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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험지옥에 빠지다 - 팔도 최고의 족집게 선생부터 기상천외한 커닝 수법까지, 처음 읽는 조선의 입시 전쟁
이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8월
평점 :
시험이라는 제도는 왜 탄생했을까? 아마도 공정 때문일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을 공정하게 뽑는 것이 시험이니까. 그런데 왜 공정을 얘기했을까? 아마도 사회가 너무나 불공정해서 망할 것 같으니까, 왕 또는 귀족의 혈연들에 의해 그들의 권리와 재산 등을 세습하는 불공정이 임계치에 이르러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시험은 세습에 비해 공정한가? 세습도 처음엔 공정했다. 부모의 유산을 자식에서 주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면, 어느 부모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자신이 죽어도 자신의 분신인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줄 수 있으니 열심히 일하는 거다. 다만 물려주는 부모의 관점에선 정당하지만 그걸 받는 자식의 관점에선 부당하다. 일하지 않은 소득, 즉 불로소득이 생겼기 때문이다. 세습을 거듭할수록 그 부당함이 커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험도 처음엔 공정했다, 적어도 세습에 비해. 그러나 그 공정은 부정행위가 없을 때 가능한 얘기다. “조선, 시험지옥에 빠지다”라는 책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과거 시험의 비리는 매우 다양했다. 대리 시험, 답안지 바꿔치기, 답안지 전달하기, 책 훔쳐보기 등 그러나 이런 것들은 개인 비리에 불과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구조적인 비리이다. 즉 명문가의 제자들만 합격을 시킨 것이다. 심지어 왕이 이를 못하게 금지해도 신하들이 반대했다.
부정행위는 막을 수 없다. 특히 합격유무에 따라 삶이 완전히 양극화되는 극심한 경쟁사회일수록 더욱 그렇다. 따라서 공정한 사회,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각자도생으로 시험 문제를 풀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양극화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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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영달을 위해 오직 과거 공부에만 전념했다고 고백했으며, 퇴계 이황은 과거의 폐단을 비판하면서 자기 아들과 손자에게는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잔소리를 그치지 않았다. 시대를 풍미한 대학자인 그들에게조차 교육이란 곧 입신양명을 위한 과거 공부에 지나지 않았다.
다산 정약용이 자신의 큰아들 정학연에게 지어준 시를 살펴보자.
때가 오면 출세하여 임금 보좌하고 –정약용 ‘무아가 태어난 지 백일이 되던 날 기쁨을 기록하다.’
시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어서 과거에 급제해서 대신이 되어야지!” 정도가 된다. 당시 정학연은 이제 막 백일이 된 갓난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약용은 한술 더 떠 한글과 한자를 막 떼기 시작한 정학연에게 본격적으로 과거 공부를 시켜 주변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기까지 했다.
한반도에서 과거는 고려 때인 958년(광종 9년)에 처음 시작되어 1894년(고종 31년)에 마침표를 찍었다.
정조는 정말로 못 쓴 글씨를 싫어했다. “문체는 갑자기 바꾸기 힘들지만 필체는 한 번 보면 그 사람이 진지한지 가벼운지 알 수 있으므로” 악필은 무조건 낙방이라는 것이다.
빨리 이루려 하지 말라. 빨리하려 하면 도달하지 못한다 (無慾速慾速則不達) - 공자 '논어'
저리 점잖게 말한 공자조차 자기 아들 공리에게 “너 시경은 공부했니? 예기는 읽었고?”하며 꼼꼼히 잔소리했다.
영조는 갓 돌이 된 둘째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 어머니와 떨어져 창경궁 저승전에서 혼자 공부하게 했다. 그뿐 아니라 조선 최고의 학자들을 선생으로 붙여 각종 선행 학습과 영재 학습을 강행했다.
세상에 허다한 영재들이 세속의 학문에 허덕이고 있으니,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과거라는 구덩이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 이황 ‘퇴계선생언행록’
이준은 아버지가 바라는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럴 때면 이황은 “(과거 보러) 왜 올라오느냐? 그냥 농사나 짓거라”라며 타박했다. “아침저녁으로 공부하길 바라는데, 왜 그러지를 않느냐?”, “친척 아무개는 과거에서 급제했는데, 너는 무얼 하느냐?” 같은 내용도 잔소리의 단골 레파토리였다.
조선시대에도 사람들은 책 읽기를 힘들어했다. 경전의 내용이 쉽지도 않고 분량이 적지도 않으니, 당연했다. 그래서 요점이 잘 정리된 참고서 즉 초집(招集)이 유행했다.
1750년(영조 26년)의 과거에는 박지익과 강필교가 장원급제했는데, 임금이 직접 뽑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함께 급제한 동기들에게도, 기존의 관리들에게도 공공연하게 왕따당했다. 가해자들의 논리는 참으로 후안무치했는데, 집안 좋은 사람을 장원으로 뽑는 게 옛 법도인데, 이를 어겼으니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과거는 입신양명과 직결되었다. 그만큼 급제를 원하는 사람도 많았고, 그 열망도 강렬했다. 이런 구조에서는 입시비리가 안 일어날 수 없었다. 고종은 “한번 과거를 보면 그때마다 폐단이 하나씩 늘어난다”라며 한탄했다. 그 폐단이 너무나 많아져 도저히 바로잡을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 순간, 나라는 망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 조선의 역사와 쭉 함께한 과거제도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리라.
지난 2019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모든 문과 급제자의 삶을 연구했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조선에서 높은 벼슬을 얻으려면 과거 성적보다도 가문이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