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 명사의 집] "우리 집에 있는 건 책과 먼지뿐"
- 고양 夫婦번역가 김난주·양억관씨
하루키등 日 최고작가 작품 수백편 번역
아내는 집에서, 남편은 오피스텔서 작업
"서로 무슨 작품 번역하는지 잘 몰라요"
- 김연주 기자 carol@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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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번역가인 김난주(49)씨와 양억관(51)씨의 아파트에 들어서니 복도 벽을 가득 채운 책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주방으로 가는 거실 왼편 복도에도 책이 꽂혀있고, 식탁에 앉으면 보이는 작은 방 속에도 책이 빼곡하다. 김씨는 "우리 집에 있는 것은 책과 먼지뿐"이라고 농담 섞어 설명했다. 유독 한쪽 책장의 책들은 갓 나온 듯 말끔하다. 김난주씨가 번역한 책들을 모아둔 곳이다. 당대 최고 일본 소설가들인 에쿠니 가오리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 옆에 김난주씨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
부부는 일본 유학 중 만나 가정을 이루고, 출국 직후 번역을 시작해 지금까지 수백 편의 작품을 냈다. 특히 하루키와 요시모토 바나나 등 인기 작가의 작품을 대부분 번역해온 김씨는, 일본 소설 팬들이 "김씨의 이름을 보고 책을 고른다"고 할 정도로 사랑받는 번역가다.
- ▲ 번역가 김난주씨와 양억관씨 부부가 화정동 자택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양씨는 두 딸에게 하늘을 뜻하는‘하느리’, 땅을 뜻하는‘소스리’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김건수 객원기자 kimkahns@chosun.com
부부는 12년 전부터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집은 김씨의 일터이자 생활 공간이다. 남편 양씨는 7년 전 일산의 오피스텔에 작업실을 마련해 출·퇴근한다. 아이들이 등교하고 남편이 출근한 오전 9시쯤 김씨의 작업은 시작된다. 오후엔 집안일과 저녁 준비를 하기 때문에 일은 대부분 오전에 이뤄진다. 빨래와 설거지, 밥짓기 사이에서 맛깔스러운 번역 작품이 나오는 셈이다. 김씨는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붙박이처럼 집에 붙어 지낸다. 가끔 밤에 동네 친구들과 맥주를 한잔 하든지 장을 보러 가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김씨는 오히려 '여행과 밖으로 나가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성격이다. 작품을 시작하면 시간이 없고, 작품이 끝났다고 해도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마음 편히 여행갈 시간이 없다. 유학 후 부부가 함께 일본 여행을 떠난 것이 한번뿐일 정도. 의외로 쉴 때 즐겨 보는 것은 '미드(미국 드라마)'다. "번역가는 소설과 교감해야 하니까 일본 드라마는 잘 안 봐요. 또 보면 단순히 감상으로 그치지 않고 자꾸 뭔가를 비판하게 돼요. 즐기는 선에서 안 끝나는 거죠."(김난주씨)
부부는 "한국어를 잘 다뤄야 번역을 잘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씨는 "번역가는 소설가보다 더 정확하게 우리말을 구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국어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고 했고, 양씨는 "번역은 번역가가 가진 것(모국어 능력) 안에서만 나온다. 독자가 번역 작품을 읽고 느낌이 안 오면 번역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16년간 소설을 주로 번역하다 보니 김씨도 질릴 때가 있다. "지겹죠. 번역 요청이 들어오면 '이번에도 바나나야?' '또 유미리야?' 한다니까요. 그래도 하나라도 새로운 점을 발견하려고 해요. 얼마 전에 작업한 '내 남자'라는 작품은 홋카이도가 배경인데, 그걸 번역하면서 일본의 자연에 대해 새삼 놀랐어요. 겨울에 오호츠크해의 빙하가 녹아 홋카이도 해안에 들어오고, 다시 봄에 철새처럼 돌아가는 장면이었어요. 거길 꼭 가봐야 하는데…." 김씨는 앞으로는 일본 근대문학이나 예술 관련서를 번역하고 싶다고 했다.
에쿠니 가오리와 쓰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를 한 권씩 번역하기도 했던 부부지만, 서로의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편이다. 김씨는 "남편이 무슨 작품을 하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가끔씩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남편 양씨. 인터넷 검색이나 순간적으로 생각나지 않는 단어가 있을 때 김씨에게 묻는다. "난 번역을 하다가 적당한 단어가 안 떠오르면 '☆' 표시로 비워둬요. 여유롭게 생각하는 거죠. 근데 남편은 성격이 급해서 당장 그걸 알아내려고 해요. 참 다르죠." 부인의 말에 양씨는 가만히 웃고 있었다.
오후 2시쯤 양씨는 "나 출근할게" 하고 집을 나섰고, 김씨는 집에 머물러 배웅했다. 김씨는 에쿠니 가오리의 '장미 비파 레몬' 중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책 속의 주인공인 그녀들은) 부부 싸움을 하고서도 남편이 보내주는 꽃다발에 웃음지을 만큼 너그럽고, 자식의 아픔에는 한 없이 약하며, 자신의 고독에는 눈물을 삼키는, 여자들 모두의 모습,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여자의 모습입니다.'
김난주·양억관씨는…
김난주씨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 석사를 수료하고 일본에서 일본 근대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김씨는 1992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육각수의 꿈'을 시작으로 번역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재즈 에세이', '렉싱턴의 유령', 요시모토 바나나의 'N.P', '키친', '티티새', 에쿠니 가오리의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등을 번역했다. 양억관씨는 경희대 국어국문학 석사 수료 후 일본에서 일본경제사상사 박사 학위 과정을 중퇴하고 출국해 번역을 시작했다. 무라카미 류의 '69', '교코', '엑소더스', 오쿠다 히데오의 '한밤중의 행진', 쓰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