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뿌리
김중미 지음 / 검둥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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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전쟁>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월남전에 참전한 병사들이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장에서, 그것도 가치분별도 없는 '용병 기능'을 수행하면서 겪었던 '인간성 상실'을 견디지 못한 병사들이 귀국 후에도 결국 가치혼란으로 인한 자기분열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정신분열 증상을 보이고 있던 병사가 귀국하여, 전사한 동료의 여동생(기지촌 여성)과 함께 철길을 걷던 장소는 70년대 초반의 기지촌 '동두천'이었을 것이다.

작가 김중미는 기치촌으로서의 '동두천'의 의미를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여길 떠날 기회가 있었고, 얼마든지 여길 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더라고. 너랑 너희 엄마, 해자가 여기 동두천에서 질기고 독하게 사는 동안, 윤희 언니가 미국에서 눈물겹게 사는 동안 나도 그렇게 아프면서 살았어. 왜냐하면 동두천은 현실이거든. 이 땅 어디를 가도 지워버릴 수 없는,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189쪽)

이러한 '기억'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안고 있는 주인공 개인의 소회가 아니다. 작가는 결국 지금 여기의 시각에서  '동두천'의 의미를 독자에게 묻는 것이다.

2000년 국방백서에 의하면 주한미군은 전국 93개 기지에 공여면적 74,467,441평이다. 주둔 인원은 육군 28,100명을 포함하여 37,000명이다. 독일과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주둔군이다.(현재 미국에 의해 전쟁중인 '전시 이라크'를 제외한 수치. 홍성태, [생각하는 한국인을 위한 반미교과서], 당대.2003에서 인용)

파주 13, 의정부 10, 서울 9. 대구 7, 부산 7, 동두천 6, 평택 4 군데의 기지는 지금도 건재하다. 그리고 대추리의 옥탑에 올라 사슬을 묶고 있는 노신부님과 사막 한 가운데 높은 담에 둘러쌓여 주둔하고 있는 자이툰의 오늘도 있다.

정부의 방만한 정책과 기업의 횡포 속에서 신음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바라보는 일상과 유년의 기억이 서린 기지촌에 대한 회상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혼혈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고발하는 이상으로 우리 현대사  이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아닐런지. 말미에 인용한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를 통해...

방송매체를 통해 '책을 읽자'는 캠페인이 유행할 즈음, 맨 첫번째 책의 소재에 대한 궁금증이 많은 언론매체들을 인천시 M동으로 몰려들게 했었다. 당시 작가는 그러한 호기심이 그 동네를 '가난의 상징'으로 굳히게 할 것을 우려해 그들의 출입을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그 뒤의 작품들, <종이밥> <내 동생 아영이> 등을 통해 이 사회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에 대해 항상 질문하고 있는 작가의 '진실함'을 다시금 확인한 책이었다. 

한때의 동두천 기억을 돌이켜보기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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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9-15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 책 궁금하네요. 김중미 작가 좋아요^^

달빛푸른고개 2006-09-15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유년기억이 오롯이 담겨있는 책이더군요.

로드무비 2006-09-16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수영 시집 리뷴가 하고 읽어보니.....
보관함에 넣습니다.

달빛푸른고개 2006-09-16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제목의 시집이 있지요. 이 작품의 내용에서도 그 시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원희룡 “왜 한나라당?…한국 바뀌려면 한나라당 바꿔야”
[한겨레 인턴21] 도전인터뷰-원희룡 의원
뻐꾸기 둥지 ‘한나라’ 위로 날아간 386
한겨레
» 손님들의 낙서로 가득한 신림동의 호프방에서 인턴기자들이 원 의원의 연애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윤종규 인턴기자 poiua@naver.com
[관련기사]
“사회주의 나라들이 하나 둘 무너졌습니다. 운동권 내부의 혼란도 컸어요. 나 역시 정리하기 힘든 이념적인 방황을 거쳤습니다. 현실 사회주의를 준거로 삼고 살아왔는데 그 이론 틀은 틀렸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8월24일 붉은 노을이 질 무렵, 마포의 돼지갈비집 ‘최대포’에서 만난 원희룡(42) 한나라당 의원은 ‘운동권’에서 ‘제도권’으로 변신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 답변으론 학생운동을 하다 보수적인 한나라당을 선택했는지 설명이 안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한나라당이었나?’

사회주의 몰락에 이념적 혼란 겪은 뒤 제도 정치권으로
“왜 한나라당이냐고? 한국 바뀌려면 한나라당 바꿔야”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하며 알게 된 김부겸 선배한테 이끌려 2000년부터 정치를 하게 됐죠. 그때만 해도 김 의원은 한나라당 소속이었는데 ‘한나라당이 힘들겠지만 10년 안에는 답이 나올 것’이라 해서,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어려운 답’이 한나라당이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한나라당에서의 역할은 무엇인지로 질문이 이어졌다. “한나라당에서의 역할이 더 개혁적일 수 있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당을 변화시키자는 취지로 한나라당 개혁파가 생긴 거에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고나 할까요.”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얘기가 20여년 전인 그의 80년대 대학생활로 거슬러 올라갔다. 82학번인 원 의원은 1학년 1학기 때까지는 이른바 ‘도서관파’였다고 했다. 대학 입학과 함께 고향인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온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력고사 전국 수석 원희룡’을 ‘운동권 학생 원희룡’으로 변모시킨 결정적인 이유’라고 강조했다.




“학업과 직접적인 저항 중에 어느 길이 현실에 올바르게 참여하는 것인지 고민하면서 1학기를 보냈어요. 유인물에서 광주항쟁을 알게 됐고, 이념서클을 제 발로 찾아가 이른바 본격적인 운동권 학생이 됐습니다. 80년대는 이념과 저항의 시대였기 때문에 386세대라는 공감대와 강렬한 연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강풀의 <26년>을 봤는지 물어보았다. <26년>은 현재 인터넷 포털 <미디어 다음>에 연재 중인 만화로, 광주항쟁 희생자 자녀들이 모여 학살의 책임자를 단죄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단숨에 읽었다는 원 의원은 “한때 테러리스트가 되려 했다”고 말했다. “나도 전두환을 처단하려고 테러리스트가 되려 한 적이 있었죠. 그러나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26년>이라는 만화는 공감하지만 학살범에게 총살로 보복하는 것은 승리의 역사가 아닙니다.”

» 마포 공덕동에 있는 최대포집에서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이 운동권 학생에서 보수정당의 정치인으로 변신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윤종규 인턴기자 poiua@naver.com
휴학과 정학, 구로공단에서의 야학, 인천 공장에서의 위장 취업 등등…. 그는 20대를 ‘골수 운동권’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노조를 만들었다가 신분이 들통 나는 바람에 학교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89년에 졸업한 그는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해 93년에 합격했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저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과 가치관을 가지고 대안을 내세울 것인가 고민을 하다가 고시 공부를 결심했지요. 예전에는 개량주의라고 비판했던 점진적인 개혁의 길을 찾고,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모두 인정하는 통합적인 가치를 세우기 위한 고민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최대포에서 호프집으로, 다시 원 의원의 대학 시절 추억이 배인 신림동의 소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원 의원의 부인도 합류했다.

원 의원은 8년 연애 끝에 93년 결혼했다. “친구들과 연인 동반으로 지리산 종주를 했을 때 제가 중간에 실신했어요. 이 사람이 제가 깨어날 때까지 무릎 꿇고 기도를 했대요. 함께 종주했던 다른 커플들이 모두 싸웠다고 해요. ‘자기는 내가 쓰러지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따지면서요.” 그는 부인의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묵묵히 끄덕이기만 했다. 연애담에 대한 대질 심문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물었다. “80년대 대학으로 돌아가면 더 치열하게 더 열심히 싸울 것 같습니다. 80년대는 민주화가 최고의 과제였기 때문에 전두환, 노태우를 완전히 퇴장시키기 위해 더 철저히 싸우지 않을까요?”

‘지금의 대학으로 돌아간다면’이라고 되물었다. “전혀 다르게 살 것 같아요. 나는 놀기 좋아하고 호기심 많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보려고 하지 않을까요. 매킨지를 넘을 수 있는 경영 컨설팅 그룹을 만든다든가 펀드매니저를 하고 싶어요.”

20여년을 넘나들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맑시즘의 기본 법칙은 버렸으나 맑시즘의 휴머니즘과 같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습니다.” 이용주 인턴기자(서울대 정치학과 4) 강은지 인턴기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4) minamjij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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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업계 덤 경쟁에 멍든다
하나 사면 하나 더 주는 '1+1행사'를 비롯해 식품업계의 덤 판촉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면서 업체간 출혈경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유업체들이 우유판매 부진을 돌파하기 위해 1000㎖ 제품에 250㎖ 제품을 1~2개씩 덧붙여 판매하는 것은 이제 일반적인 현상이 됐다.

판매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제과업체들도 인기제품에 비인기제품을 얹어주는 덤 행사를 대폭 강화하는 추세다.

심지어 과자 1개에 2~3개를 묶어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과거 덤 행사가 할인점 등 대형 유통업체들이 강요 혹은 유도한 측면이 많았다면 요즘의 덤 경쟁은 업체 스스로 필요에 의해 출혈을 감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할인점 등 대형업체와 파워 게임에서 별로 밀리지 않아 덤행사를 강요받지 않았던 대형 식품업체들이 덤 경쟁을 자초하고 있다.

CJ가 해찬들을 인수하면서 대상과 치열하게 1위 다툼을 벌이고 있는 장류 시장과 풀무원, 두산종가집, CJ 등 대형 업체의 각축장이 되고 있는 두부ㆍ콩나물 시장이 대표적이다.

CJ는 최근 '해찬들 태양초 고추장'의 국내 포함 세계 판매 1위 기념 이벤트를 핑계로 '매운고추장(500g)'에 대해 1+1행사를 펼쳤다.

CJ측은 "판매 증진이나 점유율 확대 등 목적이 아니라 단종을 방지하려는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경쟁사인 대상측 해석은 다르다.


대상 관계자는 "1+1행사는 사실상 가격을 50% 할인하는 것으로 판매율이나 시장점유율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면서 "해찬들의 경우 올 초부터 계속 덤 행사를 하고 있는데 장류 시장 점유율이 연말까지만 해도 대상 44.5%, CJ가 41% 정도였는데 2~3월에는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CJ가 밀고 올라왔다"고 말했다.

CJ가 해찬들 인수 후 장류시장 1위를 달성하기 위해 무리하게 덤 판촉을 계속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CJ는 20일부터 올리브유 구입시 같은 크기의 포도씨유를 증정하는 1+1 행사도 시작한다.

업계 관계자는 "백설 올리브유가 현재 시장점유율 1위(45%)인데 대상 참빛고운 올리브유 등 경쟁제품이 치고 올라오니까 확실하게 우위를 굳히기 위한 것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CJ측은 일반 식용유 시장의 경쟁이 갈수록 심화돼 올리브유와 같은 프리미엄 제품시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대형 식품 3사가 맞붙어 있는 두부시장은 사은품이 없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다.

CJ '행복한 콩 두부'는 매장별로 다르긴 하지만 다담 된장찌개 전용양념, 알짜란(2개), 두부를 갈아먹을 때 넣는 딥 소스(2종) 등을 덤으로 주고 있고 풀무원, 두산종가집 등도 샐러드 드레싱, 콩나물, 연두부, 버섯, 밀폐용기 등을 추가로 준다.

문상수 두산종가집 마케팅팀차장은 "광고비를 줄이는 대신 소비자들에게 신제품 시식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덤 마케팅을 활용하는 것"이라면서도 "식품업계 전반적으로 덤 마케팅이 심화되면서 비용압박이 심화되고 있어 덤 행사를 점차 줄여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식품업계 한 관계자는 "덤 행사는 한두 달 정도 반짝해서 제품을 알리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지금처럼 몇 달씩 경쟁적으로 지속할 경우에는 체력 약한 순서대로 나가 떨어지게 마련"이라면서 "식품업체간 인수ㆍ합병(M&A)이 활발해지면서 대형 업체들이 시장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무리한 판촉경쟁을 지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채경옥 기자] < Copyright ⓒ 매일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06.05.21 18:3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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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뿌리
김중미 지음 / 검둥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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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겠다는 정아에게 전날 먹던 국에 대충 밥을 말아 먹였다. 정아가 나간 뒤 우두커니 방구석에 앉아 있다가 차 열쇠를 꺼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행주대교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동두천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더는 빠져나오지 못하는 미로를 헤매고 싶지 않았다. 나쁜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제 그 골목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29쪽

그렇지만 아버지가 뭐라고 하건 나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소시지와 햄으로 반찬을 해 먹는 다른 집들이 부러웠다. 미국에서는 아무리 싸구려 시계라고 해도 미제 타이맥스 시계를 차고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미군부대에 다니는 아버지를 둔 덕분에 피아노학원을 다니고 새집으로 이사를 가는 친구들을 보면 똑같이 미군부대에 다니는데도 늘 가난한 우리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아직 소시지 하나 못 먹어봤느냐고 놀리는 친구들 앞에서는 나는 미군들이 먹다 버린 쓰레기는 안 먹는다고 짐짓 당당한 척을 했다.-34쪽

"병원비? 미군이 때린 거라며 미군이 물어줘야지."
내 말에 해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 이 멍텅구리야. 너 정말 몰라서 그래? 미군이 한국 사람 때렸다고 병원비 물어주는 거 봤냐?"
나도 그런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마음이 답답하다 보니 얼결에 나온 것뿐었다. 기지촌 사람들 사이에는 불문율이 있었다. 아무리 억울해도 괜히 미군한테 대들거나 시비를 걸면 안 된다는 거였다. 미군하고 실랑이가 붙으면 무조건 한국 사람만 손해였다. 미군들이 한국 사람을 때려서 심하게 다쳤다 해도 병원비 청구는 엄두도 못 냈다.-78쪽

엄마 말에 윤희 언니는 또 눈물을 그렁거렸다. 조산소에서 헤어진 뒤 일 년 반 동안 윤희 언니는 참 많이 변해 있었다. 하지만 언니가 강파르게 변한 것을, 예전처럼 살갑고 따뜻한 윤희 언니가 아닌 것을 섭섭해할 수 없었다. 이미 나 역시 언니가 까만 아기를 키우면서 사람들한테 얼마나 따가운 눈총을 받았을지, 그러면서 얼마나 속을 태웠을지 짐작할 만큼 철이 들어 있었다.-109쪽

재민이도 코끝이 빨갰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억지웃음을 짓는 재민이를 보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그때까지 겨우겨우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버렸다.
"잘 가. 미국 가면 여기 생각 다 잊어버려야 돼."
그때 왜 하필 미국 가면 한국을 다 잊을 거라던 윤희 언니 말이 생각났는지 모른다. 나도 재민이도 윤희 언니처럼 한국에서 받은 상처와 기억을 다 잊기를 바랐다. 아무런 편견도 없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때까지 나는 미국이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곳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다.
"자, 이거 너 가져."
겨우 울음을 멈춘 내게 재민이가 불쑥 내민 건 우표수집책이었다.
"이걸 왜 다 줘."
"비행기 탈 때 짐이 너무 많을 거 같아서. 이거 보니까 너랑 같이 우표 사러 다니던 기억이 나더라. 여기에는 너한테 없는 것만 골라서 넣었어. 잘 가."
재민이는 내가 우표수집책을 받아 들자마자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대문 앞에 세워두었던 자전거에 올라타더니 쏜살같이 골목을 빠져나가 버렸다.-169쪽

"재민아, 동두천은 말이야. 사람들을 떠나보내지 않는 곳이야. 여기 살던 사람들에게 동두천은 특별한 흔적을 남기는 거 같아. 나는 여길 떠날 기회가 있었고, 얼마든지 여길 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더라고. 너랑 너희 엄마, 해자가 여기 동두천에서 질기고 독하게 사는 동안, 윤희 언니가 미국에서 눈물겹게 사는 동안 나도 그렇게 아프면서 살았어. 왜냐하면 동두천은 현실이거든. 이 땅 어디를 가도 지워버릴 수 없는.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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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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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읽어본 기억이 가물하다.(왜 이리 퍽퍽하게 사는지..)

이 책을 읽고는 예전에 코넌 도일이나 아가사크리스티의 책들을 문고본으로 읽으면서 느꼈던 '매혹'을 오랜만에 다시 느끼며 작품 속에 빠져있다 나온 듯하다.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읽기가 결코 버겁지 않다. 이야기의 구성(또는 전개)이 현재 시점의 진행을 축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전개에 필요한 회상이나, 중요한 요소를 위한 장치도 그 전개에 전혀 무리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캐릭터의 설정도 매우 선명하다.

무엇보다도 추리소설로의 이 책의 특장은 무엇보다도 '시선'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리학 교수이자 라이벌인 '유가와'가 적극 개입하기 이전까지는 주인공이자 범인일 '이시가미'의 시선을 따라 책을 읽게 된다. 마치 독자 스스로가 공범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문체가 간명하면서도 뛰어나다. 그리고는 반전... 결말에 이르기까지, 비록 처음 읽는 작품이지만, 상당한 재능을 가진 작가로 보인다.

서평단에 선정된 이상(공짜 아닌가 ^^) 꽤 유익한 '독서경험'에 대해 감사해야 도리일 듯 싶은데... 문득 얼마전 다른 서재의 페이퍼에서 이 책 편집과 관련한 지적과 '현대문학' 측의 설명을 본 적이 있다. 해명의 내용은 적잖은 오류를 인정하며, 새 책이 나오면 페이퍼 작성자에게 발송하겠다는 내용이었다.(이른바 리콜이다) 이 책 판권면을 보니 2쇄이다. 여기에도 아직 숱한 오류가 있다. 오자는 물론이고, 가운데 말을 만들어 넣어볼 만큼 탈자도 있고, 더욱 의아한 것은 문법도 잘 모르는 입장에서 볼 때에도 전후맥락이 맞지 않은 비문도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는 것이다. 역자는 일본어 번역에 상당한 공력을 인정받는 분으로 알고 있다.(최근 읽은 책으로 [플라이, 대디, 플라이]가 있었다) 아마도 번역원고를 입수한 이후의 제작과정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바빠서 2쇄에는 전혀 고치지 못하고 다음 쇄에서 고칠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중견출판사, 특히 문학 분야를 중심으로 오랜 출판경력을 갖고 있는 회사에서 문학작품을 이렇게 '만들다 만' 모습으로 내놓은 점은 고쳐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다른 분들의 평가에서도 분명 지적되겠지만, 추리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후기'도 문제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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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6-09-15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문학 측으로부터 '해명'이 왔네요. 1쇄와 2쇄를 거의 동시에 제작해서 2쇄까지는 오류가 있다고 합니다. 다음주(9월 18일경)에는 3쇄로 나갈 예정이라서, 그때 이후로 보시는 분들은 오류가 수정된 책을 보실 수 있다고 합니다. 일일이 의견을 남겨주신 '성의'가 고맙습니다. 책 내용은 감히 추천할 만합니다. 리뷰를 읽으시는 분들은 참고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