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열며] 출판가 ‘쩐(錢)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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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10년 전 일이다. 국내 최대 단행본 출판사였던 고려원이 부도를 냈다. 1978년 설립 후 철학·문학·과학 등 2500여 종을 발간했던 출판계의 ‘큰형’이 쓰러졌다. 고려원의 ‘밀어내기’ 영업이 경영난을 부채질한 것으로 분석됐다. 하루 한 권꼴로 새 책을 내고, 신간 판매 대금을 구간 판매액으로 보충하는 방식이었다.

 1년 뒤 출판계에는 더 큰 회오리가 불어닥쳤다. 최대 서적 도매상이었던 보문당이 무너지며 중소 도매상·출판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지식산업의 고사마저 우려됐다. 정부에선 긴급 자금을 투입하며 출판유통 개선에 나섰다.

 10년이 지난 지금 출판계는 얼마나 건강해졌을까. 가장 눈길을 끄는 현상은 인터넷 서점의 약진이다. 정보기술(IT) 강국 한국의 이미지가 서점가에도 재연됐다. 특히 작은 출판사들이 덕을 봤다. 수개월짜리 어음을 지급하는 오프라인 서점과 달리 온라인 서점은 판매대금을 제때제때 출판사에 입금했다. 텍스트(책)만 좋으면 언제라도 독자와 만날 수 있는 길이 뚫린 셈이다.

 인터넷 서점의 등장으로 ‘1인 출판’도 활성화했다. 아이디어·기획만 훌륭하면 큰 부담 없이 책을 만들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졌다. 2년 전 대형 출판사를 나와 1인 회사를 차린 A씨도 그중 한 명. 창업 당시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때마침 내놓은 신간의 반응이 좋았고, 판매대금도 바로바로 회수됐다. 전처럼 지방 서점을 순례하며 ‘잔돈’을 모을 필요가 없었다.

 최근 A씨를 다시 만났다. 예전의 화사한 표정이 사라졌다. ‘제2의 삶’을 가져다준 인터넷 서점이 오히려 큰 장벽처럼 느껴진다고 털어놓았다. 이유는 단 하나. 인터넷 서점의 각종 이벤트에 참여할 수 없는 작은 출판사들은 신간을 내도 제대로 알리기가 어려워졌다는 푸념이었다.

 바로 인터넷 서점에 접속했다. 예스24·인터파크·알라딘 같은 대표적 사이트엔 이벤트 광고가 넘쳐났다. 10% 할인 기본에 쿠폰·마일리지 지급이 줄을 이었다. 이제 ‘1+1’(책 한 권을 사면 다른 책 한 권을 덤으로 제공) 정도는 눈길을 끌지 못했다. ‘1+3’도 심심찮게 보였다. 손수건·비치볼부터 해외여행까지 군침 도는 ‘미끼’도 띄었다.

 A씨의 불평. “1년 전만 해도 서점 관계자를 만나면 ‘내용이 좋네요’란 말이 먼저 나왔어요. 요즘은 ‘이벤트는 뭘 할 거죠. 선물은 있나요’부터 챙겨요. 텍스트로 승부를 거는 게 요원해졌죠.”

 독자 입장에서 ‘할인에 할인’은 반갑다. 같은 제품을 싼값에 사니 득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넓게 보면 꼭 그렇지만 않다. 대다수 출판사가 할인폭만큼 책값을 높게 책정하기 때문이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이다. 이벤트에 맞는 책, 베스트셀러용 책에 집중하다 보니 소위 양서가 설 자리가 좁아진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이 6일 한국출판학회가 주최하는 ‘제1차 출판정책 토론회’에 발표할 글을 미리 읽어 보았다. A씨의 푸념이 엄살이 아니었다. 출판계에 요즘처럼 원칙이 무너지고 편법이 난무한 적이 없다는 요지였다. 한 소장은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머니게임을 걱정했다. 신간을 띄우기 위한 사재기, 출판사의 양극화, 인터넷 서점의 할인 마케팅 등등. 하루 평균 200권(교보문고 입고 기준)씩 나오는 신간 가운데 대형 서점 신간 코너를 지키는 책은 극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다.

 한 소장은 급선무로 신간 종수의 과감한 축소를 꼽았다. 대형 출판사들의 밀어내기 식 발간이 할인 경쟁을 불러왔다는 판단에서다. 과연 출판계가 그의 말을 경청할지…. 10년 전의 고려원 부도가 생각난다. 욱일승천할 것 같았던 한국영화가 최근 쪼그라든 것도 지난해 과다 제작·마케팅 때문이 아닌가.


박정호 문화스포츠 차장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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