난치병 어린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www.wish.or.kr)’에 기부할 예정이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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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아이들아 산촌으로 유학오너라
    20일간 농촌학교 등교하며 홈스테이
    씨 뿌리고 불 때고 별바라기 체험
    아이들에겐 생태 감수성 깨워주고
    적막강산 산촌엔 “하하호호” 활짝
    한겨레 권복기 기자
    » 농산어촌의 학교는 지역의 버팀목이자 공동체의 뿌리다. 학교가 사라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어지면 농촌 공동체도 흩어지고 만다. 학교를 살리고자 산촌유학 프로그램을 추진중인 상주시 화북면 이명학(앞줄 왼쪽)씨와 농민들.
    상주 화북면 농가들 프로그램 마련

    어린이 여러분! 풀을 밟고 꽃을 보며 나무 사이에서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싶으세요? 자연 속에서 농촌과 산촌 생활을 경험하고 싶으면 산촌으로 유학을 오세요.

    산촌으로 유학 간다? 경북 상주시 화북면 일부 농가에서는 4월20일부터 20일 동안 도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산촌 유학 프로그램을 연다. 산촌 유학에 참여하는 도시의 초등학생은 이 마을의 농가에 머물면서 화북초등학교에 다니게 된다.

    산촌의 농가들이 도시 학생들 ‘유치’에 나서게 된 것은 학교가 처한 위기, 나아가 산촌공동체의 위기 때문이다. 이를 처음 발의한 이는 이명학씨. 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3년 동안 준비한 끝에 1999년 화북면으로 귀농한 이씨는 산촌 마을에 살면서 마을 공동체의 구심 구실을 하는 학교의 중요성과 농산어촌 학교가 처한 위기를 함께 알게 됐다.

    “정부에서 말로는 1면 1학교를 유지한다고 하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몇 년 안에 외딴 농촌이나 산촌 학교 가운데 상당수가 사라져 3면당 1학교도 안 될 것 같더라구요.”

    이씨는 지난해 5월30일부터 8박9일 동안 산촌 유학의 발상지인 일본에 견학을 다녀온 뒤 결심을 굳혔다. 일본은 70년대 이농현상으로 아이들이 사라져 점차 노화·공동화되는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고 폐교 위기에 처한 산촌 학교를 살리기 위해 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금은 전국에 90곳에 산촌유학센터가 만들어져 있고 지자체가 이를 지원하고 있다. 일본의 산촌 유학 프로그램에는 초등학생은 물론 중학생도 참여한다. 기간도 1년으로 길다.

    이씨는 귀국 뒤 곧바로 산촌 유학 추진에 나섰다. 이를 위해 농사일도 줄였다. 부인 정낙순씨는 물론 송난수 이현숙, 이은순 서은섭, 김희수 박명의 부부 등이 함께 뜻을 모았다. 이들은 지난해 가을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머리를 맞대고 산촌 유학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를 거듭했다.




    그 결과 이들 농가는 지난겨울 도시의 학생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기 위해 집수리를 마쳤고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목공, 동요배우기, 농가에서 함께 연기를 피우는 연기 축제, 요리하기, 퇴비 만들기, 나무하고 불때기, 나무 흙 담장 만들기, 도배하기, 채소밭 씨뿌리기, 별바라기, 밤길걷기, 명상 등 농촌이나 산촌의 생활에 푹 젖어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도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농사 체험, 예술 활동, 생태 살림살이, 명상 등의 분야에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농민들이 강사로 나선다. 참가비는 식비, 난방비, 단체활동비, 보험료, 진행비 등을 포함해 53만원. 2차, 3차 산촌 유학은 7월과 11월로 잡았다.

    이에 앞서 이들 농가는 17일부터 이틀 동안 화북면에서 ‘산촌유학 참가자 모집 및 화북 지역 설명회’를 연다. 설명회는 일본의 산촌 유학을 다룬 동영상을 보고, 학생들이 머물게 될 농가와 지역 환경을 둘러보는 등의 내용으로 진행된다. 봄나물 캐기 행사도 있다. 문의 이명학 011-517-0176.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사진 이명학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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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in] 코북페이퍼앤사이언스 서민호 대표
    입력: 2007년 03월 23일 21:18:23

    남들이 엄두를 못내는 일로 성공하는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 너도 나도 달려드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의 성향이다. 그럼에도 감히 그 누구도 그의 뒤를 이어 따라하지 못한다. 과학출판 전문회사 코북페이퍼앤사이언스(주) 서민호 대표. 그는 국내에서 하나밖에 없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국내에 과학출판사가 있긴 하지만 책 속에 과학교구재를 함께 넣어 생산하는 출판사는 전무하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토종 과학책, 외국에 첫수출 기록

    그만큼 서대표가 만드는 과학책은 일반적인 과학책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인체 과학책을 보자. 50여쪽으로 이뤄진 책 앞부분에는 인체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특이한 것은 책 뒷부분. 책 뒷부분은 종이가 잘 뜯어지도록 만들어졌는데 뜯어지는 부분이 모두 뼈 모양으로 돼 있다. 이 뼈 모양 종이들을 책 속에 적힌 대로 연결하면 140㎝의 대형 인체 골격이 만들어진다. 특히 이 인체골격은 풀이나 가위 없이도 종이로 된 뼈 모양을 뜯어 연결만 하면 만들어지도록 했다.

    그렇다고 모양만 갖춘 게 아니다. 각 뼈는 리벳으로 연결돼 사람 몸의 움직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정밀도가 실제 의과대학생들이 모형을 만들어 인체 공부를 할 정도다.

    ‘인체골격모형’ 외에도 지금까지 ‘야광별자리’ ‘태양계’ ‘우주왕복선’ ‘티라노 사우르스’ 등 ‘끼워서 쉽게 만드는 첨단 과학학습모형’ 10종을 출간했다. 또 ‘체험과학 학습’ 5종, ‘종이로 배우는 교과서 과학’ 12종도 나와 있다. 이들 책도 모두 과학이야기를 읽고 그 주제를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도록 제작했다. 이런 과학책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없다.

    덕분에 이 책의 진가는 외국에까지 알려졌다. 2005년 3월 국내 출판사상 최초로 미국에 과학책을 수출했다. 미국 최대 교구회사인 캐롤라이나사와 매년 20만부씩 5년간 최소 100만부 판매조건으로 출판 계약을 맺고 수출을 시작했다. 한국소설과 역사서가 미국에서 번역출판된 적은 있어도 우리 토종 과학책이 과학 선진국인 미국에 그대로 수출되기는 처음이었다.

    이뿐이 아니다. 그는 작년 9월 홍콩 문구박람회에 이 책들을 출품한 이후 독일과 호주, 영국 등에서도 수출 상담이 몰려들었다. 또 올 4월에는 산업자원부의 지원을 받아 두바이에서 열리는 과학교구전에 출품해 더 많은 나라에 수출길을 모색할 작정이다.

    #디자이너에서 과학 출판사 사장으로 변신

    사실 그는 과학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대학(홍대 산업디자인학과)을 졸업하고 정치광고를 하고 있었다. 마침 과학기술처 장관 출신의 이상희 의원이 총재로 있던 한국우주정보소년단 홍보를 맡게 되면서 그의 삶이 달라졌다. 1988년이었다. 당시 국내 유일의 과학청소년재단이었던 우주정보소년단의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그러면서 과학이 아이들에게 너무 어렵다는 점을 느꼈다. 이때부터 그는 아이들에게 과학을 재미있게 접근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만들어낸 프로그램이 물로켓, 화약로켓, 별자리 관찰 등이었다.

    그리고 2000년. 그는 결국 돈되는 광고회사를 버리고 과학전문출판사를 세웠다. 국내에 어린이를 위한 제대로 된 과학교재가 없다는 것이 그를 새로운 길로 유혹한 요인이었다. 학교 과학교과서는 점점 실험 위주로 구성되는데 실제 실험을 해볼 만한 과학교구는 전혀 없었다. 1대1 심화학습이 실시되면 과학책과 교구는 더욱 필요하게 될 것이었다.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출판경험도 없고 영업도 모르지만 그는 일단 일을 저지르기로 했다. 주위에서는 백이면 백 실패를 장담했다. 그는 출판사를 세운 뒤 더욱 과학공부에 매진했다. ‘어떻게 하면 쉽게 재미있게 과학을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 제가 과학도였다면 이 일을 못했을 겁니다. 과학을 모르니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설명하면 된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내놓은 책들이 예상외로 소리없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과학책은 보통 1만권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다. 그런데 ‘스페이스 돔’(2001년 3월)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2001년 4월) ‘우리별 위성과 아리안 로켓’(2001년 7월) ‘태양계 모빌’(2002년 1월) 등 그가 만든 책은 보통 1만5000권에서 3만5000권이나 팔려나갔다.

    하지만 이 책들의 출판 과정은 그야말로 험난 그 자체였다. 책을 뜯어붙여 만드는 조립식 모형이니 그만큼 인쇄가 힘들었다. 책을 찍어주겠다는 인쇄소가 없었다. 간신히 인쇄소를 설득하면 이번에는 제본이 문제였다. 제본도 기계로 할 수 없었다. 모두 수작업으로 해야 하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다른 책에 비해 4배 이상 들어갔다.

    거기다 모든 책과 교구재는 원형 그대로 축소해야 했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거나 철저한 감수와 고증을 받아야만 했다. ‘우리별 위성과 아리안 로켓’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공위성센터와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다. 일반 책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힘든 작업이었다.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베스트셀러라는 진기록을 세우며 그가 우뚝 선 것이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장래의 꿈을 물으면 60~70%는 과학자라고 대답한다. 서대표는 그 아이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 “어릴 때 코북페이퍼앤사이언스에서 나온 과학책으로 공부했다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며 활짝 웃는다.

    〈황인원 선임기자 hiw@kyunghyang.com 사진|김기남기자 kknphoto@kyunghyang.com〉

    ▲TIP 사주감상

    서민호 대표의 사주는 원래 사업보다는 교육이나 문화기반의 기획을 하는 공무행정 분야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사주명리학에서 인수(印綬)라고 하는 성분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인(印)은 도장인, 즉 논리성에 바탕을 둔 명확한 성향을 의미하며, 오행적으로는 적당하게 일주(日柱)를 도와주는 상생(相生) 성분을 뜻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인수를 학문과 교육을 관장하는 성향이라고 정의하게 된다.

    서대표의 사주는 특히 이러한 인수와 정관(正官)을 중요한 팩트로 사용하고 있다. 정관은 규칙적, 모범적, 행정적인 글자로서, 일의 밸런스를 잘 잡아가는 성분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러한 경우 교육이나 엔지니어링 기반의 일을 하는 것이 적합하며, 직장생활도 상당히 잘하게 된다. 아마 서대표의 경우, 조직생활로 승부를 걸었더라도, 성공을 거두게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상관(傷官)이라 하여, 창의적, 독단적, 모험적 성향의 글자도 보조적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사업 분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라고 사료된다.

    사실 37세까지의 흐름은 오히려 안정적이었거나, 단순한 형태의 직업운이 펼쳐진 것으로 해석된다. 이후 갈등적 양상의 운이 펼쳐지다가 44세경을 기점으로 사업의 운기가 강해졌고, 이후 현재까지의 흐름은 창업을 통한 발전기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51세까지는 사업에 대한 재투자와 정비가 추가적으로 필요한 시기이므로, 내실을 위주로 좀더 다져야 하는 기간이며, 52세 이후가 실익이 많이 따르는 시점이 아닌가 추정된다. 따라서 길게 본다는 신조를 계속해서 유지해 나간다면, 좋은 교육콘텐츠를 많이 양산할 수 있게 되고 그러한 성과가 국가 인재육성에도 도움을 주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역학연구가 노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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