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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님들의 낙서로 가득한 신림동의 호프방에서 인턴기자들이 원 의원의 연애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윤종규 인턴기자 poiua@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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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나라들이 하나 둘 무너졌습니다. 운동권 내부의 혼란도 컸어요. 나 역시 정리하기 힘든 이념적인 방황을 거쳤습니다. 현실 사회주의를 준거로 삼고 살아왔는데 그 이론 틀은 틀렸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8월24일 붉은 노을이 질 무렵, 마포의 돼지갈비집 ‘최대포’에서 만난 원희룡(42) 한나라당 의원은 ‘운동권’에서 ‘제도권’으로 변신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 답변으론 학생운동을 하다 보수적인 한나라당을 선택했는지 설명이 안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한나라당이었나?’
사회주의 몰락에 이념적 혼란 겪은 뒤 제도 정치권으로
“왜 한나라당이냐고? 한국 바뀌려면 한나라당 바꿔야”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하며 알게 된 김부겸 선배한테 이끌려 2000년부터 정치를 하게 됐죠. 그때만 해도 김 의원은 한나라당 소속이었는데 ‘한나라당이 힘들겠지만 10년 안에는 답이 나올 것’이라 해서,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어려운 답’이 한나라당이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한나라당에서의 역할은 무엇인지로 질문이 이어졌다. “한나라당에서의 역할이 더 개혁적일 수 있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당을 변화시키자는 취지로 한나라당 개혁파가 생긴 거에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고나 할까요.”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얘기가 20여년 전인 그의 80년대 대학생활로 거슬러 올라갔다. 82학번인 원 의원은 1학년 1학기 때까지는 이른바 ‘도서관파’였다고 했다. 대학 입학과 함께 고향인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온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력고사 전국 수석 원희룡’을 ‘운동권 학생 원희룡’으로 변모시킨 결정적인 이유’라고 강조했다.
“학업과 직접적인 저항 중에 어느 길이 현실에 올바르게 참여하는 것인지 고민하면서 1학기를 보냈어요. 유인물에서 광주항쟁을 알게 됐고, 이념서클을 제 발로 찾아가 이른바 본격적인 운동권 학생이 됐습니다. 80년대는 이념과 저항의 시대였기 때문에 386세대라는 공감대와 강렬한 연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강풀의 <26년>을 봤는지 물어보았다. <26년>은 현재 인터넷 포털 <미디어 다음>에 연재 중인 만화로, 광주항쟁 희생자 자녀들이 모여 학살의 책임자를 단죄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단숨에 읽었다는 원 의원은 “한때 테러리스트가 되려 했다”고 말했다. “나도 전두환을 처단하려고 테러리스트가 되려 한 적이 있었죠. 그러나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26년>이라는 만화는 공감하지만 학살범에게 총살로 보복하는 것은 승리의 역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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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포 공덕동에 있는 최대포집에서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이 운동권 학생에서 보수정당의 정치인으로 변신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윤종규 인턴기자 poiua@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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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과 정학, 구로공단에서의 야학, 인천 공장에서의 위장 취업 등등…. 그는 20대를 ‘골수 운동권’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노조를 만들었다가 신분이 들통 나는 바람에 학교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89년에 졸업한 그는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해 93년에 합격했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저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과 가치관을 가지고 대안을 내세울 것인가 고민을 하다가 고시 공부를 결심했지요. 예전에는 개량주의라고 비판했던 점진적인 개혁의 길을 찾고,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모두 인정하는 통합적인 가치를 세우기 위한 고민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최대포에서 호프집으로, 다시 원 의원의 대학 시절 추억이 배인 신림동의 소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원 의원의 부인도 합류했다.
원 의원은 8년 연애 끝에 93년 결혼했다. “친구들과 연인 동반으로 지리산 종주를 했을 때 제가 중간에 실신했어요. 이 사람이 제가 깨어날 때까지 무릎 꿇고 기도를 했대요. 함께 종주했던 다른 커플들이 모두 싸웠다고 해요. ‘자기는 내가 쓰러지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따지면서요.” 그는 부인의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묵묵히 끄덕이기만 했다. 연애담에 대한 대질 심문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물었다. “80년대 대학으로 돌아가면 더 치열하게 더 열심히 싸울 것 같습니다. 80년대는 민주화가 최고의 과제였기 때문에 전두환, 노태우를 완전히 퇴장시키기 위해 더 철저히 싸우지 않을까요?”
‘지금의 대학으로 돌아간다면’이라고 되물었다. “전혀 다르게 살 것 같아요. 나는 놀기 좋아하고 호기심 많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보려고 하지 않을까요. 매킨지를 넘을 수 있는 경영 컨설팅 그룹을 만든다든가 펀드매니저를 하고 싶어요.”
20여년을 넘나들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맑시즘의 기본 법칙은 버렸으나 맑시즘의 휴머니즘과 같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습니다.” 이용주 인턴기자(서울대 정치학과 4) 강은지 인턴기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4) minamjijo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