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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ㅣ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3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자유라는 건 참으로 소중한 단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자유당이란 단어들 때문에 이 단어가 오용되었다. 마치 태극기 부대 때문에 태극기가 그렇게 되었듯.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란 아흔아홉개를 가진 사람이 나머지 한개를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백개를 채우는 자유다. 남의 자유를 빼앗는 자유는 자유의 탈을 쓴 구속일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는 남의 자유를 빼앗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의미한다. 이 책을 읽고, 오염된 단어 ‘자유’를 하얗게 표백하자. 혹시 이왕 물들거면 김남주의 자유에 물들라.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김남주 -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中)
<밑줄>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 - 개인이든 집단이든 -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본인 자신의 물리적 또는 도덕적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간섭하는 것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거나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또는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거나 옳은 이유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슨 일을 시키거나 금지시켜서는 안 된다. 이런 선한 목적에서라면 그 사람에게 충고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며, 설득하면 된다. 그것도 아니면 간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강제하거나 위협을 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 행동을 억지로라도 막지 않으며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을 하고 말 것이라는 분명한 근거가 없는 한, 결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에 한해서만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이 당연히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몸이나 정신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권자인 것이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억압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행위가 현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 그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반대하는 사람에게까지 - 강도질을 하는 것과 같은 악을 저지르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의견이 옳다면 그런 행위는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설령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것은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시킴으로써 진리를 더 생생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대단히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막강한 권력자나 절대적인 복종에 익숙한 사람들은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에 빠지기 쉽다. 어떤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 막무가내로 그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도 주변 사람이나 자신이 습관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에 대해서는 똑같이 절대적으로 집착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에 자신감이 없으면 없을수록 일반적인 의미의 ‘세계’의 완전함에 암묵적인 믿음을 가지고 더욱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정당, 집단, 교회, 계급 등이 모여 이 세계를 구성한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어찌나 단단한지, 다른 시대나 국가, 다른 집단이나 교회, 계급 그리고 정당 등이 자기 집단과 정반대로 생각해왔고 심지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이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가 현재에 의해 부정되듯이 현재는 미래에 의해 번복될 것이다. 그래서 현재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생각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폐기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의심쩍어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습관화하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대한 믿음을 튼튼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예수의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대제사장은 자신의 옷을 갈가리 찢었다. 그가 사는 나라의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최악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대제사장도 오늘날 종교와 도덕의 영역에서 존경받는 수많은 경건한 사람들 못지않게 공포와 격노의 감정을 지닌 진지한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비난하짐나, 그들도 대제사장이 살았던 시대에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면 그와 똑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정통 그리스도 신자들은 최초의 순교자를 돌로 쳐 죽인 사람들이 자신보다 훨씬 못된 자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범죄를 저지른 인간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기존의 생각이 틀리지 않고 옳은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라도 이 진리에 대해 자유롭게 열린 토론을 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따져보자. 고집 센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비록 자기 생각이 옳다 하더라도 충분히 자주 그리고 기탄없이 토론을 벌이지 않을 경우 그것은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니라 죽은 독단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자유 토론이 없다면 단순희 그 주장의 근거만 아니라,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도 모르게 된다. 그 주장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특별한 생각을 담아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처음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의 일부만을 옮길 수 있을 뿐이다. 생생한 개념과 분명한 확신 대신에 그저 기계적으로 외운 몇 구절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 의미를 둘러싼 몇몇 껍데기는 남을지 몰라도 정말 중요한 본질은 잃고 만다.
세상의 진리 가운데는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며 그 참뜻을 제대로 알기 어려운 것이 많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잘 아는 사람들이 모여 찬반토론을 벌이고 모르는 사람들도 이것을 경청했더라도 그 뜻을 더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된 것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훨씬 더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안이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면서 그 문제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악습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의 절반은 그런 버릇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장일치가 없어야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그렇다면 진리를 얻기 위해 누군가가 틀린 주장이라도 억지로 고집을 부려야 한다는 말인가? 어떤 의견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면, 그 순간 그 의견은 중요하고 참된 진리로서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건가? 무엇인가 의심할 여지가 있어야 그것이 완전히 이해되고 체감될 수 있다는 말일까?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진리는 사라진다는 걸까?
우리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입장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한 진리에 대해 더 생생하고 깊게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진리가 보편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이런 소중한 기회를 잃게 된다면, 그로 인해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는 것도 만만치 않다.
만약 일반적인 통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법이나 여론이 이의 제기를 허용할 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데, 또는 그 믿음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다면 아주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래준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