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 노르웨이의 한국인들이 말하는
박노자 외 지음 / 꾸리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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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식의 장래에 대한 고민이 많다. 애는 참 착하고 성실한 편인데, 그런 애들이 이 대한민국에선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삼 복지국가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겼다. 그런데 의외로 노르웨이에 대한 책이 별로 없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비록 10년전 나온 책이긴 해도 다행히 좋은 책이 있어서 읽게 되었는데, 박노자가 공저자다.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시작해 한동안 박노자에 푹 빠져있었는데, 그게 벌써 20년전이라니 세월 참... 박노자와 나의 공통점(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ㅋㅋ)은 첫째, 나이가 같고, 둘째, 사립학교에서 노예처럼 일했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박노자는 좋은 곳으로 떠났고, 난 그대로 머물러 있단 점이다ㅠ.

 

노르웨이는 산유국이다. 국토는 우리보다 6배나 큰데, 인구는 1/10이나 적다. 따라서 바로 따라할 모델이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소련이 옆에 있어서 공산화 될까봐 복지국가를 택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우리도 그렇게 공산주의가 싫고, 공산화될까봐 두렵다면, 노르웨이처럼 복지국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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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봄. 나는 한국의 모 사립대학에서 비정규직(계약직) 강사로 채용되었다.

한국에서 사립학교 재단의 노예로 사는 것이 너무나 불편했던 나는 외국에 자리를 알아봤다.

우리 가족은 20003월 말에 노르웨이에 와서, 현재 13년간 거주해오고 있다.


노르웨이는 전체 노동인구의 약 30퍼센트가 공공부문에서 일한다. 비록 시장성이 없는전공(고대 희랍어라든가 등등) 졸업자라 해도 일단 인문학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공공부문 직장(예컨대 복지사무소 상담원 등)을 보통 가질 수 있다. 그러니까 한국과 결정적 차이는 결국 공공부문 고용의 크기인 듯하다.


노르웨이는 소매업 시장의 99.3퍼센트를 4개의 큰 독점기업이 독차지하고 있다. 개인이 가게 내서 장사에 성공했다는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노르웨이는 전체 비농업 부문 피고용자에 대비해 비농업 자영업가 4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피고용자 100명 이상이면 노사 간의 소통과 노동자의 발언권, 즉 경영참여가 법제화되어 있다. 때문에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안정된 소득의 임금 노동자들이 맹목적 성장보다 차리리 재분배 위주의 정책에 더 쉽게 합의한다.


한국은 지금도 산업국으로서 최악의 비정규직 비율(노동인구 중 56퍼센트 정도)을 전혀 줄이지 못하고 있지만, 노르웨이는 비정규직이 약 8퍼센트에 불과


노르웨이에서 복지국가의 기본적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대공황 시절인 1930년대 초기였다. 당시 노르웨이의 지배자들은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인접국가인 소련처럼 아예 체제를 전복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비록 의회에서는 약세였지만, 급진적인 노조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보수정당들이 차선책으로 차라리 복지개혁을 실시하겠다는 노동당의 집권을 수용한 것은 결국 혁명에 대한 공포로 인한 하나의 양보였다.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북유럽은 경험적으로 잘 증명하고 있다. 총국민생산 중 세수의 비중을 보자면, 노르웨이는 43퍼센트, 스웨덴은 45펴센트, 러시아만 해도 37퍼센트이다. 그렇다면 한국은미국과 똑같이 26퍼센트 정도이다.


지구인 전체가 노르웨이만큼의 소득 및 소비 수준을 누리자면 우리에게 약 세 개의 지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만큼 노르웨이의 특수한 경험을 무조건 보편화시켜서 다른 나라들에 그대로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반드시 노르웨이 정도의 화려한국가적 지출은 아니더라도 한국과 그 경제수준이 비교가 가능한 남유럽, 동유럽의 상당수 국가들까지도 적어도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실행하고 있기에, 이와 같은 정치적 목표들을 한국의 경우에도 상정할 수 있다.


노르웨이를 포함한 북유럽은 인구가 한국보다 많지 않아서 높은 수준의 사회복지를 유지할 수 있고 한국에선 그런 모델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사실일까? 스칸디나비아 복지 모델은 근본적으로 독일 모델을 근간으로 해서 발전시킨 것으로 독일인구는 남한의 두배에 가깝다. 문제는 총인구 숫자가 아니라 부자와 기업으로부터 얼마나 효과적으로 징세를 하는가, 그리고 부자에게 징세하고 보편적 복지를 실행할 만큼 정치적 의지력이 있는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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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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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지

작년에 갑툭튀 유행한 말이다.

혹시나 사전에 있는 말일까 검색해보니 역시나 없는 말이다.

일단 말이 안된다.

수십년의 일제강점기를 지나 드디어 해방을 맞이했으니 해방이란 뭔가 역사적이고 극적인 단어일텐데 어찌 매일매일의 일상에 있단 말인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의 일상은 죽음이란 극적인 해방 전까진 끊임없는 지옥의 연속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해방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히려 해방엔 일지가 더 어울릴 수도 있단 생각을 했다.

 

아무튼, 2022년 상반기엔 박해영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있었고, 하반기엔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있었으니, 해방의 나날이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사실 아버지의 일기가 아니라 딸의 일기다. 그것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며칠간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일기를 통해 아버지는 해방을 맞는다. 단지 정지아 아버지만의 해방이 아니라 이 땅의 사회주의자, 아니 사회주의에 호감을 갖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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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고 뭐고 남자란 죄 야들야들한 암컷 앞에서 흐물흐물 녹아나는 모양이었다

 

광주교도소에서 함께 복역한 동지 한 사람이 떠르르한 지주의 자식이었다. 그에게는 늘 사식이 풍성하게 들어왔다. 그 사식을 벤소에 숨겨놓고 돼지처럼 저 혼자 먹었다고, 진짜배기 혁명가가 아니라고, 아버지는 두고두고 흉을 보았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한 감방에 있었는디 갸들은 지 혼자 묵들 않애야. 사식 넣어주는 사람 한나 읎는 가난뱅이들한티 다 노놔주드라. 단 한멩도 빠짐없이 글드랑게. 종교가 사상보담 한질 윈갑서야

 

아버지는 시골 태생이긴 하지만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노동과 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노동은 혁명보다 고통스러웠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는다는 전직 빨치산이 고추밭 김매는 두시간을 참지 못해 쪼르르 달려와 맥주컵으로 소주를 원샷할 때마다 나는 내심 비웃으며 생각했다. 혁명가와 인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생 무렵의 내 결론이었다.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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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수 2023-06-0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작가 임승수라고 합니다. 이번에 제가 쓴 인문에세이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출간 소식을 전하기 위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진심을 담아서 한 글자 한 글자 열심히 썼지만 딱히 홍보할 방법이 없다 보니 답답한 마음에 저자가 이렇게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책 여러 권을 가방에 넣고 무작정 지하철에 올라 승객분들에게 직접 육성으로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그래서는 안 되겠지만요). 갑작스러운 댓글에 불편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여러 일로 바쁘시겠지만 1분 정도만 시간을 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문득 제 신간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의 내용이 <아버지의 해방일지> 21세기 실사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속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 사회주의자로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살아오면서 생긴 독특한 인간관계와 에피소드가 있듯이, 두 딸의 아빠이자 반백살의 남성인 저도 30년째 사회주의자로 살아오면서 그런 삶을 견지했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생 때 사회주의자가 된 이후 인생이라는 여행의 경로가 대폭 변경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바뀌다 보니 갈림길에서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인데요. 글치였던 공대생 출신이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서는 느닷없이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 선거 날 투표할 때면 지지율이 1%도 안 되는 후보에게 거침없이 한 표를 행사하고, 뜬금없이 와인에 홀딱 빠져서는 대한민국 검사뿐만 아니라 노동 조합 간부들을 대상으로 와인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인생 경로는 명승지 투어 같이 잘 차려진 패키지 여행과는 결이 달라서, 오지 탐험에서나 맞닥뜨릴 돌발 장면들이 순간순간 펼쳐졌습니다.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에는 제가 사회주의자라는 여행 경로를 선택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이 경로를 선택했을 때만 접할 수 있는 풍경, 경험할 수 있는 사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전히 이 여행이 제법 맘에 들어서 설사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사회주의자로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 이야기에 공감하리라 기대한다면 과욕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오지 탐험 여행서 같은 흥미진진함을 제공하리라 작은 기대를 해봅니다.

이 책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쓴 건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삶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썼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재밌게 읽으셨다면 제 책도 ‘실사판’으로서 무척 흥미롭게 읽으시리라 확신합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권의 여행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아래에는 출판사의 책소개 일부를 발췌해서 옮깁니다. 귀중한 시간 할애해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의 인터넷서점 링크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9181643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7534357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2430088

”우리는 과연 사회주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실 사회주의는 생각보다 훨씬 우리의 일상 가까운 곳에 스며들어있다. 일례로 전 세계가 주목한 코로나19 감염병 대처 방식도 지극히 사회주의식이었다. 국가가 앞장서서 공공 재원과 행정력을 동원해 감염병에 대처했으며 코로나 진단 검사와 치료를 누구나 무상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보건 의료 정책과 더불어 국민건강보험공단, 국공립학교, 국공립어린이집, 무상 급식, 공공 임대 주택, 부자 증세 등등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복지 및 재분배 정책은 모두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졌다. 그런데 복지를 확대하길 원하면서도 왜 사회주의에는 유독 반감을 가질까?

저자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본격적으로 해소한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가 대세이면서 동시에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30년 차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아낌없이 들려준다. 또한 자본주의의 은폐된 착취 시스템이 작동하는 원리를 해설하고, 역사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태생과 최후를 통찰한다.

사회주의로의 강요는 없다. 다만 질문이 시작될 뿐이다. 최악의 빈부 격차, 극심한 이윤 지상주의, 유례없는 환경 파괴, 만연한 생명 경시 풍조가 지배하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지켜나갈 것인지. 증오와 배척, 불평등와 불공정 너머의 세계를 꿈꾸며, 우리 삶의 지표에 진중한 화두를 던진다“

신나 2023-06-07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님 반갑습니다. 좋은 책 꼭 읽고 리뷰도 써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지음 / 클레이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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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부모님이 서점을 하셨다. 망했다. 왜 망했을까? 아버지는 책을 읽는 건 잘하셨지만, 책을 팔아서 돈을 남기는 건 못하셨기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책으로 돈을 벌 수도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현실에선 불가능한 게 이야기 속엔 가능해진다.


런던의 노팅힐에서 여행서적을 파는 작은 서점, 이 보잘것없는 책방을 운영하는 총각이 유명 여배우와 만나 사랑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영화 노팅힐(1999)’이다. 뉴욕의 어퍼이스트에서 아동서적을 파는 작은 서점, 이 하찮은 책방을 운영하는 아가씨가 큰 책방을 운영하는 남자와  사랑을 한다는 이야기가 영화 유브갓메일(1998)’이다.


베스트셀러를 팔지 않고, 동네 주민들과 독서토론을 하는 작은 서점, 현실에선 딱 망하기 좋은 이 서점을 운영하는 이혼녀가 손님으로 온 어느 작가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소설 휴남동 서점이다이런 상상들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많이 한다면 현실이 될 수도 있단 건 망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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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오픈 전까지 영주는 소설을 읽는다. 소설은 영주를 자신만의 정서에서 벗어나 타인의 정서에 다가가게 해줘서 좋다. 소설 속 인물이 비통해하면 따라 비통해하고, 고통스러워하면 따라 고통스러워하고, 비장하면 영주도 따라 비장해진다. 타인의 정서를 흠뻑 받아들이고 나서 책을 덮으면 이 세상 누구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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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부엌 (인사이드 에디션)
김지혜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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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킬링(killing)이 유행했는데 요즘은 힐링(healing)이 유행이다. 예전엔 심심해서 재미있는 걸 찾았다면 요즘은 힘들어서 쉬고 싶은 델 찾는단 걸까?

 

2010년 전후에 나온 일본 영화 메가네’, 카모메식당’, ‘해피해피브레드2020년 이후에 나온 한국 소설 불편한 편의점’, ‘휴남동 서점’, ‘책들의 부엌의 공통점은 힐링이다.

 

특히 이 책 책들의 부엌은 몸의 양식인 밥과 맘의 양식인 책이 함께 처방된 힐링이다. 퇴임하면 하고 싶은 게 책을 읽고 밥을 먹으며 쉴 수 있는 북스테이였는데, 이미 이 소설에서 실현되었다. 상상만이라도 행복하다. 이 책은 추운 겨울날 창가로 비치는 따뜻한 햇살 아래 읽어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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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 키친은 말 그대로 책들의 부엌이에요. 음식처럼 마음의 허전한 구석을 채워주는 공간이 되길 바라면서 지었어요. 지난날의 저처럼 번아웃이 온 줄도 모르고 마음을 돌아보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맛있는 이야기가 솔솔 퍼져 나가서 사람들이 마음의 허기를 느끼고 마음을 채워주는 이야기를 만나게 됐으면 했어요. 그리고 누군가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글쓰기를 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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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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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억년 지구 역사에서 고작 수십만년전에 탄생한, 심지어 하찮은 근력을 가진 인간이, 지구를 정복한 이유는 믿음(라틴어 FIDES)때문이었다. 믿음은 신앙(종교), 신념(정치), 신용(경제) 등으로 인간사회를 대대로 단결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지구를 정복한 인간은 지구의 다른 유기체, 무기체와  함께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리고 심지어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한다. 이제 우리 호모피데스에게 필요한 믿음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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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류는 뇌가 커지면서 두 가지 대가를 지불했다. 첫째, 식량을 찾아다니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둘째, 근육이 퇴화했다. 국방 예산을 교육 부문으로 전용하는 정부처럼 인류는 근육에 쓸 에너지를 뉴런에 투입했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었다.

 

사피엔스의 평균 뇌 용적은 수렵채집 시대 이래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증거가 일부 존재한다. 그 시대에 생존하려면 누구나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녀야 했다. 하지만 농업과 산업이 발달하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기술에 더 많이 의존할 수 있게 되었고, ‘바보들을 위한 생태적 지위가 새롭게 생겨났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좁은 상자 안에 갇혀서 살을 찌우다가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가 되어 짧은 삶을 마감하는 송아지보다는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한 야생 코뿔소가 더 만족해 할 것이다.

 

농경시대에는 공간이 축소되는 동안 시간은 확장되었다. 수렵채집인은 다음 주나 다음 달에 대해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농부들은 미래의 몇 해나 몇 십년이라는 세월 속으로 상상의 항해를 떠났다.

 

기원전 3500~3000년 어느 시기에, 익명의 수메르 천재들이 뇌 바깥에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시스템을 발명했다. 대량의 수학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맞춤 시스템이었다. 덕분에 수메르인들은 인간의 노에서 비롯되는 사회질서의 제약에서 벗어나 도시, 왕국, 제국의 출현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수메르인이 발명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은 쓰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군사적으로 무능했던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는 안정적인 제국 체제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여,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장군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루지 못한 것을 성취했다. 당대에 그를 칭송했던 사람들과 현대 역사가들은 공히 그가 그런 업적을 이루루 있었던 것은 그의 온화함과 관용이라는 미덕 덕분이었다고 해석하곤 한다.

 

어떤 사회적 동물도 자신이 속한 한 종 전체의 이익에 이끌려 행동하지는 않는다. 지구적 달팽이 공동체를 위해 촉수 한 쪽이라도 까딱하는 수고를 들일 달팽이는 없으며, 벌집 입구에 만국의 일벌들이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붙어 있는 경우도 없다. 하지만 인지혁명을 시발로, 호모 사피엔스는 이 점에서 점점 예외가 되어갔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형제친구라고 상상하면서 말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최고 권력은 관심이나 편견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의 평범한 욕망이나 근심 걱정에 개의치 않는다. 이 권력에서 전쟁의 승리나 건강, 비를 요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위치에서 보면, 특정 왕국의 승리나 패배, 특정 도시의 번영이나 쇠퇴, 특정인의 회복이나 사망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운명의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았고, 힌두교도들도 아트만을 위한 사원을 짓지 않았다.

우주 최고의 권력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이유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다 끌어안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힌두교에서 성자나 고행자로 알려진 일부 신자는 자신의 삶을 아트만과의 합일을 위해 바치며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힌두교 신자는 성자가 아니다. 이들은 세속의 관심사에 깊이 빠져 있으며, 아트만은 여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문제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힌드교도들은 부분적 권력을 가진 신들에게 접근한다. 그러니 당연히 신들도 여러 명이 되었다.

 

다신교의 신을 믿는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수호신을 몹시 좋아한 나머지 다신교의 기본 통찰에서 멀어졌다. 그들이 자신이 신이 유일신이며, 그분이 우주의 최고 권력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분이 여전히 사심과 편견을 지닌 것으로 보았고, 우리가 그분과 거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해서 일신교가 태어났다.

 

일신론은 질서를 설명하지만 악 앞에서 쩔쩔맨다. 이신론은 악을 설명하지만 질서 앞에서 당황한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논리적 방법이 하나 있다. 온 우주를 창조한 전능한 유일신이 있는데 그 신이 악한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앙을 가질 배짱이 있는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자연법칙 종교가 근대에 새로이 등장했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국가사회주의가 그런 예다. 이들은 종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이데올로기라고 칭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용어상의 문제일 뿐이다. 만일 종교를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 인간의 규범과 가치 시스템이라고 정의한다면, 공산주의는 이슬람교에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종교다.

 

근대 초기는 지중해의 오토만 제국, 페르시아의 사파위 제국, 인도의 무굴 제국, 중국의 명과 청 왕조의 황금시대였다. 1775년 아시아는 세계 경제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

세계의 권력 중심이 유럽으로 이동한 것은 175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이르러서다.

근대 초기에 유럽은 어떤 잠재력을 개발했기에 근대 후반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는 서로 보완적인 두 가지 답이 존재하는데, 바로 현대 과학과 자본주의다.

 

기독교나 나치즘 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우리가 우리의 유전자를 주물럭거린다고 해서 반드시 멸종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게 될 가능성은 있다.

 

현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시대이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역사상 유례없는 불평등을 창조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상류계급은 자신들이 하류계급 보다 똑똑하고 강건하며 전반적으로 우수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언제가 스스로를 속였다. 사실 가난한 농부에게서 태어난 아기의 지능은 황태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의학적 능력의 도움을 받는다면, 상류계층의 허세가 머지않아 객관적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친구라고는 물리법칙밖에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의 친구인 동물들과 주위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오로지 자신의 안락함과 즐거움 이외에는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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