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범우사상신서 3
에리히 프롬 지음. 방곤,최혁순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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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와서 1980년에 돌아간 에리히 프롬. 부모는 유태인이고 고향은 독일이다. 세계 대전 때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1자유에서의 도피, 1976소유냐 존재냐등을 썼다. 소유냐 존재냐에서는 유태교와 맑시즘이 곳곳에서 보인다. 제목 그대로 소유하는 삶이라 존재하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이야기인데, 마지막 장인 새로운 사회의 특색에서 제기한 여덟가지 주장은 4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유효하다.

1. 산업광고와 정치적 선전에 있어서 모든 세뇌적 방법은 금지되어야 한다.

2. 풍요한 국민과 가난한 국민의 격차를 좁혀야 한다.

3.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의 대부분의 불행은 연간 보증 수입을 보장해 줌으로써 없어질 것이다.

4. 여성은 가부장제 지배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5. 최고문화회의를 설립하여 정부, 정치가, 국민에게 지식을 필요로 하는 모든 문제에 관하여 조언을 해주는 것을 그 직무로 삼도록 해야 한다.

6. 효과적인 정보를 효과적으로 보급하는 체제도 확립되어야 한다.

7. 과학적 연구는 산업분야와 방위에 그것을 응용하는 일과는 분리되어야 한다

8. 핵무기 폐기

 

 

<밑줄>

도는 존재이다 노자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자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당신의 존재가 희미할수록 더 소유하게 된다 칼 마르크스

 

내 목표가 소유라면 나는 더욱 많이 소유할수록더욱 그 존재가 확실해지므로 나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 즉 내가 속여야 할 고객과 없애야 할 경쟁자와 착취해야 할 노동자에 대해 적의를 품어야 한다. 소망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으며,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시기해야 하며, 더 적게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가장하듯이 나 자신이 (나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나) 미소를 띤, 이성적이고 성실하고 친절한 인간으로 보이기 위해서이다.

 

소유에 대한 열정은 틀림없이 끝이 없는 계급투쟁을 가져올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그들의 체제가 계급을 폐지함으로써 계급투쟁을 종식시킨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허구이다. 왜냐면 그들의 체제는 생활의 목적을 한없는 소비원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한, 계급이 형성되게 마련이고 계급투쟁이 있게 마련이다.

 

 

 

능동성과 과정을 표시하는 것은 동사이다. 예를 들면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원한다, 나는 미워한다 등등. 그런데 어떤 능동성소유하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경우가 점차 잦아지고 있다. 즉 명사가 동사 대신 쓰이고 있다. 그러나 능동성을 명사와 결부시켜 소유하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언어의 오용이다.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며, 그것은 아마 오늘날의 풍요한 산업사회의 가장 중요한 형태일 것이다. 소비는 다의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우선 불안을 제거해 준다. 왜냐하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길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더 많이 소비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전의 소비가 곧 그 욕구충족적 성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소비자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및 내가 소비하는 것

 

삶의 소유양식에 젖어 있는 학생들은 귀를 기울여 강의를 듣고, 그 말의 논리적 구조와 의미를 이해하며, 가능한 한 그 말을 모두 그들의 노트에 적는다. 후에 필기한 것을 암기하며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내용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사상체계의 일부가 되어 그것을 풍요롭게 하거나 확장시키진 못한다. 학생들은 그 대신에 그들이 들은 말을 사상, 혹은 전체적인 이론의 고정된 몇가지 집합으로 면모시켜 그것을 저장한다. 학생과 강의내용은 서로 무관한 채 동떨어져 있으며, 다만 학생 각자가 어떤 사람의 진술의 집적의 소유자가 되어 있을 뿐인 것이다.

 

소유양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은 단 한가지 목표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을 즉 배운 것을 고수하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그것을 단단히 기억하거나 노트를 소중히 보존한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거나 창조할 필요가 없다. 사실 소유형의 사람들은 어떤 주제에 대한 새로운 사상이나 관념에 접하며 오히려 당황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양의 정보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우수한 학생이란 여러 철학자들이 각기 말한 것을 가장 정확하게 암송할 수 있는 학생이다. 그들은 박물관의 박식한 안내인과 같은 것이다. 그들이 배우지 않은 것은 이러한 종류의 재산적 지식을 초월한 것이다. 그들은 철학자에게 질문하고 그들과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그들은 철학자 자신의 모순과 그들이 어떤 문제를 무시하거나 쟁점을 회피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법도 배우지 않는다.

 

우리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지식을 소유물로서 갖도록훈련하는 데 애쓰고 있으며, 그 지식은 그들이 후일 갖게 될 재산 혹은 사회적 위신의 양과 대체로 비례한다. 그들이 받는 것은 최소한 그들이 일을 하는 데 불편이 없을 만큼의 양이다. 여기에 덤으로 그들 각자에에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사치스러운 지식을 모은 꾸러미가 주어지는데, 각자의 꾸러미의 크기는 그 인물이 아마도 얻게 될 사회적 위신과 일치한다. 학교는 이 전면적인 지식의 꾸러미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하나님은 두가지 중요한 계율을 덧붙인다. 그 하나는 각자는 자기의 필요에 따라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출애굽 16:17~18) 마르크스에 의해서 유명하게 된, 각자는 그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원리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정식화되고 있다. 부양받을 권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확립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식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이다. 자식들은 부양받을 권리를 확립하기 위해 그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두 번째의 계율은 축재와 탐욕과 그리고 소유욕에 대한 계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아무것도 저축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출애굽 16:20~21)

샤바트(Shabbat:안식일)을 지킨다는 개념도 음식을 거둔다는 것과 관련되어 도입되었다. 모세는 유태인에게 금요일(유태교의 안식일은 토요일)에는 평상시의 음식량보다 두 배를 거두라고 말했다.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칠일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출애굽 16:26)

 

신약성서는 삶의 소유구조에 대한 구약성서의 저항을 계승하고 있다. 그 저항은 그 이전의 유태인이 행한 저항보다 더 철저하다. 구약성서는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계급의 소산이 아니라 유목하는 목양자나 독립적인 농부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로부터 천년 후 탈무드라는 학문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학식이 풍부한 바리새인들은 소수의 매우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소수의 아주 잘사는 사람들에 이르는 중류계급을 대표하고 있었다. 이 양집단이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회정의의 정신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보호, 그리고 모든 무력한 사람들, 예를 들며 과부나 소수민족에 대한 원조였다. 그러나 대체로 그들은 부를 나쁘다거나 존재의 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서 초기의 기독교도들은 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멸시당하는 사람들, 짓밟히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집단이었고, 그들은 구약성서의 몇몇 예언자들처럼- 부자와 권력자를 심하게 비판했고, 부와 세속적 권력과 성직의 권력을 순연한 악으로 보고 타협하지 않고 탄핵했다. 실제로 막스베버가 말했듯이 산상수훈은 커다란 노예반란의 연설이었다. 초기 기독교도들이 품고 있던 기분은 완전한 인간적 연대 바로 그것이었으며 때때로 그것은 모든 물질적 재화의 자발적인 공동소유라는 관념으로 표현되었다.

 

다른 교부(敎父)들과 마찬가지로 바실리우스에게도 모든 재물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은 그의 특성을 말해준다. “남의 옷을 빼앗는 자는 도둑이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줄 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에게 옷을 주지 않는 자는 도둑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을까?”

 

소유양식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견해의 전거로 대표적인 것은 빈곤에 대한 그의 설교인데, 그것은 마태복음 513절의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구절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설교에서 에크하르트는 마음의 가난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해 논하고 있다. 그는 우선 외면적인 빈곤, 즉 물질적인 빈곤도 미덕이며 권장할 만한 것이지만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면적인 빈곤, 즉 복음서 구절에 언급되어 있는 빈곤이며, 그것을 정의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원하지않고, 아무것도 알지못하고, 아무것도 갖고 있지않는 자는 가난한 인간이다

 

아이를 낳는 모든 고통이 여자의 것임을 고려할 때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이를 만든다는 것은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착취라는 것을 거의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편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독자적인 형태의 소유권, 즉 어린 시기의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다. 이 공전은 끊임없는 악순환을 이룬다. 남편은 아내를 착취하고, 아내는 어린 자식을 착취하며, 청년기의 남자는 이윽고 연상의 남자들에 끼여 여자를 착취하는 등등으로

 

조지 그로데크는 남자는 결국 단 몇분동안만 남자일 뿐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어린아이라고 논평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이윽고 왜곡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1백 년이나 너무 일찍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이미 그 가능성의 한계에도 달해 있기 때문에 혁명이 임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죽은 뒤 엥겔스가 말했듯이 그들은 완전히 판단을 잘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발달의 절정에서 그들의 새로운 가르침을 선언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쇠퇴하고 궁극적인 위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1백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점을 예견하지 못했다.

 

아이히만(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을 지휘했던 악명 높은 나치스 독일의 친위대 중령)은 관료의 극단적인 한 예이다. 아이히만은 유태인이 미워서 수십만의 유태인을 죽인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았다. 아이히만은 그의 의무를 다했을뿐이다. 그는 유태인을 죽였을 때 의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는 유태인을 독일 밖으로 추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도 똑같이 의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단지 규칙을 지키는 일뿐이었다. 그는 그가 규칙을 어겼을 때만 죄의식을 느꼈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단지 어렸을 때 꾀를 부려 빈둥거린 일과 공습 때 피난 명령을 어긴 두 경우에만 죄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의 대부분의 불행은 연간 보증 수입을 보장해 줌으로써 없어질 것이다. 이 생각의 핵심은 모든 인간이 그가 일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주거를 제공받을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생족은 유지해 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많이 받을 필요도 없지만 그보다 적게 받아서도 안 된다. 이러한 권리는 현대에 있어서는 새로운 개념의 표상이지만 실은 기독교에 의해 요구되는 많은 원시적인 부족들에 의해 실천된 매우 오랜 규범이며, 그것은 인간은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하든 다하지 못하든 관계없이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권리를 지닌다는 규범이다. 그것은 우리가 애완용 동물에게는 인정하면서 같은 인간에게는 인정하지 않는 권리이다.

대규모의 복지 관료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현재 쓰고 있는 비용, 그리고 육체적, 특히 정신신체적인 질병, 범죄성, 마약중독(이 모든 것은 그 대분이 압제와 권태에 대한 항의의 형태이다)을 치료하는데 드는 비용을 고려해 본다면, 필요한 사람에게 연간 보증 수입을 제공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도 적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생각은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게으르다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실행 가능성이 없고 위험한 것으로 생각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투적인 이의에는 근거가 없다. 그것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합리화시켜 주는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다.

 

중세 후기의 문화가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근대사회가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지상의 진보의 나라의 성장이라는 이상에 의해서 고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세기에 와서 이러한 이상이 바벨탑이상으로까지 타락했다. 그것은 이제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으며, 마침내는 모든 사람들이 그 폐허 속에서 묻어버리고 말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가 정과 반이라면 새로운 합, 즉 중세 후기 세계의 정신적 핵심과 르네상스 이래의 합리적 사고와 과학발달과의 종합이 대혼란을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이 종합은 존재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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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마틴 루터 킹 자서전
클레이본 카슨 엮음, 이순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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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마틴루터킹목사 자서전)’을 읽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은 영어 문제 지문에서 한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때론 국어, 화법 시간에 잘된 연설의 사례로 언급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연설을 한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의 인생을 두로 살펴보기에 좋다.

 

1929년 정의로운 목사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그 역시 아버지 못지않게 정의로운 목사가 되었다. 55년 로자 팍크스 여사가 버스좌석의 흑백차별에 저항하여 체포된 일을 계기로 인종차별철폐를 위한 운동을 시작한다. 6839세의 나이로 암살당하기까지 비폭력 평화시위로 말콤엑스와는 같고도 다른 길을 걸었다.

 

백인목사들이 수감 중인 킹 목사에게 시위 중단을 요구하는 신문광고를 내자 이에 긴 반박문을 써서 보냈는데, 여기서 킹 목사의 사상을 깊이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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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분위기는 화목했다. 부모님은 훌륭한 분이셨다. 나는 두 분이 언쟁을 벌이거나 불화를 일으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는 나의 종교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내가 사랑을 베푸는 주님의 존재를 별 어려움 없이 확신할 수 있었던 것과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된 것은 모두 타고난 건강 체질과 화목하고 사랑이 넘쳐흐르는 가정 덕분이었다.

 

농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농장주인이 할아버지를 속여서 피땀 흘려 번 돈을 부당하게 빼앗는 현장을 목격했다. 아버지는 농장주인 앞에서 할아버지에게 주인이 부당한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렸다. 그러자 농장주인은 이 검둥이 입을 당장 틀어막지 않으면 내 주먹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하며 몹시 화를 냈다. 그 농장주인에게 밉보였다가는 밥줄이 끊길 형편이었기에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에게 잠자코 있으라 하셨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는 농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버스에 탄 흑인들에게 퍼부어지던 폭력과 모욕을 목격한 다음부터는 버스를 타지 않으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애틀랜타에서 교원급여 평준화투쟁을 주도했고, 법원 내 앨리베이터의 흑백차별을 철폐하는 데 기여했다.

 

간디를 연구하면서 나는 진정한 평화주의란 악에 대한 무저항이 아니라 악에 대한 비폭력적인 저항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간디는 폭력적인 저항자에 못지않은 용기와 힘을 가지고 악에 대항하면서도 가슴에는 증오가 아닌 사랑을 품고 있었다. 진정한 평화주의란 니버가 주장한 것처럼 사악한 힘에 굴복하는 비현실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평화주의란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것보다는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랑의 힘에 의거하여 악에 용감하게 맞서는 태도를 의미한다. 폭력의 가해자는 우주 속에서 폭력과 고통을 증식시키지만 폭력의 피해자는 상대편에 수치심을 불러일으켜 심정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에게는 선한 본성이 잠재해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니버를 통해서 인간에게는 악의 본성도 잠재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인간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복잡성과 집단적인 악이 구현되는 실체를 인식할 수 있었다. 평화주의자 중에는 이런 점을 간과하고 인간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가지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독선으로 기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조용히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마틴 루터, 정의를 위해 일어서라. 평등을 위해 일어서라. 진리를 위해 일어서라. 보라,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정당한 법을 준수하는 것은 법적 의무일 뿐 아니라 도덕적 의무입니다. 하지만 부당한 법에 복종하지 않는 것도 역시 도덕적 의무입니다. 저는 부당한 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빌어 말하자면, 부당한 법은 불멸의 자연법에 근거하지 않은 인간의 법입니다. 부당한 법은 수와 힘의 측면에서 다수에 속하는 그룹이 소수그룹에 대해 준수를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전혀 구속받지 않는 법입니다. 정당한 법은 다수그룹 자신이 자발적으로 준수하면서 소수그룹에 대해서 준수를 강요하는 법입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자행했던 일들은 모두 합법적인 것이었고 헝가리의 자유투사들이 헝가리에서 했던 일들은 모두 불법적인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는 유태인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편의를 제공하는 행위는 모두 불법적인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불만을 품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들에게 불만은 당연하고 건강한 것이지만, 그것을 발산할 때는 비폭력적 직접 행동이라는 창조적인 배출구를 이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어라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극단적으로 사랑을 추구하신 분이었습니다.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공평이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라하고 말씀하신 아모스는 극단적으로 정의를 추구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세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 세 사람의 죄명은 모두 극단주의였습니다. 그 중 두 사람은 주위 환경에 비해서 비도덕적이라는 점에서 극단주의자였고, 예수님은 사랑과 진리와 선행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극단주의자였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간디는 몇십년 간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간디가 통일시키려 했던 조국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갈등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간디는 조국의 분열을 지켜보면서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페인에 가고 싶어했습니다. 스페인에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가장 큰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스페인에 가지 못하고 로마의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인생은 이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꿈은 오늘이나 내일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 속에 꿈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것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린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이 투쟁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여기서 투쟁을 멈춘다면 큰 비극이 야기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행진계획이 세워지면 모두들 참석합시다. 직장을 빠지더라도, 학교에 결석을 하더라도 행진에 참여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형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이 직접 파업을 하지는 않더라도 언제나 힘을 합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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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 - 북유럽 사회가 행복한 개인을 키우는 방법
아누 파르타넨 지음, 노태복 옮김 / 원더박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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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누 파르타넨의 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를 읽었습니다.

 

천국과 지옥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이냐 묻는다면 당연히 천국을 택할 것이다. 또한 지루함과 재미를 택하라면 역시 재미를 택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천국은 지루하고, 지옥은 재미있다는 점이다. 다시 묻는다. 지루한 천국과 재미있는 지옥 가운데 어딜 택할 것인가?

 

저자 아누 파르타넨은 핀란드 여자이다. 핀란드는 지루한 천국이다. 따라서 미국의 재미를 택해 미국 남자와 결혼하여 미국에 살게 된다. 그런데 미국은 재미있지만 지옥란 걸 뒤늦게 알게 된다. 저자가 살았던 핀란드와 살고 있는 미국을 가정, 학교, 병원 등에서 비교체험한 사실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것은 책 속에서 등장하는 미국이란 단어를 한국으로 바꿔도 문맥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만큼 우리는 그간 아메리칸 드림을 꿈꿔왔다. 그러나 이제는 유러피언 드림을, 특히 노드릭 드림을 꿈꿔야 하지 않을까?

 

<밑줄>

미국에는 부모가 자녀들의 성인이 된 후에도 뒤를 봐줘야 한다는 도덕적인, 어느 정도 합법적인, 기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부모가 자녀에 대해 권력을 행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노르딕 사람들은 그런 기대에서 벗어나 무엇보다도 자녀가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도록 돕는다는 목표 하에 자녀들을 기를 수 있다. 아내는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지나치게 의존하는 처지에 놓이지 않아야 한다. 이는 남편과 아내를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핀란드에는 사립학교가 없습니다

핀란드에는 일부 사립 직업학교가 있으며 외국 학위를 주는 몇몇 국제대학이 있지만 핀란드 국내 학위를 주는 사립대학은 없다. 실질적으로 핀란드에서는 누구나 공립학교에 다닌다. 유치원에 가든 박사 학위를 받으러 가든.

 

미국에서 교육 개혁을 외치는 이들 다수가 오늘날 미국 공교육의 가장 큰 문제로 나쁜 교사를 꼽으며 그 이유는 교사 노조에 있다고 확신한다. 노조가 나쁜 교사를 해고시키지 못하게 한다는 불평이 흔히 들린다. 하지만 핀란드의 관점은 이렇다. 나쁜 교사를 해고할 수 없어 고민이라면 해결책은 애초에 나쁜 교사를 기르지 않아야 한다.

 

핀란드 학교에는 표준화된 시험이 없다. 미국의 표준화된 시험은 핀란드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이상하다. 무엇보다도 시험이 학생들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대신에 학생들이 학교나 학군, 교사를 평가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교사가 나쁘면 문제를 찾아서 제기할 교장의 책임이 있다. 핀란드에서 종신재직권이 보장된교사를 해고하는 것은 어렵다. 또한 핀란드의 거의 모든 교사들은 노조에 가입해 있다. 핀란드의 교육노동조합에 따르면 핀란드 교사의 95퍼센트가 조합원이다. 핀란드에서 노조 가입은 완전히 자발적인 것인데도 말이다.

 

핀란드 교육의 성공을 볼 때, 경쟁에 관한 핀란드의 태도인 가능하면 피하기에는 훌륭한 장점이 있을지 모른다. 핀란드에는 명문학교나 교사의 목록이 없다.

 

일반 개업의인 핀란드 의사들은 핀란드인 평균 급여의 두 배를 번다. 미국의 일반 개업의들은 미국인 평균 급여의 3.5, 전문의들은 5.5배를 번다. 미국 의사들이 고액의 소득을 정당화하면서 내세우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이 받았던 비싼 교육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분명 핀란드에서 교육받는 의사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비용이긴 하다. 핀란드 의대들은 무료이기 때문이다. 미국 의사의 고수익이 적절하다고 보는 또 한가지 이유는 그들이 가입해야 하는 비싼 의료과실 보험이다. 핀란드에서 그런 비용은 무시할 정도다. 하지만 미국 의료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부류는 의사가 아니다. 이 탐탁지 않은 영예는 미국 의료업계의 진정한 윗선한테 돌아간다. , 병원 관리자와 보험회사 중역들이다. 이 모든 돈은 누가 내는가? 바로 보통의 미국인이다.

 

2011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CNN의 방송 토론에 하원의원 론 폴이 등장했다. 론 폴은 유명한 의사이자 자유주의자로 당시 대권에 도전하고 있었는데, 이런 질문을 받았다.만약 좋은 직장을 가진 건강한 서른 살 성인이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기로 선택했는데,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6개월의 집중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라면 누가 치료비를 대야 하는가? “그게 바로 자유라는 겁니다폴이 말했다.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죠.” 토론 사회자가 확인 차 물었다. “사회가 정말로 그 사람을 죽게 내버려둬야 합니까?” 이번에는 폴 대신에 청중이 아주 열정적인 외침으로 답했다. “!”

 

노르딕 나라들은 강한 공공 복지 체계 마련이 경제성장의 견인차임을 증명하고 있다. 아울러 누구나 살면서 마주치는 위험과 필요한 안전을 모든 사람이 자금을 대는 하나의 체계 안에서 다루는 것이 각자가 개인적으로 저축하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이며 효율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국가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에 관한 밀의 사상은 가급적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밀은 인생의 후반부에 자신의 이전 사상들이 오류였음을 깨달았다. 밀이 마음을 바꾼 까닭은 영국의 불평등과 사회적 문제들을 살펴보았기 때문인데...밀과 마찬가지로 1700년대에 나온 스미스의 이론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문제점을 드러냈고, 여러 사회에서 드러난바 보이지 않는 손은 상당한 기술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미국은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니고 오히려 북유럽이 그렇다. 이런 현실을 절감하고서 영국 노동당의 수장인 에드 밀리밴드는 2012년에 놀라운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아메리칸 드림을 원한다면 핀란드로 가십시오아메리칸 드림이 물거품이 된 이유를 놓고 논의가 분분하지만, 가장 큰 주범은 소득, 의료, 교육 그리고 가정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의 불평등이다. 왜 그런지는 뻔하다. 미국이 기회 평등을 보장해 줄 기본적인 공공 정책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노르딕 기업들의 성공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가정이 화목하면서도 독립적인 개인으로 구성되도록 하는 것, 노동자들이 건강하고 좋은 교육을 받고 또한 고용주에게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게 하는 것, 훌륭한 인프라는 구축하는 것, 제도를 투명하게 운영하는 것, 사법적도를 공공의 이익에 이바지하도록 하는 것

 

핀란드는 노동조합의 힘이 무척 강하고 조직률이 70퍼센트를 넘는다.

 

미국은 낙관주의가 흘러넘치다 보니 부정적 느낌은 환영받지 못할 때가 많은 문화다. 미국에서는 암 환자에서 실업자가 극빈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긍정적인 면을 보라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라고, 무슨 변변찮은 혜택을 받든 감사를 표하라는 분위기다. 부정적인 느낌은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촉매일 수 있다. 과도한 낙관주의는 실제로 목표 추구를 방해할 수 있다. 역경이 닥쳤을 때 발휘되는 긍정은 존중받을 만한 자질이며, 그런 사람은 늘 부정적인 사람보다 가까이 하기에도 훨씬 즐겁다. 반면 마음을 누그러뜨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변화를 추구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불평은 불쾌하고 무용한 듯하지만, 때로는 진정한 변화(단지 개인 차원만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까지 포함한 변화들)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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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4 - 의형제편 1, 개정판 홍명희의 임꺽정 4
홍명희 지음, 박재동 그림 / 사계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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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앞으루 할 일이 한 가지 있는데 저에게는 이 세상에 다시 없는 큰 일입니다.”

하고 말하고서

그 일이 소원대로 잘 될까 점 하나 쳐주십시오

하고 청하니 대사는 빙그레 웃으며

그 일의 점쾌가 시원치 못하면 아니해도 좋을 일인가.”

하고 말한 뒤

지금 할까말까 하는 일이면 점도 치는 것이 좋지마는 좋든 그르든 해야 할 일이면 점이 소용 있나. 그저 하는 것이지. 하면 또 되느니.”

 

임꺽정 4권은 두 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 박유복이편의 주인공 박유복이 병해대사(양주팔)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앞두고 점을 쳐달라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해야 할 일이면 점을 칠 필요가 없이 그냥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게 공감이 간다.

 

4권의 둘째편은 곽오주가 주인공인데, 머슴 살다가 도적이 된 얘기로 앞으로 임꺽정 무리에 속할 사람인데, 울던 아들을 죽인 것이 정신병이 되어 우는 아이들은 모조리 죽이려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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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 - 시에서 배우는 삶과 사랑
천양희 지음 / 샘터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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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 버금가는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



네루다의 시 <여자의 몸>의 한 구절,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에 사로잡혔다는 부분을 읽고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한때 그 구절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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