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현의 文化데이트>
“예술가든 종교인이든 집착 버려야 ‘참자유’얻어”

 

佛寶사찰‘통도사’주지 취임 정우 스님

 

김승현기자 hyeon@munhwa.com

 







정우 스님, 사람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털털한 미소가 일품이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문화인, 예술애호가로서다. 현재 한국 연극·뮤지컬계를 이끄는 극단 신시뮤지컬컴퍼니의 후원회장으로 만났다. 그래서 도(道)가 높은 스님보다는 예(藝)가 깊은 스님으로 편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그가 지난 12일 경남 양산 통도사의 주지 진산(晉山·새 주지 취임)식을 가졌다. 통도사가 어떤 절인가. 부처의 사리가 모셔진 불보(佛寶)사찰로 대장경이 있는 법보(法寶) 해인사, 예부터 국사(國師)가 계속 배출된 승보(僧寶) 송광사와 함께 한국의 불·법·승 삼보(佛·法·僧 三寶)사찰의 하나로 꼽힌다. 27일 뒤늦게 축하를 겸해 통도사를 찾았다.

그는 절에 없었다. 통도사 맞은편 언덕 위 사자목 삼층석탑 주변에서 측백나무를 뽑고 소나무를 심는 중이었다.

“색깔이 안맞아요. 또 이놈들이 웃자라면서 소나무가 상해요.”

측백나무도 생명인데 자비가 으뜸 덕목인 불자로서 잘못된 것 아니냐고 하자 그는 “과거 아무 나무나 심은 결과”라며 “자기 자랄 곳에서 자라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개혁파 스님으로 이름 났던 것을 깜빡했다.

언덕에서 통도사로 함께 내려오는 길에 이 사찰의 유래를 물었다. ‘통도’라는 이름도 도를 통하는 ‘通道’가 아니라 ‘通度’인 것도 궁금했다.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돼, 부처님이 입었던 가사와 대장경 400책, 부처님의 정골(頂骨)사리가 봉안된 국지대찰(國之大刹)이며 불지종가(佛之宗家)입니다. 통도사가 영축산(靈鷲山)에 있잖아요. 영축산이 본래 부처님 재세 시에 인도 마갈타국 왕함성의 동쪽에 있는 그리드라(독수리)라는 산을 한자로 옮긴 겁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법한 곳인데 신선과 독수리(鷲)가 많이 살아 영축산이라고 불렸답니다. 우리 사찰의 지형이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靈鷲山形·차산지형 통어인도영축산형)고 해 通度寺라고 일컫습니다. 또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신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爲僧者通而度之·위승자통이도지)’는 점에서, 이와 함께‘모든 진리를 회통해 중생을 제도한다(通萬法 度衆生·통만법 도중생)’는 의미에서 通度寺라고 부릅니다.”

보통 스님의 휴대전화라고 하면 반야심경이라든지 금강경이라든지 독경이 나와야 어울릴 것 같다. 그런데 그의 휴대전화 신호음은 극단 신시의 뮤지컬 ‘댄싱 섀도우’의 주제곡 ‘그림자와 함께 춤을’이다.

“제가 거기에 인연을 맺고 함께 하고 있는데 그 음악으로 해놓으면 누가 전화해서 물을 것 아닙니까. 그때 이 작품이 차범석 선생님의 걸작 ‘산불’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이 쓰고, 작곡가 에릭 울프슨이 노래를 만들고, ‘맘마미아!’로 유명한 영국 연출가 폴 게링턴이 연출했습니다. 6, 7년 공들인 한국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작품입니다 라고 설명하면 공연티켓 한 장이라도 사서 보러 가지 않겠어요.”

준비된 듯 답변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현재 공연중인 이 작품, 별로 성과가 좋지 않아 보인다.

“첫 공연때 보셨지요? 다시 봐 보세요. 많이 달라졌습니다. 6·25전쟁의 비극을 넘어 자연을 보호하고 연약한 여성들을 지켜야 한다는 자연보호, 생명존중의 메시지가 특히 뛰어난 작품입니다.”

원래 영화를 좋아한 그가 연극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0년대다.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배우 이호재, 전무송씨 등을 만나면서부터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연극과 사랑에 빠진 것은 84년 만해 한용운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 ‘님의 침묵’을 만들면서다. 이때 고 김상열을 비롯해 영화와 TV, 무대를 가리지 않는 전천후 스타 김갑수씨 등과 깊게 사귀게 됐다. 정우 스님은 당시 1개월을 넘기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을 4개월 동안 공연하며 매진을 기록, 흥행능력을 과시했다.

“순수예술인 연극이 종교와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래도 재정적으로 좀 나은 종교쪽이 연약한 연극을 지원하는 게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87년 김상열 선생과 김갑수씨, 현재 대표인 박명성씨 등과 함께 극단 신시를 설립하고 제가 재정을 뒷받침하기로 했지요.”

그의 후원이 중요한 역할을 해 극단 신시는 ‘맘마미아!’ ‘아이다’ ‘렌트’ ‘시카고’ 등 대작을 잇달아 무대에 올리는 등 현재 한국 공연계를 이끄는 최대 엔진으로 성장했다.

예술에서 종교, 본론으로 들어갔다. 예술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은 인정하는 데 통도사 주지스님으로 임명될 정도로 도력이 높은 줄은 몰랐다. 그는 “도력은 무슨 도력”이라고 겸양하며 “절은 많이 세웠다”고 했다.

“아마 월하 스님이 미리 내다보신 게 아닌가 해요. 월하 스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정우(頂宇)입니다. 집을 많이 지으라는 말씀이겠지요. 또 당호가 아산(芽山)이에요. 싹(芽)으로 산을 만들라, 즉 불종자(不種子)를 많이 키워라, 그게 제 임무 아니었나 싶어요. (서울) 구룡사를 비롯해 여래사, 원각사, 법계사, 반야사, 서래사 등 제가 세운 절이 20여개쯤은 되는가 보네요.”

몇 만명씩 모이는 그의 회향법회는 유명하다. 사람을 끌어모으는 비결이 있을 것 같다.

“비결이 뭐 있겠어요. 본디 풍각이지요. 굳이 말하라 하면 타락된 언어를 쓰지 않는 걸 겁니다. 타락된 언어는 막말뿐 아니라 미사여구 등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언어들입니다. 한 예로 ‘정말’이라는 말입니다. 남편이나 애인이 성의를 베풀면 ‘정말’이냐고 묻지요. 북한 사람들이 특히 ‘정말’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사회면 그 말을 그렇게 많이 쓰겠습니까. 요즘 TV 등 대중 앞에 서는 사회자, 출연자들이 ‘정말’을 ‘정말’ 많이 써요. 최근에는 종교인들도 ‘정말’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진실은 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불자들을 모으는 ‘조직’의 힘이 불지종가라는 통도사의 주지에 만장일치로 추대된 배경은 아닐까.

“저는 모으는 쪽보다는 흩뜨리는 쪽입니다. 제가 세운 절에는 조직이 없습니다. 무조직이 조직입니다. 저는 ‘신도’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신도라는 말은 ‘믿는 무리’, ‘우리 절의 신도’라는 (파벌) 개념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찻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라주며) 찻주전자를 든 것은 차를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차를 다 따랐으면 당연히 주전자를 내려놔야지요. 그런데 계속 들고 있는 거예요. 그건 주전자에 붙잡혀 있는 겁니다. 가정도 세상도 그렇습니다. 붙들리면 안돼요. 놔야 합니다. 그래야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많은 절을 세우고 떠났나 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오늘 없는 어제와 내일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을 잘 살면 어제 잘 산 것이 되고, 내일도 잘 살 겁니다. 오늘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붙들리면 안돼요. 통도사가 그런 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쁜 마음으로 와서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그런 절이오.”

사실 그렇다. 요즘 많은 종교가 그렇다. 가지 않으면 불안하고, 갔다 오면 허전한 경우가 많다. 그런 불안과 허무가 원리주의, 근본주의, 극단주의 같은 ‘탈레반’들을 만들어내는 바탕은 아닐까.

“네팔에 갔더니 1만의 부처가 새겨져 있다는 만불탑(萬佛塔)이 있었어요. 그런데 실제 새겨진 부처의 수는 9999불이라고 합니다. 나머지 한 명은 이를 바라보는 사람 자신이라는 거지요. 또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득도해 설법하는 녹야원 그림도 있더군요. 양쪽으로 사슴이 있고 가운데 법륜을 세워 놓은 1자가 있고 그 주위에 6명이 나란히 앉아 있는 거예요. 부처님의 최초 설법 대상은 5명 아닙니까. 그런데 부처님은 가르치면서 배우시는 거예요. 이 만불탑, 녹야원 그림, 놀라운 구성 아닙니까.”

그의 네팔여행 경험 선문답(禪問答)은 최근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 등으로 첨예한 갈등을 벌이고 있는 이슬람·기독교 등 종교간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상당히 흐트러진 우리 사회 전반에 가장 필요한 기본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말을 못해 벙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듣지 못해 그런 것이지요.”

정우 스님의 조용하면서도 낮은 이 한마디는 남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을 주장하는 종교와 사상, 철학,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세상 모든 것에 경고하는 사자후의 큰 울림으로 들렸다.

■정우스님은…

-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 1965년 출가
- 1968년 통도사에서 홍법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수지
- 1971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 1974년 해인사 승가대학 대교과 졸업
- 1978년 월정사에서 화엄학 수학
- 1987년~ 극단 신시뮤지컬컴퍼니 후원회장
- 1988년~ 도서출판 일주문 대표, 월간 붓다 발행인
- 1994~1998년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 2007년 통도사 주지
- 저서 ‘길을 묻는다 불에 달군 돌을 물고’(1, 2권·1994년), ‘내 어릴 적 꿈은 운전수였네’(1, 2권·2000년), ‘부처님 품안 따뜻한 가정’(2004년)

문화부장 hyeon@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7-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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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가 만난사람]장편소설 '바리데기' 작가 황석영
'풍운의 작가' 탈북소녀와 함께 돌아오다
 



지난 6월 황석영 장편소설 ‘바리데기’ 교열작업이 한창이던 경기도 파주 출판도시 ‘창비’ 편집실. 열린 창문으로 새가 한 마리 들어와 퍼덕이며 날아다녔다. 그 새는 ‘바리데기’ 편집 공간을 배회하다가 창 너머로 사라졌다. 덩치가 제법 큰 것이 비둘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끼도 아니어서 편집자들은 잠시 쑥덕거리다가 그 새가 ‘매’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파주 지척이 임진강이요 그 너머가 황해도이니 그 매는 장산곶에서 날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눈 밝은 편집자들은 황석영과 매의 기묘한 인연에 놀랐다. 1980년대에 장안의 지가를 올린 황석영 대하소설 ‘장길산’은 장산곶매 이야기로 시작된다. 장산곶매는 어촌에서 말리는 고기들을 잡새로부터 보호하면서 사랑 받는 존재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매의 발에 묶어놓은 사랑의 매듭으로 인해 나뭇가지에 발이 엉켜 폭풍우 치던 밤 죽었다.

◇장편소설 ‘바리데기’ 표지에 수록된 일러스트 작가 신선미씨의 ‘바리’ 초상화. 순결한 눈매에 간난을 겪은 슬픔이 배어있다.

편집실에 날아든 매 이야기는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바리데기’ 출간 때문에 파리에서 일시 귀국한 황석영이 들려주었다. 편집자가 이메일로 파리의 작가에게 알려주었다고 했다. ‘바리데기’는 구박덩이로 버려진 딸이 서천을 다녀오면서 천신만고 끝에 얻은 생명수로 부친을 살려낸다는 설화 속 인물이다. 무당들의 사설에도 자주 등장하고, 페미니스트들이 애호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황석영은 그 바리데기를 한반도의 분단현실에 대입시켰다. 기근에 시달리는 북녘 땅에서 나와 중국을 거쳐 컨테이너선 밑창에 실려 영국까지 건너간 여인의 이름이 소설 속 주인공 ‘바리’다. 소설 속에서 그 바리는 무당처럼 타인의 과거를 알아내는 신통력을 지녔다. 한반도의 운명과 세계화시대 거친 노동과 이주의 아픔을 상징하는 소설 속 그녀가 신통력이라도 발휘해 황석영의 장산곶매를 교정지 위로 불러들인 것일까.
“이번 소설의 무대인 청진이나 무산 쪽은 북에 있을 때 둘러본 곳이고, 중국 국경 쪽은 소설을 쓰기 위해 꼼꼼하게 답사했습니다. 내가 태어난 곳이 만주 장춘인데, 가봤더니 공원이 돼버렸어요. 그 취재 여행 때 여권을 분실해서 연변에서 귀국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는데, 심양까지 가서 다시 발급을 받으라고 해요. 그래서 심양 가는 야간열차를 탔는데 이게 한마디로 옛날 목포행 완행열차인 거요. 일자리를 찾아가는 노동자들이 양쪽 선반에 새카맣게 앉아 있을 정도여서, 화장실 앞에 쪼그리고 앉아 15시간을 달리는데, 가다 기차가 만주 벌판에 한정 없이 서 있는 겁니다. 땀냄새에다 온갖 고약한 냄새가 나는 공간에서 며칠 잡혀 있었죠. 나중에 그 이야기를 했더니 일본 이와나미 출판사 편집장이 ‘소설의 신’이 그렇게 맛을 보인 거라고 하더군요.”
소설 속의 바리가 북에서 나와 중국을 방황하던 장면의 디테일이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더 잘 살아날 수 있었다. 이 또한 ‘소설의 신’ 덕분이라니 황석영이라는 작가의 소설은 우연과 운명이 가져다준 선물일까. 베트남, 광주, 북한,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극적인 사건의 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그것은 결코 주술적이거나 소설의 신이 안내한 우연은 아니었다. 그는 늘 ‘저질렀고’, 그 배경의 본질적인 동인은 문학이었다.
“이념적 고리에서 놓여나지 않으면 큰 작가가 못 된다, 시대의 멍에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요한 기회다, 이런 생각으로 북에 간 것인데 다시 돌아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릴지는 몰랐습니다. 김일성 주석과 김영삼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진작에 이루어졌으면 내 상황판단이 맞았을 텐데, 김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그리 됐어요. 저지를 때마다 가장 중심에 놓여 있던 것은 사실 ‘작가’였습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서 아직도 기도하는 버릇이 꽤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탑을 사수할 때 공포의 사흘 밤을 보냈는데 그때도 기도했지요. 살아만 남는다면 좋은 작품 쓰겠다고. 하늘에게 기도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 요즘도 합니다.”


황석영이 탁월한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사실에는 대개 토를 다는 사람이 없다. 그가 걸어온 행로를 보면서 과연 그러한 행동들이 소설을 중심에 놓은 것인지 아니면 소영웅주의의 발로인지 의심하는 사람은 있지만, 리얼리스트에게 현장과 문학이 따로 분리될 수는 없는 일이다. 올 초 파리에서 잠시 들어온 그가 대선을 앞두고 범여권의 단일전선을 호소하는 정치적 발언들을 쏟아내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귀국해서는 정치적인 현안에 대해 일절 함구했다. 더 이상 개입하면 군소리가 되고 효과도 없을뿐더러 지금 떠들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다.
“소설? 그건 내 인생이고 살아 있는 이유지요. 과거에 이런 이야기를 드러내놓고 했다면 문학주의라고 비판했을 겁니다. 소설 아니면 쓸모없습니다. 내 삶의 목적입니다. 존재 자체가 그런 걸 어쩔 수 없습니다. 외국에 나가 있을 때 특히 그런 걸 많이 느낍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커뮤니케이션도 쉽지 않고, 그들은 늘 타자여서 소설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지난 4년은 참 좋았습니다. 센강변 집필실에서 바리데기를 쓸 때 평생 느껴보지 못한 창작자의 평화를 느꼈어요. 그래서 올가을에 짐을 싸서 귀국하면 벽지에 가서 집 짓고 눌러앉을 계획입니다. 파리와 한국의 벽촌이 다를 게 없습니다. 귀국해서도 파리에 살 때처럼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일을 줄일 작정입니다.”
그는 아무리 낯선 도시에 가도 며칠만 지나면 그 도시의 흐름이 보인다고 했다. 무엇을 특별히 잘 보는 능력이 있어서라기보다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예민하게 발달돼 있다는 얘기다. 만주에서 살다가 삼팔선을 넘어와 전쟁을 겪었고 도시 변두리에서 살면서 청년기를 거쳐왔는데, 그 과정에서 ‘서바이벌’ 능력을 본능적으로 체득했다고 했다. 독일의 한 신문이 그를 인터뷰한 글에서 ‘서바이벌 마이스터’라고 썼다는 얘기를 전했다. 낯선 곳에서도 금방 뿌리를 내리는 생존(력)의 거장. 그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10분만 고민하다가” 낙천적으로 변한다고 했다. 감옥에 가서도. 어차피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나에게 소중한 기회로 활용하자, 이렇게 하루이틀 고민하다 정리한 뒤로는 교도소 사람들과 어울려 잘 지냈다.
낙천적이고 강인한 것처럼 보이는 황석영에게 의외로 서정의 뿌리가 깊다. 서정과 리얼리즘이 분리되는 건 아니지만 황석영은 작품 속에서 서정과 핍진한 현실을 능란하게 조율해낸다. ‘오래된 정원’은 그가 처음으로 쓴 ‘연애소설’이라고 할 정도로 곳곳에 느꺼운 회한과 서정의 정한이 스며들었다. 남자는 감옥 안에서 청춘을 보냈고, 그를 사랑한 여자는 바깥에서 그리워하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 여자가 세상과 하직하면서 일기에 적어놓은 글.

◇‘장산곶매’(최병수, 목판화)

-오래전에 불경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정이 맺혔던 부분들이 제일 먼저 썩어 없어진대요. 당신은 그 안에서 나는 이쪽 바깥에서 한세상을 보냈어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우리 이 모든 나날들과 화해해요. 잘 가요, 여보.
파리의 주부들이 이 소설 불어판을 읽고 그를 초청한 적이 있는데 그들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실제 모델이 있느냐고 물었다. 황석영은 짐짓 ‘아우라’를 주기 위해 “소설 속 여자는 내 사별한 전처”라고 했단다. 그 말을 들은 파리의 아줌마들, 그 자리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는데 그 말이 ‘구라’임을 아는 통역자가 다가와 “선생님, 참 간교하십니다”라고 했다던가. 내친 김에 그에게 ‘사랑’을 물었다.
“역사와 사랑은 늘 시제(時制)가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 하는 짓이 대개 비슷한데, 지나놓고 보면 완성에 가깝지만 이미 지나간 것과 깨져버린 것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인생이라는 게 전인미답의 길을 가는 것이어서 가까운 거리만 보이게 마련입니다. 후회하지만 돌이킬 수 없어요.”
황석영과 약속된 시간이 다 끝나갈 무렵, 인터넷 서점의 젊은 여성 일꾼들이 다시 인터뷰를 잇기 위해 카페로 들어섰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여성 편집자들이었는데, 젊은 세대인 그들의 ‘바리데기’ 독후감은 진지하고 신선했다. 세대를 통하는 작가의 능력이 입증되는 자리였다. 이날 황석영은 다시 출판사에서 마련한 후배 작가들과의 저녁 자리로 옮겨갔고, 덕담과 농담과 술잔이 오가던 자리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문인들까지 합세해 일산의 카페 하나를 점령하는 큰 술판으로 이어졌다. 지치지 않고 시종 좌중의 중심을 지키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가는 그를 두고 카페를 떠났다. 그는 낮에 후배 작가들 작품을 거론하면서 말했다.
-나는 따뜻한 게 좋다. 시니컬한 건 조금 하수인 것 같다. 그건 지적 태도가 아니다.
글 조용호 문화팀장, 사진 송원영 기자
jhoy@segye.com

황석영은 누구인가?

소설가 황석영(64)은 현재진행형의 작가다. 한국 작가들 중에는 젊은 시절에 등단해 중견 무렵이면 대표작으로 거론될 만한 문제작을 펴내 존재를 과시한 뒤, 시나브로 작가라는 이름에만 안주해버리는 이들이 많다. 이런 흐름에서 황석영은 단연 차별화되는 존재다.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일찍이 고교 시절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월남전 체험을 담은 단편 ‘탑’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래 ‘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등을 집필하며 한국의 문제적인 작가로 이름을 날린 것까지는 여타 유명 작가들의 행로와 유사하다. 작품의 내용은 차치하고, 젊은 시절에 등단해 중견에 이를 때까지의 작품 생산 일정만 따진다면 그렇다.
그러나 그가 중년 이후 자신을 던지는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1989년, 마흔일곱에 방북을 감행했다. 북한에 들어가 그쪽 문인들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너나들이를 하며 어울렸고 작고한 김일성 주석과 독대하며 그로부터 ‘민족의 재간둥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실정법이 엄연한 분단사회 남한에 다시 들어오기 위해서 그가 우회해야 했던 세월은 길었다. 독일과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93년 귀국해 감옥에서 5년을 살고 난 뒤에서야 북에 들어간 지 10여년 만에 다시 남한 땅의 작가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98년에 출옥했으니 쉰여섯에 다시 평화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이때부터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재개했다.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펴낸 ‘오래된 정원’(2000년)은 삶의 회한과 지나온 80년대에 대한 소회와 더불어 애틋한 연애 감정까지 배어든 장편이었다. 이어 다시 주목할 만한 장편 ‘손님’(2001년)과 ‘심청’(2003년)을 펴내며 그가 감옥에서 공언했던 이른바 ‘동아시아 3부작’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최근에 펴낸 장편 ‘바리데기’에 이른 것이다. ‘바리데기’는 그의 북한 체험을 질료로 김일성 주석 사후 대기근에 직면한 북한사회의 사정을 세밀하게 드러내면서 탈북소녀 ‘바리’가 영국에 정착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해방 전 만주에서 태어나 청년기에는 월남에 가 있었고, 70년대에는 노동현장에서, 그리고 80년대에는 광주와 북한에 머물렀고, 다시 구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노년에 이르러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는 풍운의 작가인 셈이다. 지금도 그가 한국에 붙박여 있는 것은 아니다. 런던으로 떠났다가 파리에서 산다. 올 10월이면 유럽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한국의 한적한 시골에 칩거할 예정이다. 그는 지난 22일 네티즌들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하고 싶은 국내 작가 1위로 뽑혔다.
조용호 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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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친구란? 뭘까? - 하나 친구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동화 1
샐리 그린들리 글, 페니 댄 그림 / 풀과바람(영교출판)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여우랑 곰순이는 친한 친구

여우가 없으면 곰순이는 심심 하고

곰순이가 없으면 여우가 심심하고

둘은 사이좋은 친구 낚시할때 여우가 빠져 곰순이가 도와주고 숲속에서 곰순이가 길을 있어버렸으떄 여우가 도와주고

친구가 없으면........................

심심할꺼야

느낌 : 친구가 이렇게 많아서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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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열며] 출판가 ‘쩐(錢)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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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10년 전 일이다. 국내 최대 단행본 출판사였던 고려원이 부도를 냈다. 1978년 설립 후 철학·문학·과학 등 2500여 종을 발간했던 출판계의 ‘큰형’이 쓰러졌다. 고려원의 ‘밀어내기’ 영업이 경영난을 부채질한 것으로 분석됐다. 하루 한 권꼴로 새 책을 내고, 신간 판매 대금을 구간 판매액으로 보충하는 방식이었다.

 1년 뒤 출판계에는 더 큰 회오리가 불어닥쳤다. 최대 서적 도매상이었던 보문당이 무너지며 중소 도매상·출판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지식산업의 고사마저 우려됐다. 정부에선 긴급 자금을 투입하며 출판유통 개선에 나섰다.

 10년이 지난 지금 출판계는 얼마나 건강해졌을까. 가장 눈길을 끄는 현상은 인터넷 서점의 약진이다. 정보기술(IT) 강국 한국의 이미지가 서점가에도 재연됐다. 특히 작은 출판사들이 덕을 봤다. 수개월짜리 어음을 지급하는 오프라인 서점과 달리 온라인 서점은 판매대금을 제때제때 출판사에 입금했다. 텍스트(책)만 좋으면 언제라도 독자와 만날 수 있는 길이 뚫린 셈이다.

 인터넷 서점의 등장으로 ‘1인 출판’도 활성화했다. 아이디어·기획만 훌륭하면 큰 부담 없이 책을 만들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졌다. 2년 전 대형 출판사를 나와 1인 회사를 차린 A씨도 그중 한 명. 창업 당시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때마침 내놓은 신간의 반응이 좋았고, 판매대금도 바로바로 회수됐다. 전처럼 지방 서점을 순례하며 ‘잔돈’을 모을 필요가 없었다.

 최근 A씨를 다시 만났다. 예전의 화사한 표정이 사라졌다. ‘제2의 삶’을 가져다준 인터넷 서점이 오히려 큰 장벽처럼 느껴진다고 털어놓았다. 이유는 단 하나. 인터넷 서점의 각종 이벤트에 참여할 수 없는 작은 출판사들은 신간을 내도 제대로 알리기가 어려워졌다는 푸념이었다.

 바로 인터넷 서점에 접속했다. 예스24·인터파크·알라딘 같은 대표적 사이트엔 이벤트 광고가 넘쳐났다. 10% 할인 기본에 쿠폰·마일리지 지급이 줄을 이었다. 이제 ‘1+1’(책 한 권을 사면 다른 책 한 권을 덤으로 제공) 정도는 눈길을 끌지 못했다. ‘1+3’도 심심찮게 보였다. 손수건·비치볼부터 해외여행까지 군침 도는 ‘미끼’도 띄었다.

 A씨의 불평. “1년 전만 해도 서점 관계자를 만나면 ‘내용이 좋네요’란 말이 먼저 나왔어요. 요즘은 ‘이벤트는 뭘 할 거죠. 선물은 있나요’부터 챙겨요. 텍스트로 승부를 거는 게 요원해졌죠.”

 독자 입장에서 ‘할인에 할인’은 반갑다. 같은 제품을 싼값에 사니 득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넓게 보면 꼭 그렇지만 않다. 대다수 출판사가 할인폭만큼 책값을 높게 책정하기 때문이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이다. 이벤트에 맞는 책, 베스트셀러용 책에 집중하다 보니 소위 양서가 설 자리가 좁아진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이 6일 한국출판학회가 주최하는 ‘제1차 출판정책 토론회’에 발표할 글을 미리 읽어 보았다. A씨의 푸념이 엄살이 아니었다. 출판계에 요즘처럼 원칙이 무너지고 편법이 난무한 적이 없다는 요지였다. 한 소장은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머니게임을 걱정했다. 신간을 띄우기 위한 사재기, 출판사의 양극화, 인터넷 서점의 할인 마케팅 등등. 하루 평균 200권(교보문고 입고 기준)씩 나오는 신간 가운데 대형 서점 신간 코너를 지키는 책은 극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다.

 한 소장은 급선무로 신간 종수의 과감한 축소를 꼽았다. 대형 출판사들의 밀어내기 식 발간이 할인 경쟁을 불러왔다는 판단에서다. 과연 출판계가 그의 말을 경청할지…. 10년 전의 고려원 부도가 생각난다. 욱일승천할 것 같았던 한국영화가 최근 쪼그라든 것도 지난해 과다 제작·마케팅 때문이 아닌가.


박정호 문화스포츠 차장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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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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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고난의 행군' 시절) 언젠가 미이 언니와 두만강에 나갔다가 사람이 천천히 떠내려오는 걸 보았다. 어린애를 업은 채 앞으로 처박힌 아낙네의 시체였다. 그러니까 아기와 엄마가 함께 죽은 것이다. 언니와 나는 보통때 같았으면 깜짝 놀라서 외마디소리도 지르고 누군가를 부르러 달려가기라도 했으련만 숨을 멈추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체 뒤로 풀린 채 길게 따라서 흘러내려가는 포대기끈이 흐느적거렸다. 나중에 그 강변에는 더 많은 시체들이 떠내려오곤 했는데 맞은편 중국인 마을에서는 자기네 기슭에 닿으면 장대로 밀어내곤 했고 이쪽에서도 군인들이나 장정들이 지켜섰다가 강심으로 밀어내곤 했다. 어느날인가 저녁때 사택 동네의 사람들이 수런거리는 기색이더니 군인들이 리어카를 끌고 중심가를 내려오는 게 보였다. 우리도 처음에는 양곡포대를 덮어놓아서 무엇인지 모르다가 그 아래로 삐죽이 나와 있는 사람들의 발을 여러 개 보고는 시체인 줄 알았다. 밤사이에 동네에서 사람이 죽으면 이웃들이 신고해서 치워갔는데 그해 여름을 지나고부터는 그냥 방치해두어서 빈집 앞을 지날 때면 간장을 조리는 듯한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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