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이비어교회
유성준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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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서점에서 교회 공동체를 주제어로 검색을 하면 세이비어 교회란 책이 많이 팔린 것으로 뽑힙니다. 읽어 보니,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작은 교회

영국 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모임에서 서로 의미 있는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최대의 숫자가 150명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제자를 12명밖에 두지 않았는데 인간이 150명 이상을 공동체로 삼는 건 과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이비어 교회도 교인이 150명밖에 없습니다.

단지 적은 수만 모이는 것뿐이 아닙니다. 소규모로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는 목회자 뿐만이 아니라 평신도 역시 인도할 수 있습니다.

 

2. 지역과 함께 하는 교회

아무리 좋은 공동체라고 해도 자기들끼리만 좋으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않겠죠. 세이비어 교회는 지역 사회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를 합니다. 세이비어란 구세주[saviour]인데 마치 '비워'라고 말하는 것[say 비워]처럼 들립니다. 카페에서 커피잔을 들고, 술잔을 들고 말이죠.

 

3. 침묵하는 기도

한국의 개신교회는 통성, 방언 기도를 선호합니다. 그런데 저는 과거 천주교인이어서 통성, 방언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퀘이커들처럼 세이비어 교회에서는 침묵기도를 중요시합니다. 꼭 뭐가 옳다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만 각 기도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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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비어 교회가 단순히 교회성장에만 사역의 목적을 두었다면 오늘날 150여명 정도의 극히 적은 교인 수로 거대한 미국을 움직이는 영향력 있는 교회로 평가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세이비어 교회는 모든 사역에 있어 관상의 삶을 강조한다. 관상기도란 흔히 우리가 기도할 때 쓰는 기도문, 언어, 상상을 배제하고 우리의 감정, 의지, 감각 기관의 사용도 제한하며 오로지 하나님과 친밀히 사귀는 기도이다. 세이비어 교회에서는 이러한 관상기도를 통해 나를 철저히 비우고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설 수 있도록 기다리는 침묵의 기도를 훈련을 통해서 실시하고 있다.

 

세이비어 교회의 지역 사회를 위한 첫 번째 사역이 토기장이의 집 사역이다. 세이비어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사역에 의존하지 않는다 내가 속한 지역사회로 나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조그만 카페 겸 서점인 토기장이의 집이다.

이곳은 세이비어 교회가 지역사회 사역을 위해서 세운 곳이니만큼 낮에는 카페로, 저녁에는 모임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교회 사역과 연관된 공연들, 소그룹 모임들과 예배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세상의 한복판에 세워져 있으니 대중에게 다가가고 그들과 함께 나누는 이곳이야 말로 진정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인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비록 두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그룹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아래 교회를 세울 수 있다. 세이비어 교회의 소그룹 사역공동체는 그런 의미에서 각자 독립성을 가진 교회 내의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모임은 기존 교회의 주일 예배에 참석할 수도 있으며 혹은 소그룹이 스스로 예배를 준비하여 드릴 수도 있다. 이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제사장의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내와 믿음을 가지고 찾는다면 성직자 중에서 혹은 평신도 중에서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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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영성의 향기 - 종교 너머에 있는 우리가 사모하는 교회
김난예.정원범 지음 / 대장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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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영성의 향기는 작년에 우리 공동체에 강의를 하러 오신 정원범 교수님이 김난예 교수님과 함께 쓴 책입니다. 브루더호프, 아미쉬, 퀘이커 공동체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공동체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함께 사는 것뿐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공감하며 사는 것입니다. 금전적으로 일체의 사유재산을 없애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내 것을 우리 것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평등합니다. 상하의 위계가 있는 게 아니라 좌우의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목사나 대표자는 공동체 식구 중에서 추첨이나 투표로 뽑히고, 가장 낮은 곳에서 공동체 식구들을 섬겨야 합니다.

 

예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주일에 한번 예배 드리면 주중에 지은 죄가 모두 용서받을 것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모든 삶이 예배가 되어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도록 살아야 합니다. 굳이 만나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서로 격려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작은 규모로 모여서, 특정한 몇몇의 일방적 설교가 아니라 모두가 빠짐없이 자신의 일상을 고백해야 합니다.

 

노동을 교육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공동체 모든 식구들은 매일 노동의 신성함을 몸소 느껴야 합니다. 또한 학교 교육도 그러한 노동을 교육하는 것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먹고 살 수 있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동을 몸소 실천하고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강요하지 말고 덮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남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성경 대로 살라고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살면 자식도 그렇게 되고, 세상 사람도 그렇게 됩니다. 잘못에 대해 덮어주거나 뒤에서 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되도록 그 사람이 있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얘기하고, 그 사람 없는 곳에선 얘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적인 비판과 사적인 비난은 구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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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엘륄은 다음과 같이 종교로 변질된 기독교를 비판한다.

첫째, 엘륄은 기독교가 권력과 결탁되면서 종교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기독교는 권력계층들과 결탁하면서 복음의 소중한 가치들을 잃어버리고 대중화의 길을 걸어갔다. 본래 복음은 기독교의 탁월한 혁신, 은총, 사랑, 박애, 생명체에 대한 염려, 비폭력, 사소한 것에 대한 배려, 새로운 시작에의 소망과 같은 여성적인 가치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정복과 권력과 지배의 가치를 채용하면서부터, 즉 권력과 결탁하면서부터 그러한 소중한 가치들을 잃어버렸다.

둘째, 엘륄은 교회가 제도가 되고, 교회의 조직이 계급제도로 이루어지게 되면서 기독교가 종교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제국의 종교가 되기 이전 고대교회는 교인들 간에 평등한 사랑의 사귐이 있었고, 교회 안에서와 밖에서 자신의 것을 서로 나누어 살았던 사랑의 공동체였다. 그러나 교회에 교인들이 늘어나고 부자들, 권력자들이 많아지고 돈이 풍부해지면서 필요에 의해 제도가 만들어졌고, 그 제도는 제국 제도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직분의 계급화, 권력화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계급적으로 우월한 자가 계급적으로 열등한 자를 섬겨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엘륄은 주장한다.

셋째, 엘륄은 기독교가 성공주의와 결탁되면서 종교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한다.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확장에 성공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고 황제의 가족과 정부의 지배계급까지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렇게 기독교는 성공했으나 그와 동시에 복음적인 삶이 왜곡되는 비극이 생겨났다. 이에 대해 엘륄은 이렇게 비판한다. “복음을 확장하려 애쓴 덕분에 기독교는 결국 성공했고 일단 한번 성공하자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계속적인 성공의 갈망을 가져왔고, 기독교인도 이 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사회가 기독교에 의해 뒤집히기는커녕 오히려 기독교가 뒤집혔다

 

참여적 영성의 뿌리는 예언자들의 사역에서 찾을 수 있다. 예언자들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었다.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보면, 그들의 관심은 사회변혁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를 폭로하고 심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권력자들이 정의롭게 다스리지 못하고 불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고 선포했다. 이것은 기독교 영성이 처음부터 사회 도피적이지 않고 사회 참여적이며 동시에 불의에 저항하고 사회를 변혁하려는 참여적이며 저항적 영성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감동적인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성경 말씀, 특히 개념적 선언을 뽑아 그것을 설명하거나 설교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성경의 한 신앙 사건에 부딪혀 거기서 스스로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을 다른 사람에게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삶은 공동 소유와 공동 노동의 삶이다. 그들은 개인 물건을 소유하지 않으며, 그들의 공동재산도 공동체 전체의 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해 쓰인다. 일단 멤버가 되기로 결정하면 모든 소득과 재산을 공동체에 자유롭게 헌납한다. 그 대신 공동체는 음식과 숙소와 의료 서비스 등 모든 생활 전반을 책임진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신앙과 일상생활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과 기도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로만 기도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위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노동은 예배의 한 형태이다.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손자인 크리스토프 아놀드는)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고, 삶을 사랑했던 그는 지적인 대화보다는 소시지와 맥주를 나누며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주일예배는 주기도문 암송과 찬송가, 설교 등으로 이어지는 예배 틀이 없다. 노래는 많이 부르지만 일방적 전달식 설교가 없고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자신들의 신상이나 생각을 나눈다. 예배나 기도를 위한 별도의 시간 속에서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사랑을 나눔으로써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고 있다는 그리스도의 말을 증거하는 것이다.

 

부모로서 아이들을 하나님께 이끄는 방법 중 한 가지는 종교적 가르침을 억지로 주입하지 않고 부모의 신앙을 자녀가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부모의 신앙이 정말 살아있는 것이라면 자녀에게 신앙을 전하는데 굳이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부모의 신앙을 몸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학교과정을 모두 마친 아이들은 1년 동안 공동체에 남아 자신들의 진로를 고민하며 공동체의 다양한 일터에서 일을 배운다. 재봉, 요리, 전기기술, 농업, 공업, 건축 등 작은 심부름부터 시작하여 작은 책임을 지게 된다. 그 이후로는 대학 과정이나 기술학교에 들어가게 될지 공동체와 부모와 상의하여 결정하게 된다.

 

공동체 학교에서는 직접말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험담이 없다. 잘못 했을 때도 공동체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상대가 문제가 있다고 여기더라도 뒷담화하지 않고, 상대방 앞에서 직접 솔직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공동체라고 하여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공개적으로 치리를 받고 침묵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은 전도를 전혀 하지 않는데도 산아제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미쉬 인구는 1890년 이래로 꾸준히 성장세를 보이며 10년마다 30~48%씩 늘어나고 있다.

 

아미쉬 공동체는 살아가는 일상자체가 예배이고 집과 밭이 교회이며 쟁기질하고 소치는 일이 기도이고 기독교인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읽는 유일한 성경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주일 예배는 과거에 격주로 한 번씩 교구 내 교인들의 집을 돌아가며 드리고 각 가정은 보통 1년에 1번 정도 자기 집에서 전체 예배모임을 가졌으나 지금은 조금 자유로워지고 있다. 그들이 교회 건물을 짓지 않고 교인들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신께서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한다는 사도 행전 1724절을 따르는 것

 

예배는 성별과 나이에 따라 앉으며 한 명의 설교자가 2~30분간 설교를 하고 성경이 낭독되면 또 다른 목사의 설교가 약 한 시간 정도 이어진다. 목사는 사전에 준비한 원고 없이 설교를 하지만 설교 중에 눈이 촉촉하게 젖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설교가 끝난 뒤에는 설교에 대한 보완 설명과 의견 교환 등의 시간을 가지며, 다시 이어지는 기도와 성경 낭독, 찬송 순으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목사는 교구별로 교회 모임에서 추천받은 자 중에서 제비뽑기로 선출한다. 아미쉬 공동체에서 목사가 되는 것을 영예로운 일로 여기지 않으며, 목회에 대한 급여 등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는다. 오히려 무겁고 힘든 책임이 뒤따르는 사역이므로 성인침례를 받을 때 언젠가 자신이 제비뽑기에 의해 목사로 뽑힐 경우 기꺼이 목사의 직분을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해야 한다.

 

아미쉬 가정에서는 종교교육과 신학적 성찰은 거의 하지 않고, 겸손히 원칙에 따라 조용히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며 자녀들도 그렇게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학교는 주로 한 학급 학교에서 1명의 선생님이 8학년의 모든 아이들을 가르치며 학교에는 JOY(Jesus first Others next Yourself last)라는 표어가 걸려 있는 곳이 있다 . ‘예수님 먼저, 그 다음에 다른 사람, 너 자신은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학교수업은 1시간 30분짜리 수업 4교시로 이루어지고 종교는 따로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지식의 원천으로서 이미 그들의 교과서에 녹아있고 종교의식은 학교의 일상생활에서 행해진다.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은 아미쉬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되어 간다. 공동체 외부 세상으로 나가 아미쉬 공동체 내에서 금기시 되어있는 일들을 직접 경험해 보거나 겪어보지 못한 일상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탐색의 기간 럼스프린가를 갖는다. 19~21세 정도에 럼스프린가를 마치고 돌아온 젊은이들은 아미쉬 공동체를 벗어나 외부세계로 나갈 것인지 혹은 교회의 정식 멤버가 되어 아미쉬로 살아가기 위해 침례를 받고 공동체에 남을 것인지 결정한다. 아미쉬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모두 침례를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길 간절히 바라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예배 장소는 특정한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고, 특별히 제작된 강단이나 화려한 꽃장식이 없으며, 대표기도도 없고, 찬송도 하지 않는다. 음악적 기구는 물론 화려한 음악도 없다. 의식적인 예배의식이나 예배를 인도하는 별도의 성직자나 목사도 없으나 2~3년마다 선출되는 대표가 행정을 받아 여러가지 일들을 알려준다.

퀘이커들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가 머리됨을 믿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라 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곳을 교회라 하지 않고 meeting-house라 불렀고 예배를 Friends Meeting이라 하였다.

퀘이커 공동체는 하나님 앞에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고 고백하여 예배 시간에 여성들도 자유롭게 자신들의 신비적 경험을 증언하였으며 초기부터 여성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영혼이 없는 설교가 난무하는 기성교회에 비해 특정한 예배 의식과 설교가 없는 퀘이커들의 침묵기도에는 성직자나 목사도 없고 설교도 없지만 자신의 역할에 따라 세상을 살며 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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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3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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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건 참으로 소중한 단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자유당이란 단어들 때문에 이 단어가 오용되었다. 마치 태극기 부대 때문에 태극기가 그렇게 되었듯.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란 아흔아홉개를 가진 사람이 나머지 한개를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백개를 채우는 자유다. 남의 자유를 빼앗는 자유는 자유의 탈을 쓴 구속일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는 남의 자유를 빼앗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의미한다. 이 책을 읽고, 오염된 단어 자유를 하얗게 표백하자. 혹시 이왕 물들거면 김남주의 자유에 물들라.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김남주 -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

 

<밑줄>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 - 개인이든 집단이든 -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본인 자신의 물리적 또는 도덕적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간섭하는 것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거나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또는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거나 옳은 이유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슨 일을 시키거나 금지시켜서는 안 된다. 이런 선한 목적에서라면 그 사람에게 충고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며, 설득하면 된다. 그것도 아니면 간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강제하거나 위협을 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 행동을 억지로라도 막지 않으며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을 하고 말 것이라는 분명한 근거가 없는 한, 결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에 한해서만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이 당연히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몸이나 정신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권자인 것이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억압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행위가 현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 그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반대하는 사람에게까지 - 강도질을 하는 것과 같은 악을 저지르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의견이 옳다면 그런 행위는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설령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것은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시킴으로써 진리를 더 생생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대단히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막강한 권력자나 절대적인 복종에 익숙한 사람들은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에 빠지기 쉽다. 어떤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 막무가내로 그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도 주변 사람이나 자신이 습관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에 대해서는 똑같이 절대적으로 집착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에 자신감이 없으면 없을수록 일반적인 의미의 세계의 완전함에 암묵적인 믿음을 가지고 더욱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 정당, 집단, 교회, 계급 등이 모여 이 세계를 구성한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어찌나 단단한지, 다른 시대나 국가, 다른 집단이나 교회, 계급 그리고 정당 등이 자기 집단과 정반대로 생각해왔고 심지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이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가 현재에 의해 부정되듯이 현재는 미래에 의해 번복될 것이다. 그래서 현재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생각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폐기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의심쩍어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습관화하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대한 믿음을 튼튼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예수의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대제사장은 자신의 옷을 갈가리 찢었다. 그가 사는 나라의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최악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대제사장도 오늘날 종교와 도덕의 영역에서 존경받는 수많은 경건한 사람들 못지않게 공포와 격노의 감정을 지닌 진지한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비난하짐나, 그들도 대제사장이 살았던 시대에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면 그와 똑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정통 그리스도 신자들은 최초의 순교자를 돌로 쳐 죽인 사람들이 자신보다 훨씬 못된 자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범죄를 저지른 인간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기존의 생각이 틀리지 않고 옳은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라도 이 진리에 대해 자유롭게 열린 토론을 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따져보자. 고집 센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비록 자기 생각이 옳다 하더라도 충분히 자주 그리고 기탄없이 토론을 벌이지 않을 경우 그것은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니라 죽은 독단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자유 토론이 없다면 단순희 그 주장의 근거만 아니라,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도 모르게 된다. 그 주장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특별한 생각을 담아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처음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의 일부만을 옮길 수 있을 뿐이다. 생생한 개념과 분명한 확신 대신에 그저 기계적으로 외운 몇 구절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 의미를 둘러싼 몇몇 껍데기는 남을지 몰라도 정말 중요한 본질은 잃고 만다.

 

세상의 진리 가운데는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며 그 참뜻을 제대로 알기 어려운 것이 많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잘 아는 사람들이 모여 찬반토론을 벌이고 모르는 사람들도 이것을 경청했더라도 그 뜻을 더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된 것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훨씬 더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안이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면서 그 문제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악습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의 절반은 그런 버릇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장일치가 없어야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그렇다면 진리를 얻기 위해 누군가가 틀린 주장이라도 억지로 고집을 부려야 한다는 말인가? 어떤 의견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면, 그 순간 그 의견은 중요하고 참된 진리로서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건가? 무엇인가 의심할 여지가 있어야 그것이 완전히 이해되고 체감될 수 있다는 말일까?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진리는 사라진다는 걸까?

 

우리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입장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한 진리에 대해 더 생생하고 깊게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진리가 보편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이런 소중한 기회를 잃게 된다면, 그로 인해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는 것도 만만치 않다.

 

만약 일반적인 통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법이나 여론이 이의 제기를 허용할 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데, 또는 그 믿음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다면 아주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래준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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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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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박완서 작가는 구리시 아치울에 사시던 이이화 선생에게 한문을 배운 것이 인연이 되어 아예 그 동네에 집을 짓고 살다가 13년 만에 돌아가셨다. ‘호미는 그 시기에 쓴 수필집이다. 돌아가신 후에 따님이 어머니의 글을 묶어낸 노란집이란 산문집도 바로 그 아치울 마당 있는 집에서 썼다고 한다. 마당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 마당이 있는 곳에서 돌아가셨다. 그 마당 속의 꽃이 피고 지고, 열매가 맺고 떨어지고, 심지어 잘라낸 나무의 그루터기에서 새 가지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 순환 속에서 돌아가셨으니 말 그대로 돌아서 가셨을 뿐이다.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다.

이 작품집에서 꽃 출석부 1’이라는 수필 한편이 교과서에 실렸다. 학습목표는 글에서 공감하는 부분을 찾는 거다. 공감을 하려면 같은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조언을 했다. “학습목표를 달성하려면, 즉 중간고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려면...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아야 해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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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잎만 그렇게 무성할 뿐, 이듬해 봄에도 꽃은 피지 않아 나를 안타깝게 했고, 나는 또 나무에게 말을 걸게 되었다. 미안하다고, 너를 죽이려 한 것도, 너의 꽃을 싫어한 것도 사과할 테니 내년에는 꽃 좀 피라고 자꾸자꾸 말을 시켰더니... 그래서 나는 요새도 나의 목련나무에게 말을 건다. 나를 용서해주서 고맙고, 이 엄동설한에 찬란한 봄을 꿈꾸게 해줘서 고맙다고. (박완서 -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 )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혹은 누군가가 거두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박완서 - 돌이켜보니 자연이 한 일은 다 옳았다 )

 

70년은 끔직하게 긴 세월이다. 그러나 건져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은 허망감을 시냇물 소리가 다독거려준다. 다행히 집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그 물소리는 마치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성직자의 설교보다도 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준다. (박완서 - 다 지나간다 )

 

나는 그래서 살구나무가 좀 미워지더라도 라일락 쪽으로 뻗은 가장귀를 왕창 잘라낼 목적으로 튼실한 받침대 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가장귀를 끌어당겨만 놓고 차마 잘라내지 못했다. 나무의 체온이랄까, 살아 있다는 유연함, 피돌기 같은 수액의 움직임, 그런 게 생생하게 느껴질 뿐 아니라 가지마다 다닥다닥 붙은 돌기는 내년 봄에 터뜨릴 꽃망울의 시작이 아닌가. 살구꽃도 벚꽃도 매화도 우리 눈엔 어느 날 갑자기 활짝 피어나는 것 같지만 이렇게 미리미리 준비를 하는구나. 꽃망울이 얼어죽지도 말라죽지도 않게 보호하고 견디어내야 하는 겨울은 나무들에게 얼마나 혹독할까. 숙연해지는 한편 내년에도 살구꽃을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칠십 고개를 넘고 나서는 오늘 밤 잠들었다가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아도 여한이 없도록 그저 오늘 하루를 미련 없이 살자고 다짐해왔는데 그게 아닌가. 내년 봄의 기쁨을 꿈꾸다니...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는 기능이 남아 있는 한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로구나. (박완서 - 만추 )

 

올해는 복수초가 1번이 되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산수유가 1번이었다. 4월이 되면 목련, 매화, 살구, 자두, 앵두, 조팝나무 등이 다투어 꽃을 피우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날짜를 달리해 순서대로 피면서 그 그늘에 제비꽃이나 민들레, 은방울꽃을 거느린다. 꽃이 제일 먼저 핀 것은 복수초지만 잎이 제일 먼저 흙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상사초고 그 다음이 수선화다. 수선화는 벚꽃이 필 무렵에나 필 것 같고 상사초는 잎이 시들어 지상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더 있다가 꽃대를 밀어올릴 것이다. 이렇게 그것들을 기다리고 마중하다 보니 내 머릿속에 출석부가 생기게 되고, 출석부란 원래 이름과 함께 번호를 먹이게 되어 있는지라 100번이 넘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름을 모르면 100번이라는 숫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이 순서를 지키지 않고 멋대로 피고 지면 이름이 궁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출석을 부르지 않아도 그것들은 올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것들이 올해도 하나도 결석하지 않고 전원출석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것들이 뿌리로, 씨로 잠든 땅을 함부로 밟지 못한다. 그것들이 왕성하게 자랄 여름에는 그것들이 목마를까봐 마음 놓고 어디 여행도 못 할 것이다. 그것들은 출석할 때마다 내 가슴을 기쁨으로 뛰놀게 했다. 100식구는 대식구다. 나에게 그것들을 부양할 마당이 있다는 걸 생각만 해도 뿌듯한 행복감을 느낀다. 내가 이렇게 사치를 해도 되는 것일까. 괜히 송구스러울 때도 있다.

그것들은 내가 기다리지 않아도 올 것이다.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기다리는 기쁨 때문에 기다린다. (박완서 - 꽃 출석부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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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함께 A학점을 - 시험 잘 보며 세상 바꾸기
버텔 올먼 지음, 김한영 옮김 / 모멘토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영리(怜悧)한 사람은 사적인 영리(營利)를 추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자는 영리한 사람치곤 사익보다 공익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똑똑하면서도 착할 수 있다니 참 대단하고 부럽다. 닮고 싶다.

학생들은 사적 이익에 관심이 많은데 그걸 아무리 탓한들 소용이 없다. 저자처럼 제자들과 거래(?)를 해야겠다. 성공시켜 줄테니 사회에 보답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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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학생이 꿈에 그리던 시험이 있다. 열 개의 오엑스 문제에서 모든 정답이 오라는 걸 미리 알고 있는 시험. 답을 깜빡 잊었더라도 모든 정답이 문제지 뒷면에 적혀 있는 시험. 시험을 망쳤어도 합격할 때까지 종일 되풀이하여 볼 수 있는 시험. 바로 이것이 미시건 주에서 권총 소지 허가를 받기 위해 보는 자격 시험이다. 그래서인지 이주에서 가장 큰 도시 디트로이트는 미국의 살인 수도라 불린다. 여러분이 치르는 모든 시험이 이런 식이라면 당장 이 책을 집어 던져도 된다. 그게 아니라 이제부터 내가 알려줄 시험 요령들은 아주 유용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고, 조건이 하나 있다.

나는 학생 시절에 시험을 수백 번 봤고, 교수로 재직한 35년 동안 그보다도 많은 시험을 출제했다. 그러는 사이 시험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런 것들을 가르쳐 줄 마음이 별로 없다. 이것이 문제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자본주의, 즉 우리 사회의 부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체제가 어떤 것인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 것인데, 그 주제에 끌리는 학생은 아마도 별로 없을 테다. 하지만 시험에 관한 나의 도움말은 듣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래를 하자. 이게 조건이다.

여러분이 나의 자본주의 이야기에 귀를 열어준다면, 시험을 최대로 잘 보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점들을 말해주겠다. 이 책은 우리의 거래가 될 것이다.

 

채점은 얼마나 주관적일까? 1912년 대니엘 스타크와 에드워드 엘리엇은 200명의 고등학교 교사에게 두 편의 영어 과목 리포트를 보내 채점을 의뢰했다. 그중 142편이 채점되어 돌아왔는데, 한 리포트의 점수 폭은 50~99, 다른 리포트의 점수 폭도 64~99점이었다. 영어는 객관적인과목이 아니니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그러나 교사들은 수학에 관한 논술형 리포트에도 그렇게 점수를 매겨, 점수 폭이 28~95점에 이르렀다. 두 경우 모두 대부분의 점수는 중간에 몰려 있었지만, 아무튼 시험 점수라는 건 대체로 누가 시험을 보았느냐보다 누가 시험을 채점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분명해졌다.

더 심각하다고 볼 문제가 있다. 다른 연구들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똑같은 선생님이라도 채점할 때의 기분에 따라, 하루 중 어느 때에 채점하느냐에 따라, 직전에 본 답안이 얼마나 좋거나 나빴는지에 따라(아주 뛰어난 답을 채점한 직후에는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대개 낮은 점수를 준다), 그리고 맨 처음에 채점하느냐 마지막에 채점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단답형 시험이 논술시험보다 객관적이라고 결론짓지 않기를 바란다. 채점만을 놓고 보면 단답형이 객관적이라 할지 모르지만, 교수의 편견들은 이미 문제의 선택에서부터 그 표현방식, 그리고 선다형 문제의 경우 제시된 선택지의 수와 유형에까지 녹아들어있다. 또한 출제자는 논술시험이 아닌 단답형 시험을 선택한 것만으로도 획일성을 선호하고 창조성과 다향성을 멀리하는 자신의 편향을 드러낸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들 나눠줄 때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 부른다. 그들은 왜 가난할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라 부른다.” 브라질의 대주교였던 엘더 카마라의 말이다.

 

사회적으로 모든 중요한 자리가 혈통에 따라 분배되었던 봉건제와 비교할 때, 자본주의와 함께 출현한 시험 제도는 중대한 발전이었다. 기회의 평등이 전무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 얼마간의 기회의 평등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있다.

1) 현재의 시험 제도는 평등보다는 불평등이 일반화한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 관계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2) 시험, 특히 이토록 많은 시험이 교육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바는 무엇인가?

3) 시험의 주된 기능은 사회의 승자를 선발하는 것인가, 아니면 수가 훨씬 많은 패자들로 하여금 미래의 가혹한 운명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는 것인가?

4)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시험이 없는 교육은 어떤 모습이고, 그런 개혁을 가능케 하려면 그 밖에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야 하는가?

 

미국에서 해마다 살인 사건으로 죽는 사람은 19000명인 데 비해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은 56000명으로, 다른 공업국보다 월등히 많다. 그런데도 미디어에선 온통 살인 사건 이야기만 늘어놓지, 일과 관련된 사망과 부상에는 지면과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않는다.

 

20만명이 응시하는 경영대학원입학시험(GMAT)에 나오는 두개의 논술문제가 이미 기계로 채점되었다. ‘-레이터(E-rater)’라고 불리는 이 채점 기계는 대체 어떤 것인가? 관계자들도 인정하듯이, 분명 창조적 사고를 평가하는 건 아니다. 그 시험을 주관하는 회사의 한 대변인은 사고의 체계성과 구문론적 구조를 평가한다는 했는데, 카플란 교육센터(각종 시험준비 전문 대기업)에서는 이 기준에 맞춘 답안 작성 요령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1) 선명한 개요로 시작한다(체계적인 답안이라는 증거) 2)‘그러므로’, ‘~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따위 연결 어구들을 많이 사용한다(글 구조가 잘 짜인 답안이라는 증거) 3)동의어를 풍부하게 사용한다(어휘력이 강하다는 증거)

 

우리의 자본주의 사회는 한 손으로 법적 권리를 나눠주고는 다른 손으로 그걸 빼앗는 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예를 들면, 우리 각자에겐 하고 싶은 말을 할 권리가 있고, 그걸 표현의 자유라 부른다. 다만 주요 미디어의 지면을 살 만큼 큰 돈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내 말을 전하기가 어려울 따름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물론 언론은 자유롭다. 언론을 소유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오늘날 대부분의 수업은 시험 위주가 되고, 학생들의 합격을 돕는 수단이 되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무엇을 배웠느냐가 아니라 그걸 배웠다는 증거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교수들은 가르치는 역할보다는 시험 코치나 트레이너 노릇을 더 많이 한다.

 

그래, 자유시장은 부당하고, 불공평하고, 비민주적이고, 심지어 자유롭지도 않을 수 있어. 하지만 어쨌든 경제적으로 볼 때 계획경제보다는 효율적이잖아?” 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현 제도하에서 외부비용으로 간주하는 모든 것, 즉 광고와 관련된 비용, 수백 수천만 노동자와 소비자의 건강을 좀먹고 환경을 오염하는 것과 관련해 발생하는 비용 따위를 다 제외한다면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것 말고도, 소유주에게 충분한 이익을 남겨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많은 기계와 원자재와 노동력을 가동하지 않고 버려둘 때 발생하는 엄청난 낭비가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찬양하는 이들은 저 모든 불필요한 낭비와 비용을 절대 고려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이 물질적 궁핍의 위험에 직면했을 때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이게 노동자에겐 좋기만 한 일도 아니다)에만 초점을 맞출 따름이다.

 

사장이 고용인에게 말한다. “젊은 친구, 이 회사에서 아주 빠르게 출세했군. 2년 전 사환으로 시작해서 두 달 뒤 사무직원이 됐고, 판매요원, 부지배인, 지배인을 거쳐 어느덧 부사장이네. 소감이 어때?” 고용인이 대답한다. “고마워요, 아빠.”

 

1830년대 초에 미국을 두루 여행한 프랑스의 젊은 귀족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한 겨울에 교향에서 쫓겨나는 것을 목격했다. 노인들, 아이들, 병자들도 눈밭에서 얼어 죽었다... 10년 후 미국은 멕시코의 3분의 1을 빼앗았다... 1898년 팽창하는 미 제국에 쿠바와 필리핀을 포함시키기 위해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다... 베트남 전쟁은 삼사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세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1990년 미국 정부는 가장 정교한 무기들을 사용해 수십만 명의 이라크인을 죽였다...1998년 유고슬라비아가 일부 국민을 학대한다는 이유로 폭격을 당했다... 지금도 우리의 돈과 군사고문들이 페루와 콜롬비아의 파시즘 군대를 돕고 있다.(불과 얼마전까지도 니카라과,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인도네시아, 칠레, 브라질의 군대를 도왔다) 그런 가운데 군사 파시즘 정권들은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우겨주는 그들의 정부를 지킨답시고 수천 수만의 자국민을 고문하고 살해하고 몰래 내다버렸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큰 거짓말이론을 소개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작은 거짓말들을 하고, 그래서 그런 거짓말을 들을 때 쉽게 알아챈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아주 큰 거짓말을 할 정도로 대담하거나, 다른 사람이 그렇게 큰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냉소적인 사람은 별로 없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작은 거짓말보다는 아주 큰 거짓말을 하고 무사히 넘어갈 확률이 더 높다. 이 교훈을 실제로 적용한 사람은 히틀러뿐이 아니었다. 역사상 가장 큰 거짓말이자 어쩌면 그 때문에 가장 성공적일 수 있었던 거짓말 중 하나는 미국 정부의 대외 정책이 인권 보호와 민주주의의 확산, 그리고 자유 수호를 지향해 왔다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철학자였던 크세노폰의 저술 키루스의 교육에는 사상 최초의 시험 중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오래지 않아 페르시아의 유명한 왕이 될 키루스가 열 살쯤 났을 때였다. 선생님이 다음과 같은 문제를 냈다. 너에게 너무 큰 소매 없는 외투(당시에 주로 입던 겉옷)가 있고, 너보다 나이가 많은 어느 소년이 너무 작은 외투를 입고 있다면 어떡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선생은 물었다.

키루스는 식은 죽 먹기라 생각했을 테고, 그래서 즉시 대답했다. “물론 그와 외투를 교환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 둘 다 몸에 맞는 옷을 갖게 될 테니까요.” 이 대답을 듣자마자 선생은 채찍을 꺼내(당신 선생들의 일반적인 도구였다) 키루스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외쳤다. “틀렸어. 너의 외투는 네 것이고, 그의 외투는 그의 거야. 각자 자기의 것을 갖고 있어야 해.”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유재산을 존중하라. 아무튼 예전부터 어떤 말이든 채찍질을 곁들이며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 곧 상식을 물리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더 세련된 방법들이 나와서 선생님들의 채찍질이 조금 완화됐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키루스의 외투 이야기는 시험의 원형, 훗날 모든 시험의 패러다임이 된다. 그 주된 목표는 학생들이 얼마만큼 아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적 소유와 (그것이 만들어내고 필요로 하는) 계급적 관계가 핵심가치인 사회에서 살아가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1950년대 중반 내가 위스콘신 대학교를 다닐 때 미국재향군인회는 미국적 생활양식에 비판적인 책들을 너무 많이 소장하고 있는 대하 도서관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그 표현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편지를 재향군인회에 써 보냈고, ‘미국주의를 위한 주위원장으로부터 미국적 생활양식이 무엇인지 자신도 잘은 모르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확신할 수 있었던 한 가지는, 그가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유도 모르는 채 죽고 죽이거나 남들을 도살장으로 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항상 있는 듯한데, 이런 사람들을 흔히 애국자라 부른다.

 

시험공부를 할 때 수면은 얼마나 중요할까? ‘인지신경과학저널’(20003월호)은 기억력 향상과 충분한 야간 수면 사이의 뚜렷한 연관성을 입증하는 연구 논문을 게재했다. 8시간 잠을 잔 학생들이 시험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냈다. 또한 잠을 많이 잔 학생들은 적게 잔 학생들보다 사실뿐 아니라 기술도 더 오래 기억했다. 연구를 주도한 하버드대 교수 로버트 스틱골드는 심지어 이렇게 주장했다. ‘다음 날 시험을 다시 보도록 했을 하버드대 학생들이 얼마나 좋은 결과를 내는냐는 그들이 졸업한 예비학교나 수능시험 성적, 또는 노력의 정도에 달려있지 않았다. 대체로 그보다는 얼마나 잘 잤느냐에 의해 좌우됐다

 

뉴어크의 고등학교 교장인 조 클라크는 학교를 평화롭고 조용하게 만들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해결책은 말썽꾼들을 전부 쫓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조치 때문에 주변 지역의 범죄율은 증가했다. 그 말썽꾼들이 학교 밖에서 말썽을 피웠기 때문이다. 사회적 문제의 해결에 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선호하는 방식도 바로 이런 식의 의자 빼앗기 놀이다.

 

작은 정부, 긴축재정, 개인의 책임, 가족의 가치 같은 보수주의의 덕목들은 어떠한가? 글쎄, 보수주의자들이 이런 것들을 들먹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 대부분에게 이는 치부를 가리는 무화과나무 잎이고, 그들의 선거강령 제정을 담당한 홍보 회사가 짜 맞춘 설교에 불과하다. 이른바 보수주의자중 거의 누구도 자기네 이익에 도움이 되는 정부 확대에 반대하지 않고, 정부 지원금을 받는 쪽이 자기들일 때 그걸 거절하지 않는다.

 

성적과 돈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잔인한 강도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다 자기 집 쇠침대에 누이고는 그 크기에 꼭 맞게 만들었다고 한다. 키가 큰 사람은 다리를 자르고 작은 사람은 늘리는 식이었다. 돈과 성적도 우리 사회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역할을 한다. 돈은 서로 아주 다른 물건들을 가격을 가지고 비교할 수 있게 한다. 성적은 아주 다른 사람들을 글자 하나로 비교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어떤 것에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고 나면 그것의 다른 특질들은 훨씬 사소해지고, 종종 완전히 무시된다. 이와 똑같이, 우리가 누군가를 'A', 'B' 또는 'C' 학생으로 규정할 때 그의 개성적 특질들은 사소해지거나 무시된다.

상품화란 물건이 가격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의식주 등 구체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물건들이 시장에 이르고 나면 주로 가격을 기준으로 고려되고 평가된다. 성적은 학습 과정의 상품화를 상징한다. 화폐가 그것으로 살 수 있는 온갖 다른 상품들을 대변하듯이, 성적은 온갖 종류와 수준의 지식을 대변한다. 성적은 엄청나게 다양한 인간 재능과 성과를 단 하나의 차원(테스트의 대상)으로 환원하여 측정한 다음, 결국 학생과 교사, 일반 대중의 의식에서 그것을 대체한다. 그러니 학생들이 종종 병적으로까지 성적에 신경을 쓰며, 그 증상이 돈에 대한 탐욕과 아주 흡사하다는 사실도 전혀 놀랍지 않다.

성적은 단순한 통제 수단을 넘어, 학업의 예속화 과정이 완료되었다는 표시다. 그리하여 성적은 지배관계가 피해자들 자신에 의해 수행되는 형식이 되었는바, 학생들의 웃웃 가슴에 꿰매어진 노란 별(나치가 유대인들의 상의에 붙이도록 한 다윗의 별)을 올림픽 금매달처럼 여기도록 격려받는다.

 

일본은 시험에 미친 나라다. 학생들은 방학이 끝나자마자 9월에 큰 시험을 치르고, 네다섯 차례 더 시험을 본 후 초여름에 또 한 번 시험을 치른다. 학생들은 이런 일을 매년 반복하다 아주 중요한 시험을 통과한 후 대학에 들어간다. 시험 성적이 성공을 크게 좌우하는 제도하에서 사설 입시학원 산업이 엄청난 규모로 발전했다. 수백만의 학생이 매일 방과 후 학원엘 가고, 많은 가정이 비싼 학원비 때문에 큰 빚에 시달린다. 교육의 모든 단계에 각기 대비하는 학원들이 있고, 심지어 유치원용 학원까지 있다. 학원이라고 다 같지 않고 실적이 뛰어난 학원이 따로 있기 때문에, 더 좋은 학원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에 대비하는 학원도 있다.

이런 시험들은 대부분 단순 암기를 요구한다. 생각할 필요가 거의 없으며 비판은 더욱 없다. 당연히 이 모든 상황의 최종 결과물은 다음 퀴즈쇼에서 좋은 성적을 낼 준비가 되어 있는, 규율이 잘 잡히고 상상력 없고 자살 경향이 있는 수재들이다(일본 TV에서 퀴즈쇼가 최고의 인기 프로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해 여러분이 일본 학생들에게 과도한 우월감을 느낄까봐 하는 말인데, 자본주의 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이른바 교육 개혁이 바로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경쟁력 강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모든 시험이 우리의 지배계급에게 해주는 봉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사회 환경의 불리함을 개인적 결함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일이다.

 

나 자신은 어떤 종류의 시험을 낼까? 여러분이 궁금해할지 모르므로 얘기하자면,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학과 졸업시험을 제외하고 나는 15년 동안 한 번도 시험을 실시한 적이 없다. 사실 시험에 대비해서 하는 식의 공부는 내가 강의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정치이론 및 방법론의 비판적 이해를 학생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믿는다. 나는 또한 시험이 학생들의 지식을 테스트하는 최선의 방법도 아니라 믿고, 학기가 끝날 때마다 두 주일 동안 학생들의 불안 수치를 하늘 높이 끌어 올리는 일이 즐겁지도 않다. 몇몇 강좌에서 나는 학기말 리포트를 요구하지만, 대개는 학생들에게 일종의 지적 일기장인 생각 노트를 만들어 그들이 읽는 책과 나의 강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제기하는 문제들과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적도록 해왔다.

 

이 책을 다 읽음으로써 거래의 의무를 완수한 여러분에게 아래 찾아보기를 제공하니, 시험을 잘 보고 세상을 바꾸는 데 활용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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