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5
김형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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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은 만주(북간도)에서 윤동주, 송몽규와 함께 성장하였다. 송몽규가 중학교 때 신춘문예에 산문으로 등단하였고, 윤동주는 문익환이 시를 못 쓴다고 핀잔하였지만, 문익환은 평양 숭실학교에 가장 먼저 진학한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거부하느라 자퇴하고 고향 만주로 돌아와 아이러니하게도 친일계 광명중학교에 편입한다. 도쿄 유학 중에 만난 박용길과 결혼, 미국으로 유학한다. 전쟁과 분단을 겪으며 평생 통일과 민주를 위해 살았다.

 

라고 쓰고 보니 재미가 없네... 다시 쓰자면... 어릴 적 삼총사 몽규와 동주에게서 느꼈던 미묘한 경쟁, 콤플렉스가 친근하다. 게다가 몸이 약해 결혼을 못할 것 같으니 금강산에 가서 6개월간 몸을 만들어 와서 결혼한 것도 참 친근하다. 그런 아내를 두고 몰래 혼자 미국으로 유학한 것도 그렇다. 그렇지만 앞서간 송몽규, 윤동주, 장준하가 못 이룬 일들을 늦게 피지만 길게 가는 꽃처럼 이뤄냈다. 통일 운동이나 민주화 운동 뿐만이 아니라 우리 말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 공동번역성경을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태초'를 '한 처음'으로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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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조선인을 끌고 갈 때 윤동주는 학도병으로 무기를 받아서 그것을 일본에게 겨누는 길을 구상하였고(이것이 그를 옥사시킨 이유였다), 장준하는 학도병을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넘어갔으며, 문익환은 만주 봉천으로 회피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걸었다. 그때 그들은 모두 일제에게 충성하여 윤동주들을 죽이고 장준하들을 공격하는 친일부역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한데, 박정희는 그 친일 부역자 안에서도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최상급의 길을 선택했었다.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금메달을 수여받음과 동시에 졸업생을 대표하는 답사를 낭독할 때 그의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만주국의 왕도락토를 지켜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는 성전에 참여, 저는 벚꽃처럼 산화하겠습니다." 성적도 우수한 조선인 생도가 일본 천황에게 이토록 무서운 충성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박정희는 일본 육사에 입학할 수 있는 특정을 얻었다. 그리하여 다시 1944년 일본 육사 57기를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오카모도 미노루라는 이름의 일본군 소위가 되었다.

 

문익환은 장준하가 실족사 했다는 자리에 쏜살같이 달려가서 여러 가지 정황을 수집해본 결과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타살이라고 확신했다.

 

문익환은 장준하의 관을 땅속에 내리면서 약속했다. 그의 죽음을 땅에 묻어서는 안된다! 그래 네가 하려다 못한 일을 내가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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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 시로 만나는 윤동주, 2013 서울문화재단 발간지원사업 선정작
김응교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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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살에 광복을 반년 앞두고 일본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한 끝에 숨진 윤동주. 비극적인 죽음이었지만 그의 곁엔 참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종사촌 송몽규는 그와 죽음을 같이 했고, 후배인 정병욱은 그의 유작을 목숨 걸고 지켰습니다. 친구인 문익환은 늙어 죽을 때까지 그의 뜻을 이어 갔습니다. 또한 동생인 윤일주가, 송몽규의 조카 송은혜가 그렇게 윤동주를 추억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 김응교도 동주 잇기에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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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9월 은진중학교 사학년 일학기를 마친 윤동주는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합니다. 미션스쿨인 숭실학교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를 용케 버텨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람벽이 되어주었던 서양 선교사들이 평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936120일 총독부에 의해 교장직에서 강제 해임된 교장 윤산온(George McCune)은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를 사랑했던 학생들은 동맹 퇴학을 감행합니다. 퇴학자 명단에는 윤동주를 비롯해 그와 용정에서 함께 온 문익환 등도 있었습니다. 19363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 표시로 열아홉의 윤동주는 결국 육 개월 만에 숭실중학교를 자퇴합니다.

 

 

북간도 명동촌의 같은 집에서 1917928일 송몽규가, 같은 해 1220일 윤동주가 태어났습니다.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로 일했던 송몽규의 아버지 송창희가 윤동주의 고모부였습니다. 송몽규가 신춘문예로 등단하면서 윤동주는 시창작에 더욱 몰두합니다. 또한 송몽규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집을 떠나자 윤동주는 형을 그리워했고, 결국 두 사람은 1938년 봄 연희전문에 함께 입학합니다. 기숙사도 한방을 썼습니다. 두 사람은 일본 유학도 함께 가고, 함께 공부했으며, 함께 투옥되고, 함께 죽음을 맞이합니다.

 

 

1917년에 태어난 박정희와 윤동주, 1918년에 태어난 장준하와 문익환. 박정희는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졸업생을 대표하여 만주국의 왕도락토(王道樂土)를 지켜 대동아 성전에 참여, 벚꽃처럼 산화하겠다는 답사를 낭독합니다. 박정희의 길은 일본군 장교로서 독립운동하는 동족을 사냥하는 일에 나서는 것이었죠. 무서운 충성심을 보여준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입학할 수 있는 특전을 얻고 1944년 일본 육사 57기를 삼등으로 졸업합니다. 박정희는 곧 일본군 소위 오카모도 미노루였습니다.

정반대로 장준하는 학도병을 탈출하여 육천 리를 걸어 광복군으로 넘어가 기관총을 들고 일본군과 맞섭니다. 한편 문익환은 만주 봉천으로 피하여 선교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윤동주는 가장 연약한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가 감옥에 갇혀 가장 먼저 죽습니다. 장준하에게서 느꼈던 사회적, 정치적 실천에 대한 겸손한 다짐은 문익환을 재야 운동가로 만듭니다.

또래 인물 중에 가장 오래 살았던 문익환 목사는 박정희를 제외한 친구들의 장점을 받아들입니다. 박정희의 기회주의적 처신을 참을 수 없었던 장준하처럼 혁명가의 삶을 살기도 하고, 가장 부러워했던 윤동주처럼 시인이 되어 시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시인으로 만들어준 친구 윤동주에게 시 한 편을 올립니다.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테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 억울해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버릴 줄 알았던 너의 피 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 문익환, 동주야

 

 

피고인은 만주국 간도성에서 반도 출신의 중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같은 곳에서 중학교를 거쳐, 경성에 있는 사립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쇼와 17(1942) 3월 일본에 건너와서 일시적으로 도쿄 릿쿄 대학 문학부 선과에 재학했으며, 같은 해 10월 이후 교토 도시샤 대학 문학부 선과에 전과해서 현재에 이르는 사람으로, 유년시절부터 민족적 학교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서 등을 탐독하며 교우의 감화 등에 의해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일본과 조선 사이에 소위 차별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원망하는 생각을 가지고, 일본의 조선 통치 방침을 보고 조선 고유의 민족문화를 전멸시키고, 조선 민족의 멸망을 도모한다고 해서, 그 결과 조선 민족을 해방시키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하여 조선으로써 제국 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키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 외에는 없고, 조선 독립을 위하여 조선 민족의 현 시점에서 실력 또는 과거에 있었던 독립운동 실패의 발자취를 살피며, 조선인의 능력과 민족성을 향상시키며 독립운동의 소질을 배양해야만 하고, 일반 대중의 문화 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써야 한다고 결의를 하기에 이르러, 대동아전쟁의 발발에 직면해 있는 과학력이 열세인 일본의 패전을 몽상하고 그때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고 얻을 수 있으며, 일본은 망한다고 하는 신념을 갖추었으며 (중략) 치안유지법 제5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소정의 형기 범위 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하며...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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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 언니 - 양장
권정생 지음, 이철수 그림 / 창비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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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배고프고 아픈 사람들이 많았다. 권정생도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물론 그의 작품이 널리 읽히면서 돈을 많이 벌게 되었지만, 그는 그 돈을 늘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고 자신은 여전히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몽실언니작가의 말을 통해 이 작은 이야기가 통일의 밑거름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고통스럽게 살아온 전쟁의 어린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싶었다라고 밝혔다. 강아지똥, 몽실언니, 우리들의 하나님3종세트로 권정생의 바른 삶(정생, 正生)을 느껴보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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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라도 아버지와 아들은 원수가 될 수 없어요. 나도 우리 아버지가 빨갱이 되어 집을 나갔다면 역시 떡 해드리고 닭을 잡아 드릴 거여요.

 

국군 중에는 나쁜 국군도 있고 착한 국군도 있지. 그리고 역시 인민군도 나쁜 사람이 있고 착한 사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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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하느님 - 권정생 산문집, 개정증보판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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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똥몽실언니로만 권정생을 안다면, 왜 국방부가 그의 책 우리들의 하나님을 금서로 지정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국방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 우리들의 하나님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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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식만 일등하기 바라고, 내 자식만 일류대학 보내려는 그런 욕심부터 없애야 한다. 나만 축복받기 위하여 수천만원씩 절간에다 시주하고 교회에도 헌금하고 자랑하는 그런 양심부터 쓸어내야 한다. (권정생 팥빙수 한 그릇과 쌀 한되 )

 

한살림에서 무공해식품이라는 걸 잔뜩 사다놓고 왜 이렇게 갑자기 괴로워지는지 화가 또 난다. 진짜 한살림은 이웃끼리 마을끼리 서로 사고 팔고 주고 받으며 살아야 되는데 가까운 이웃은 다 버리고 먼 데서 깨끗한 음식만 먹겠다고 한 것이 정말 잘 한 것일까? (권정생 슬픈 양파농사 )

 

우리는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물건을 만들어낸다고 하지 않고 생산해낸다고 한다. 생산(生産)이란 낳는다는 뜻인데 어떻게 낳는다고 할 수 있는가? 곳간에 들어있는 곡식을 꺼내 밥을 짓고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을 밥을 낳아 먹는다거나 떡을 낳아 먹는다고 해서는 안 되듯이, 흙 속에 묻혀 있는 광물질을 꺼내어 기계를 만들어 도구를 만드는 것을 생산이라 할 수 없지 않는가? (권정생 녹색을 찾는 길 )

 

성서를 보면 아담의 아들 카인과 아벨이 하느님께 첫 수확으로 제사를 올렸는데 하느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고 카인의 것은 받지 않았다. 아마도 이 세상에 상벌이 생긴 최초의 사건이 아닌가 싶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카인은 질투심으로 동생 아벨을 죽였다. 결국 상이란 건 받는 사람도 못 받는 사람도 이롭지 못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성취한 노력의 대가로 만족해야지 다른 누구에게 평가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권정생 효부상을 안 받겠다던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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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물리학자 4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슈뢰딩거의 양자 역학 위대한 물리학자 4
윌리엄 크로퍼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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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이 어렵다면 물리학자의 삶에 대한 책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이 위대한 물리학자시리즈를 몇 권 읽게 되었는데 특히 아인슈타인을 다룬 4권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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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시험 준비의 중압감 때문에 나는 큰 후유증을 앓았고, 시험에 합격한 뒤로 ... 거의 1년 동안 과학 문제에 대해 생각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교육 체계의 무거운 손이 학생의 지적 흥미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현대의 교육 방법이 성스러운 탐구의 호기심을 질식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기적이다. 이 섬세한 식물은 자극뿐만 아니라 자유가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군국주의와 국가주의를 싫어했다. “줄 맞춰 행진하면서 즐거워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를 충분히 혐오스럽게 만든다.”라고 그는 썼다. 그는 간디의 불복종이 희망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나는 진지한 진보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징집을 거부하고 전쟁에 대한 봉사를 거부하는 국제적인 규모의 단체가 조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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