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박완서 작가는 구리시 아치울에 사시던 이이화 선생에게 한문을 배운 것이 인연이 되어 아예 그 동네에 집을 짓고 살다가 13년 만에 돌아가셨다. ‘호미는 그 시기에 쓴 수필집이다. 돌아가신 후에 따님이 어머니의 글을 묶어낸 노란집이란 산문집도 바로 그 아치울 마당 있는 집에서 썼다고 한다. 마당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 마당이 있는 곳에서 돌아가셨다. 그 마당 속의 꽃이 피고 지고, 열매가 맺고 떨어지고, 심지어 잘라낸 나무의 그루터기에서 새 가지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 순환 속에서 돌아가셨으니 말 그대로 돌아서 가셨을 뿐이다.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다.

이 작품집에서 꽃 출석부 1’이라는 수필 한편이 교과서에 실렸다. 학습목표는 글에서 공감하는 부분을 찾는 거다. 공감을 하려면 같은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조언을 했다. “학습목표를 달성하려면, 즉 중간고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려면...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아야 해ㅋㅋ

 

<밑줄>

그러나 잎만 그렇게 무성할 뿐, 이듬해 봄에도 꽃은 피지 않아 나를 안타깝게 했고, 나는 또 나무에게 말을 걸게 되었다. 미안하다고, 너를 죽이려 한 것도, 너의 꽃을 싫어한 것도 사과할 테니 내년에는 꽃 좀 피라고 자꾸자꾸 말을 시켰더니... 그래서 나는 요새도 나의 목련나무에게 말을 건다. 나를 용서해주서 고맙고, 이 엄동설한에 찬란한 봄을 꿈꾸게 해줘서 고맙다고. (박완서 -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 )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혹은 누군가가 거두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박완서 - 돌이켜보니 자연이 한 일은 다 옳았다 )

 

70년은 끔직하게 긴 세월이다. 그러나 건져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은 허망감을 시냇물 소리가 다독거려준다. 다행히 집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그 물소리는 마치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성직자의 설교보다도 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준다. (박완서 - 다 지나간다 )

 

나는 그래서 살구나무가 좀 미워지더라도 라일락 쪽으로 뻗은 가장귀를 왕창 잘라낼 목적으로 튼실한 받침대 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가장귀를 끌어당겨만 놓고 차마 잘라내지 못했다. 나무의 체온이랄까, 살아 있다는 유연함, 피돌기 같은 수액의 움직임, 그런 게 생생하게 느껴질 뿐 아니라 가지마다 다닥다닥 붙은 돌기는 내년 봄에 터뜨릴 꽃망울의 시작이 아닌가. 살구꽃도 벚꽃도 매화도 우리 눈엔 어느 날 갑자기 활짝 피어나는 것 같지만 이렇게 미리미리 준비를 하는구나. 꽃망울이 얼어죽지도 말라죽지도 않게 보호하고 견디어내야 하는 겨울은 나무들에게 얼마나 혹독할까. 숙연해지는 한편 내년에도 살구꽃을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칠십 고개를 넘고 나서는 오늘 밤 잠들었다가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아도 여한이 없도록 그저 오늘 하루를 미련 없이 살자고 다짐해왔는데 그게 아닌가. 내년 봄의 기쁨을 꿈꾸다니...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는 기능이 남아 있는 한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로구나. (박완서 - 만추 )

 

올해는 복수초가 1번이 되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산수유가 1번이었다. 4월이 되면 목련, 매화, 살구, 자두, 앵두, 조팝나무 등이 다투어 꽃을 피우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날짜를 달리해 순서대로 피면서 그 그늘에 제비꽃이나 민들레, 은방울꽃을 거느린다. 꽃이 제일 먼저 핀 것은 복수초지만 잎이 제일 먼저 흙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상사초고 그 다음이 수선화다. 수선화는 벚꽃이 필 무렵에나 필 것 같고 상사초는 잎이 시들어 지상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더 있다가 꽃대를 밀어올릴 것이다. 이렇게 그것들을 기다리고 마중하다 보니 내 머릿속에 출석부가 생기게 되고, 출석부란 원래 이름과 함께 번호를 먹이게 되어 있는지라 100번이 넘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름을 모르면 100번이라는 숫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이 순서를 지키지 않고 멋대로 피고 지면 이름이 궁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출석을 부르지 않아도 그것들은 올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것들이 올해도 하나도 결석하지 않고 전원출석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것들이 뿌리로, 씨로 잠든 땅을 함부로 밟지 못한다. 그것들이 왕성하게 자랄 여름에는 그것들이 목마를까봐 마음 놓고 어디 여행도 못 할 것이다. 그것들은 출석할 때마다 내 가슴을 기쁨으로 뛰놀게 했다. 100식구는 대식구다. 나에게 그것들을 부양할 마당이 있다는 걸 생각만 해도 뿌듯한 행복감을 느낀다. 내가 이렇게 사치를 해도 되는 것일까. 괜히 송구스러울 때도 있다.

그것들은 내가 기다리지 않아도 올 것이다.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기다리는 기쁨 때문에 기다린다. (박완서 - 꽃 출석부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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