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 거부 선언 - 폭력을 행하지도 당하지도 않겠다는 53인의 이야기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기획 / 교육공동체벗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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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體罰)은 몸에 주는 벌이다. ()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니 체벌은 정당한가? 죄지은 사람에게 벌주면 그 사람이 나중에 같은 죄를 짓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니까? 그러나 과연 그럴까? 몸에 벌을 받는다고 죄를 짓지 않을까? 그게 몸에 벌을 받을 만큼의 죄인가? 죄란 무엇인가?

 

힘센 이의 말을 약한 이가 안 듣는 게 죄이고, 힘센 이가 약한 이에게 주는 게 벌이다. 개가 사람의 말을 안 들으면 죄이고, 말 잘 들으라고 때리는 게 벌이다. 그러나 개가 사람보다 힘이 세면 오히려 사람이 죄를 짓고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체벌을 거부하는 것은 힘센 이가 약한 이에게 가하는 폭력을 거부하는 것이니, 힘센 이에겐 성찰이 될 것이요, 약한 이에겐 저항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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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생일 때, 강아지 조아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와 함께 생활한다는 건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다. 내 뜻대로 따라 주지 않는 조아에게 스읍소리를 내며 겁주는 일이나 손가락으로 콧등을 치는 일도 다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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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에서 - 어느 교사의 마지막 인생 수업
다비드 메나셰 지음, 허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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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공부하는 저희 입장에서 힘든 것을 이해해주시고 같이 잘못된 교육 방식에 대해 얘기 나눠주셔서 좀 통쾌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아요. 선생님 삶의 끝에서라는 책 읽어보세요. 선생님께 너무 추천해 드리고 싶어요

 

교원평가 학생만족도 조사에서 한 학생이 내게 써준 글이다. 이 책을 사서 읽어보니 놀랍게도 저자 메나셰랑 나랑 같은 게 많았다. 태어난 해가 같고, 부모님이 헌책방을 운영했던 점이 같고, 교직에 진출한 해도 같고, 국어교사란 점도 부부교사란 점도 같았다.

 

그러나 나머지는 너무 달랐다. 그는 너무 성실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출근해서 연달아 수업하고, 상담하고, 회의하고, 코치에 인솔자에, 집에 가서도 채점하고 다음 수업을 준비했다. 일이 곧 자신이었다. 나도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그랬지만 지금은 저녁이 있는 삶, 가족과 함께하는 삶을 중요시 한다. 저자에게 아이가 없었던 것이 일을 중시하게 된 요인일 것이다.

 

의미 없는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졸업한 제자들을 만나러 마이애미에서 캘리포니아까지 국토횡단여행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동행을 물어보나 아내는 거부한다. 여행 끝에 부부는 이혼하고 저자는 삶의 마지막을 제자들과 함께 한다. 저자는 책 말미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는데 끝까지 아내를 언급하지 않는다.

 

내게 이 책을 추천해준 학생의 의도는 아마도 내가 메나셰 선생님처럼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는 교사가 되길 바란 것이 아닐까? 그 뜻은 참으로 고마우나 사실 큰 부담이 된다. 나는 좋은 교사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좋은 아빠와 남편이 더 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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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생들이 제출한 에세이를 몇 시간이 걸리건 하나하나 꼼꼼히 읽고, 종이에 피라도 쏟은 것처럼 섬뜩하게 보일 때까지 빨간 펜으로 평을 열심히 적어주는 편이었다. 학생들이 에세이를 쓰는 데 시간을 들였으니 나도 그것을 읽고 더 나아지도록 도와주는 데 시간을 들이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의사들은 내가 치료 덕에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내가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내 일이었다. 학생들은 내 생명의 진수이자 나의 숨,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였다. 학교에 있으면 아프지 않았다. 가르침에 열정을 쏟아붓는 시간만이 존재했다. 암과 벌이는 싸움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사랑해마지않는 일을 그놈이 가로막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날, 나는 학교에 전화를 걸어 다시는 출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알렸다.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나아지시길 빌었는데 말이죠. 혹시라도 병세가 호전되면 언제든 돌아오십시오. 단 이 분간의 통화로 그렇게 허무하게, 일생을 바친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매일 첫새벽에 일어났던 이유가 사라져버렸다. “내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상대방도 그만큼 나를 그리워하는 거라고들 말하지만, 지금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만큼 당신이 나를 그리워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시인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시구가 떠올랐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벌써, 내가 가르쳐보지 못할 반들, 앞으로 만나보지 못할 학생들이 그리워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줄곧,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일이자 항상 해온 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일이 백만번도 더 남아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정말로 알았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사는 법을 배운다.

 

같이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폴라는 딱 잘라 거절했다. “우리는 각자 인생에서 원하는 게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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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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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에서 노동으로, 괴물에서 인간으로

 

차별에 찬성하는 이유는 차별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적이 좋으면 시험에 붙고 정규직이 된다.

성적이 안 좋으면 시험에 떨어지고 비정규직이 된다.

 

그러나 인생을 정규와 비정규로 갈라놓을 만큼 성적의 차이가 있을까?

그 성적은 과연 실력/능력일까?

그 실력/능력은 과연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것일까?

 

이십대를 괴물로 만든 사회의 기성인(교사)으로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회사를 경영할 사람보단 회사에서 노동할 사람이 훨씬 많은데 대학에 경영학과는 넘치고 노동학과는 없다. 경영을 중시하며 노동을 무시하는 구조를 뒤집어야 괴물된 이십대를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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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는 서강대를, 서강대는 성균관대를, 성균관대는 중앙대를, 중앙대는 세종대를 무시한다.

 

학교에서 수시 전형으로 합격한 사람들을 무시하기 일쑤다. ‘수시충이라면서 공공연하게 비하하기도 한다. 지역균형 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을 지균충이라 부른다.

 

오늘날 인문사회 계열 학과들은 망해가고 있는데, 경영학과는 나라에서 지원까지 받으며 커가고 있다. 대학 전체가 경영학과화되고 있으면 대학생 전체가 경영학적으로사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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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를 이기는 철학 -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공부법과 사고법
오가와 히토시 지음, 장인주 옮김 / 처음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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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굳이 AI를 이길 필요가 있을까? 인간의 일은 AI나 로봇에게 주고, 인간은 원래대로 놀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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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는 원래 인간은 노는 존재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토기보다 먼저 토우가 만들어진 것이고, 실용보다는 제사나 표현이 먼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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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제자도 - 한 길 가는 공동체, 브루더호프 사람들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 지음, 브루더호프 공동체 엮음, 원충연 옮김 / 홍성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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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더호프(직역하자면, 형제들)는 독일에서 시작되어 영국, 미국 등으로 퍼져간 기독교 공동체이다. 이 책은 부르더호프 설립자의 아들인 하인리히의 말을 엮은 것이다. 공동체는 수직적 '위계'가 아니라 평등한 '관계'로 살아간다는 뜻으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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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리더십은 섬김입니다. 이것을 악용하여 힘을 행사하는 건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 리더십의 남용이 교회 공동체에 특히 악한 일입니다. 형제자매라면 자발적으로 신뢰하며 마음을 열어 자신을 내어 주기 때문입니다. 독재국가라면 사람들은 더 큰 권력에 굽힐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들의 영혼이 그 권력이 악한 것을 알고 싫어하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를 신뢰하는 형제들의 공동체에서 리더십을 악용하는 사람은 영혼의 살인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권위를 말할 때, 그 권위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게 아님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위를 주셨지만,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위가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권위를 주셨습니다. 교회를 이끌라고 세워진 우리는 사람을 지배하는 권위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쉽게 잊혀집니다. 끊임없이 겸손을 추구해야 합니다.

 

말씀의 종(목사)은 혹여 잘못된 것을 가르치고 교회를 억압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모든 말씀의 종이 복음을 왜곡시키거나 바꿔치지 않고 늘 새롭게 교회에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책임 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권위로 형제자매를 부하처럼 다룰 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말씀의 종이 우두머리 행세를 하면 용기가 있어야 항의하거나 특별할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용기를 갖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어느 누구도 아닌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며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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