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가 만난사람]장편소설 '바리데기' 작가 황석영
'풍운의 작가' 탈북소녀와 함께 돌아오다
 



지난 6월 황석영 장편소설 ‘바리데기’ 교열작업이 한창이던 경기도 파주 출판도시 ‘창비’ 편집실. 열린 창문으로 새가 한 마리 들어와 퍼덕이며 날아다녔다. 그 새는 ‘바리데기’ 편집 공간을 배회하다가 창 너머로 사라졌다. 덩치가 제법 큰 것이 비둘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끼도 아니어서 편집자들은 잠시 쑥덕거리다가 그 새가 ‘매’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파주 지척이 임진강이요 그 너머가 황해도이니 그 매는 장산곶에서 날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눈 밝은 편집자들은 황석영과 매의 기묘한 인연에 놀랐다. 1980년대에 장안의 지가를 올린 황석영 대하소설 ‘장길산’은 장산곶매 이야기로 시작된다. 장산곶매는 어촌에서 말리는 고기들을 잡새로부터 보호하면서 사랑 받는 존재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매의 발에 묶어놓은 사랑의 매듭으로 인해 나뭇가지에 발이 엉켜 폭풍우 치던 밤 죽었다.

◇장편소설 ‘바리데기’ 표지에 수록된 일러스트 작가 신선미씨의 ‘바리’ 초상화. 순결한 눈매에 간난을 겪은 슬픔이 배어있다.

편집실에 날아든 매 이야기는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바리데기’ 출간 때문에 파리에서 일시 귀국한 황석영이 들려주었다. 편집자가 이메일로 파리의 작가에게 알려주었다고 했다. ‘바리데기’는 구박덩이로 버려진 딸이 서천을 다녀오면서 천신만고 끝에 얻은 생명수로 부친을 살려낸다는 설화 속 인물이다. 무당들의 사설에도 자주 등장하고, 페미니스트들이 애호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황석영은 그 바리데기를 한반도의 분단현실에 대입시켰다. 기근에 시달리는 북녘 땅에서 나와 중국을 거쳐 컨테이너선 밑창에 실려 영국까지 건너간 여인의 이름이 소설 속 주인공 ‘바리’다. 소설 속에서 그 바리는 무당처럼 타인의 과거를 알아내는 신통력을 지녔다. 한반도의 운명과 세계화시대 거친 노동과 이주의 아픔을 상징하는 소설 속 그녀가 신통력이라도 발휘해 황석영의 장산곶매를 교정지 위로 불러들인 것일까.
“이번 소설의 무대인 청진이나 무산 쪽은 북에 있을 때 둘러본 곳이고, 중국 국경 쪽은 소설을 쓰기 위해 꼼꼼하게 답사했습니다. 내가 태어난 곳이 만주 장춘인데, 가봤더니 공원이 돼버렸어요. 그 취재 여행 때 여권을 분실해서 연변에서 귀국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는데, 심양까지 가서 다시 발급을 받으라고 해요. 그래서 심양 가는 야간열차를 탔는데 이게 한마디로 옛날 목포행 완행열차인 거요. 일자리를 찾아가는 노동자들이 양쪽 선반에 새카맣게 앉아 있을 정도여서, 화장실 앞에 쪼그리고 앉아 15시간을 달리는데, 가다 기차가 만주 벌판에 한정 없이 서 있는 겁니다. 땀냄새에다 온갖 고약한 냄새가 나는 공간에서 며칠 잡혀 있었죠. 나중에 그 이야기를 했더니 일본 이와나미 출판사 편집장이 ‘소설의 신’이 그렇게 맛을 보인 거라고 하더군요.”
소설 속의 바리가 북에서 나와 중국을 방황하던 장면의 디테일이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더 잘 살아날 수 있었다. 이 또한 ‘소설의 신’ 덕분이라니 황석영이라는 작가의 소설은 우연과 운명이 가져다준 선물일까. 베트남, 광주, 북한,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극적인 사건의 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그것은 결코 주술적이거나 소설의 신이 안내한 우연은 아니었다. 그는 늘 ‘저질렀고’, 그 배경의 본질적인 동인은 문학이었다.
“이념적 고리에서 놓여나지 않으면 큰 작가가 못 된다, 시대의 멍에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요한 기회다, 이런 생각으로 북에 간 것인데 다시 돌아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릴지는 몰랐습니다. 김일성 주석과 김영삼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진작에 이루어졌으면 내 상황판단이 맞았을 텐데, 김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그리 됐어요. 저지를 때마다 가장 중심에 놓여 있던 것은 사실 ‘작가’였습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서 아직도 기도하는 버릇이 꽤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탑을 사수할 때 공포의 사흘 밤을 보냈는데 그때도 기도했지요. 살아만 남는다면 좋은 작품 쓰겠다고. 하늘에게 기도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 요즘도 합니다.”


황석영이 탁월한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사실에는 대개 토를 다는 사람이 없다. 그가 걸어온 행로를 보면서 과연 그러한 행동들이 소설을 중심에 놓은 것인지 아니면 소영웅주의의 발로인지 의심하는 사람은 있지만, 리얼리스트에게 현장과 문학이 따로 분리될 수는 없는 일이다. 올 초 파리에서 잠시 들어온 그가 대선을 앞두고 범여권의 단일전선을 호소하는 정치적 발언들을 쏟아내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귀국해서는 정치적인 현안에 대해 일절 함구했다. 더 이상 개입하면 군소리가 되고 효과도 없을뿐더러 지금 떠들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다.
“소설? 그건 내 인생이고 살아 있는 이유지요. 과거에 이런 이야기를 드러내놓고 했다면 문학주의라고 비판했을 겁니다. 소설 아니면 쓸모없습니다. 내 삶의 목적입니다. 존재 자체가 그런 걸 어쩔 수 없습니다. 외국에 나가 있을 때 특히 그런 걸 많이 느낍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커뮤니케이션도 쉽지 않고, 그들은 늘 타자여서 소설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지난 4년은 참 좋았습니다. 센강변 집필실에서 바리데기를 쓸 때 평생 느껴보지 못한 창작자의 평화를 느꼈어요. 그래서 올가을에 짐을 싸서 귀국하면 벽지에 가서 집 짓고 눌러앉을 계획입니다. 파리와 한국의 벽촌이 다를 게 없습니다. 귀국해서도 파리에 살 때처럼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일을 줄일 작정입니다.”
그는 아무리 낯선 도시에 가도 며칠만 지나면 그 도시의 흐름이 보인다고 했다. 무엇을 특별히 잘 보는 능력이 있어서라기보다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예민하게 발달돼 있다는 얘기다. 만주에서 살다가 삼팔선을 넘어와 전쟁을 겪었고 도시 변두리에서 살면서 청년기를 거쳐왔는데, 그 과정에서 ‘서바이벌’ 능력을 본능적으로 체득했다고 했다. 독일의 한 신문이 그를 인터뷰한 글에서 ‘서바이벌 마이스터’라고 썼다는 얘기를 전했다. 낯선 곳에서도 금방 뿌리를 내리는 생존(력)의 거장. 그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10분만 고민하다가” 낙천적으로 변한다고 했다. 감옥에 가서도. 어차피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나에게 소중한 기회로 활용하자, 이렇게 하루이틀 고민하다 정리한 뒤로는 교도소 사람들과 어울려 잘 지냈다.
낙천적이고 강인한 것처럼 보이는 황석영에게 의외로 서정의 뿌리가 깊다. 서정과 리얼리즘이 분리되는 건 아니지만 황석영은 작품 속에서 서정과 핍진한 현실을 능란하게 조율해낸다. ‘오래된 정원’은 그가 처음으로 쓴 ‘연애소설’이라고 할 정도로 곳곳에 느꺼운 회한과 서정의 정한이 스며들었다. 남자는 감옥 안에서 청춘을 보냈고, 그를 사랑한 여자는 바깥에서 그리워하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 여자가 세상과 하직하면서 일기에 적어놓은 글.

◇‘장산곶매’(최병수, 목판화)

-오래전에 불경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정이 맺혔던 부분들이 제일 먼저 썩어 없어진대요. 당신은 그 안에서 나는 이쪽 바깥에서 한세상을 보냈어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우리 이 모든 나날들과 화해해요. 잘 가요, 여보.
파리의 주부들이 이 소설 불어판을 읽고 그를 초청한 적이 있는데 그들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실제 모델이 있느냐고 물었다. 황석영은 짐짓 ‘아우라’를 주기 위해 “소설 속 여자는 내 사별한 전처”라고 했단다. 그 말을 들은 파리의 아줌마들, 그 자리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는데 그 말이 ‘구라’임을 아는 통역자가 다가와 “선생님, 참 간교하십니다”라고 했다던가. 내친 김에 그에게 ‘사랑’을 물었다.
“역사와 사랑은 늘 시제(時制)가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 하는 짓이 대개 비슷한데, 지나놓고 보면 완성에 가깝지만 이미 지나간 것과 깨져버린 것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인생이라는 게 전인미답의 길을 가는 것이어서 가까운 거리만 보이게 마련입니다. 후회하지만 돌이킬 수 없어요.”
황석영과 약속된 시간이 다 끝나갈 무렵, 인터넷 서점의 젊은 여성 일꾼들이 다시 인터뷰를 잇기 위해 카페로 들어섰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여성 편집자들이었는데, 젊은 세대인 그들의 ‘바리데기’ 독후감은 진지하고 신선했다. 세대를 통하는 작가의 능력이 입증되는 자리였다. 이날 황석영은 다시 출판사에서 마련한 후배 작가들과의 저녁 자리로 옮겨갔고, 덕담과 농담과 술잔이 오가던 자리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문인들까지 합세해 일산의 카페 하나를 점령하는 큰 술판으로 이어졌다. 지치지 않고 시종 좌중의 중심을 지키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가는 그를 두고 카페를 떠났다. 그는 낮에 후배 작가들 작품을 거론하면서 말했다.
-나는 따뜻한 게 좋다. 시니컬한 건 조금 하수인 것 같다. 그건 지적 태도가 아니다.
글 조용호 문화팀장, 사진 송원영 기자
jhoy@segye.com

황석영은 누구인가?

소설가 황석영(64)은 현재진행형의 작가다. 한국 작가들 중에는 젊은 시절에 등단해 중견 무렵이면 대표작으로 거론될 만한 문제작을 펴내 존재를 과시한 뒤, 시나브로 작가라는 이름에만 안주해버리는 이들이 많다. 이런 흐름에서 황석영은 단연 차별화되는 존재다.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일찍이 고교 시절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월남전 체험을 담은 단편 ‘탑’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래 ‘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등을 집필하며 한국의 문제적인 작가로 이름을 날린 것까지는 여타 유명 작가들의 행로와 유사하다. 작품의 내용은 차치하고, 젊은 시절에 등단해 중견에 이를 때까지의 작품 생산 일정만 따진다면 그렇다.
그러나 그가 중년 이후 자신을 던지는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1989년, 마흔일곱에 방북을 감행했다. 북한에 들어가 그쪽 문인들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너나들이를 하며 어울렸고 작고한 김일성 주석과 독대하며 그로부터 ‘민족의 재간둥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실정법이 엄연한 분단사회 남한에 다시 들어오기 위해서 그가 우회해야 했던 세월은 길었다. 독일과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93년 귀국해 감옥에서 5년을 살고 난 뒤에서야 북에 들어간 지 10여년 만에 다시 남한 땅의 작가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98년에 출옥했으니 쉰여섯에 다시 평화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이때부터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재개했다.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펴낸 ‘오래된 정원’(2000년)은 삶의 회한과 지나온 80년대에 대한 소회와 더불어 애틋한 연애 감정까지 배어든 장편이었다. 이어 다시 주목할 만한 장편 ‘손님’(2001년)과 ‘심청’(2003년)을 펴내며 그가 감옥에서 공언했던 이른바 ‘동아시아 3부작’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최근에 펴낸 장편 ‘바리데기’에 이른 것이다. ‘바리데기’는 그의 북한 체험을 질료로 김일성 주석 사후 대기근에 직면한 북한사회의 사정을 세밀하게 드러내면서 탈북소녀 ‘바리’가 영국에 정착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해방 전 만주에서 태어나 청년기에는 월남에 가 있었고, 70년대에는 노동현장에서, 그리고 80년대에는 광주와 북한에 머물렀고, 다시 구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노년에 이르러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는 풍운의 작가인 셈이다. 지금도 그가 한국에 붙박여 있는 것은 아니다. 런던으로 떠났다가 파리에서 산다. 올 10월이면 유럽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한국의 한적한 시골에 칩거할 예정이다. 그는 지난 22일 네티즌들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하고 싶은 국내 작가 1위로 뽑혔다.
조용호 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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