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봤어? 2 - 우리가 잃어버린 삶 청소년 인문 교실 2
엄기호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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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봤어1(인간답게 산다는 것)에 이어 중고등학교 토론수업 교재로 쓰기 좋은 책이다. 다만 전작에 비해 편당 쪽수가 많아 한 시간에 읽고 토론하기 힘들 듯하다. 2시간을 묶어서 수업을 할 때 사용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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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들어낸 조직 중에서 그 수명이 가장 긴 조직은 뜻밖에도 종교 조직입니다. 예수나 붓다를 직접 본 사람은 이 시대에 아무도 없지만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이 남긴 가르침을 자기 삶의 귀감으로 삼는 사람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분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목적으로 구성된 종교 조직은 수천 년 동안 유지되어 왔고,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오래 존속하리라 예상됩니다. 국제적 규모의 기업도 100년을 존속하기가 어려운데 말이지요. (성혜영, ‘인간은 신을 버릴 수 있는가)

 

발굴되는 유물들을 보면 남신상이 없고 전부 여신상입니다. 이것은 거의 동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문명에서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에요. 유럽 일대뿐 아니라 동북아시아까지도 그래요. 또 거기에서는 방어용 성곽이 발견되지 않아요. 공격용 무기도 거의 없습니다. 전쟁을 안 했던 것입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 살았지만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대형 고분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피라미드 같은 큰 무덤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을 독점한 권력자도 없었다는 의미예요. 대신 고분들의 크기다 다 비슷해요. 평등한 사회였던 거죠. 이처럼 여신 문명은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였습니다.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의 지역이 여신 문명의 영역이었어요. 그런데 BC 4000년경부터 여신 문명의 시대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일정 지역에 주거하던 이질적인 성향의 종족들이 갑자기 이동하면서 팽창하기 시작했는데 아마 기후 변동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이 종족들의 특징은 남신을 숭배하는 전사 계급이 그 공동체의 중심이라는 점이에요. 이들이 유라시아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여신 문명이 깡그리 파괴되기 시작해요. 이게 약 2000년 동안 자행됩니다. 그러면서 고대 여신 문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신 중심의 문명이 새롭게 세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모든 신화들은 대체로 이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에요. 여신 문명의 신화들을 남신 중심으로 왜곡하고 재구성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로마 신화로 알려진 이야기들이 당시 만들어진 가장 대표적인 신화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왕이 누구죠? 제우스인데, 특기가 뭐죠? 다들 번개를 잘 다루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실은 바람피우는 겁니다. 제우스의 여성 편력을 보면 정말 신이 맞나 싶어요. 납치, 강간을 일삼는 특수범죄자예요. 여신 문명이 그리스 신화의 주요 무대인 에게해 일대의 섬들에 마지막으로 잔존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우스가 수많은 여신을 겁탈하고 납치한 신화는 바로 남신 문명이 에게해 지역의 여신 문명을 하나씩 정복해간 역사를 압축한 것이라고요. 그리스 식민 지배의 역사이지요. 신화적으로 볼 때, 정복은 세 종류로 압축됩니다. 가장 참혹한 건 여신을 살해하는 겁니다. 두번째는 납치와 강간이고 세번째는 남신의 배우자로 삼는 겁니다. 그러면서 여신들의 신격을 떨어뜨리는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는 이렇게 편집된 것입니다. (이성희, ‘노자와 장자의 철학으로 본 생명 감수성과 생명의 즐거움)

 

딱딱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노자 76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습니다. 이 부드러움을 노자는 여성성의 특성으로 보았어요. 생명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경직돼요. 딱딱해집니다. 남성 중심의 문화는 강함을 추구하고 서로 그 강함을 경쟁합니다. 그리하여 폭력과 전쟁으로 확장되지요. 강함의 추구, 그 끝은 죽음입니다. (이성희, ‘노자와 장자의 철학으로 본 생명 감수성과 생명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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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봤어? - 인간답게 산다는 것 청소년 인문 교실 1
홍세화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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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김동춘, 강신주 등 유명한 인문사회학자들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것을 정리한 책이다. 다양한 주제의 짤막한 글들이 있기 때문에 한 시간 수업에서 20분 읽고 20분 토론하는 용도로 활용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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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위대한 철학자는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았어요. 플라톤, 칸트, 데카르트, 스피노자, 니체...그들은 진리를 위해 본능적으로 결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자식을 낳는다면? 그건 정말 치명적이죠. 석가모니는 자기 아들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었는데, 무슨 뜻이죠? 맞아요. ‘장애물’, ‘방해물이라는 의미예요. 성철스님도 딸이 있었는데, 이름이 불필이에요. ‘필요없다는 뜻이지요. (고병권, ‘철학하며 산다는 것)

 

일리치는 이런 비유를 들었어요. ‘비가 올 때 우산을 만들어 쓰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비가 오면 귀찮고 싫으니까 비를 없애자는 것이 근대 과학의 관점이다일리치는 기술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자는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일리치도 비행기를 타고, 자동차 운전을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우산을 만들어 쓰는 것은 좋은 기술, 착한 기술이지만 비를 없애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라는 겁니다. (박경미, ‘고통의 의미, 현대 의학과 병듦)

 

왜 하이데거가 나치 체제를 받아들이고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나치를 찬양하는 글을 썼을까 생각해 보면요. 하이데거 눈에는 히틀러도 저 콧수염 난 놈, 언제 죽을지 모른다그렇게 보였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독재자들조차도 다 받아들여지는 것이죠. 하이데거 철학은 누구나 다 용서가 되는 철학이에요. (강신주, ‘인문학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의 죽음)

 

제가 프랑스에 있을 때 한 역사 교수하고 친분이 있었는데 한번은 평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프랑스는 만점이 20점이고, 핀란드는 10점이라고 합니다. 제가 한국은 만점이 100이라고 했더니, 그 교수가 그럼 역사도 만점이 100점이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다시 그럼 너는 몇점을 받았으냐?”라고 물어서 어떤 때는 93점도 받고, 어떤 때는 83점도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교수가 너희 역사 교사들 대단하다! 학생들의 역사를 보는 관점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잴 수가 있느냐이렇게 말하더군요.

, 이 지점에서 여러분은 생각해 봐야 해요. 여러분이 역사를 공부한 줄 아십니까?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암기하고 그것을 평가받았죠. 여러분이 사회를 공부했나요? 사회에 관한 용어를 암기했을 뿐입니다. 바로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한국에서 인문사회과학에 관한 한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시험을 보기 전에 잊어버렸느냐 아니면 시험을 보고 난 후에 잊어버렸느냐 하는 것일 뿐입니다. (홍세화, ‘나는 누구인가, 나와 사회의 정체성)

 

기업하기 좋은 도시라는 구호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해져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뭘까요? 기업하기 최고로 좋은 도시는 어딜까요? 여러분이 사장이라고 가정해 보세요. 예를 들어 종업원들이 모여서 노조를 만들고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 기업하기 좋을까요? 아니겠죠. 노조가 없어야 합니다. 회사에서 물건을 만들 때 나오는 폐기물을 처리하려면 돈이 굉장히 많이 듭니다. 그래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몰래 하수구에 폐기물을 버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강이 오염되고 물고기가 죽겠죠. 관공서에서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나올 겁니다. 하지만 사장 입장에서는 조사를 안 하면 굉장히 좋겠죠. , 기업이 사회에 해를 끼치는 일을 하더라도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좋은 겁니다. 또 회사에서 공장을 세웠는데 소음이 너무 커요. 주민들이 와서 이 공장 때문에 도저히 시끄러워서 못 살겠다고 시위하면 어떻게 돼요? 기업하기 안 좋겠죠. 그러면 회사가 어떤 피해를 주든 간에 주민들이 묵묵히 참아주는 곳이 기업하기 좋은 도시겠죠. (김동춘, ‘대한민국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함정에 빠지다)

 

미국적 방식은 법을 안전장치로 활용해서 기업의 권력을 제어하는 겁니다. 법이 100%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서 기업이 저지르는 범죄를 엄격하게 처벌합니다. 기업에 벌금을 왕창 때려서 다시는 그런 일을 못 하도록 하는 거죠. 부당하게 직원을 해고하거나 중소기업의 존립을 위협하거나 탈세를 하는 경우에는 소송을 통해서 그 회사에 엄청난 벌금을 부과합니다.

유럽의 방식은 노조와 노동자 정당을 통해 기업을 견제하는 것입니다. 기업의 경영을 책임지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이사장과 이사회입니다. 유럽은 이사회가 기업 운영의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중요한 문제를 결정합니다. 만약 기업이 반사회적이고 반도덕적인 활동으로 이윤을 추구할 경우 이사회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제동을 겁니다. 예를 들어 오염 물질을 배출해서 환경을 파괴하거나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기업 활동은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겁니다. 기업 내에서 최소한의 규칙과 윤리가 지켜질 수 있게 하는 거죠. 바로 이 이사회에 노조의 대표가 참석합니다. 노동자들은 기업의 활동에 개입하고 감시감독을 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는 노조를 절대 만들지 못하도록 하는 삼성도 독일에서는 노조를 허용합니다. 독일에서는 노조를 만들어야만 기업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동춘, ‘대한민국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함정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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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과 문학
마종기 손명세 정과리 이병훈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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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이라는 말이 있다. 문과라서 죄송하다. 문과생이 이과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해서, 취업 시장이 이과생 위주라서 이런 말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문이과로 분리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일제의 잔재이다. 과거사 청산을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통섭이 미래의 생명줄이기 때문에 문이과는 통합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의학문학의 만남을 다룬 책을 읽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의사가 되려다 소설가가 된 루쉰, 의사이자 소설가였던 체호프 등을 읽으면서, 의학은 개인을 치료하고 문학은 사회를 치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의학문학은 '치유'라는 공통 분모를 가진 셈이다.

 

한편 이 책에선 매우 재미있는 글 한편을 발견할 수 있다. 2005년 황우석의 논문조작 사실이 보도되기 전 황우석의 글, ‘의료기술에 대한 문학적 과장 -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변명이다.

 

내가 보기엔 차라리 생명과학에 집착하는 문학자들이 미친 과학자들의 허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해결책이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점을 간파하는 영민한 사람들은, 흔히 예술가들이 그러한데, 희망보다는 가능한 파멸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파멸에 대한 집중은 곧잘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두려움은 쉽게 무조건적인 거부를 불러온다. 게다가 과학적 내용을 한낱 스릴러의 소재로 삼아 과장하고 왜곡하는 오늘 같은 상황에서야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문학(예술)이 과학의 문제를 제기하자, 그런 문학이 오히려 문제라는 지적에서, 왜 황우석이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다. 문학과 과학은 본디 하나인데 편의상 나눈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걸 굳이 구분하여 한쪽을 무시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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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주인공들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은 체호프 자신이 보여준 직업적 개성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동료는 체호프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항상 주의 깊게 들었으며 심지어 환자가 병과 상관이 없는 잡답을 할 때조차도 지친 기색 없이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했다고 증언했다. 요컨대 환자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의사로서의 성실한 자세가 작품 속에서는 예술적인 변형을 거치면서 묘한 방식으로 실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체호프가 의사 활동을 시작한 1884년은 그가 결핵으로 객혈을 한 첫 해이기도 했다. 결국 이 병이 원인이 되어 그가 마흔넷이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했으니, 의사이자 작가인 체호프는 평생을 환자 체호프와도 함께한 셈이다. 의사 주인공과 환자 주인공 사이의 기묘한 친연성, 나아가 의사 주인공들 속에 잠재해 있는 질병의 이미지는 바로 체호프 자신의 그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전적으로 작가의 의도를 따르는 허구의 존재들이다. 요컨대 체호프의 의사 주인공들은 육체적인 증상의 근원에 자리잡은 내면의 병,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세계 자체의 질병을 응시하는 작가 체호프의 시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삶이 궁극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라면, 그것을 완전히 치료하겠다는 건 망상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체호프의 의사는 다만 진단을 내릴 뿐 처방을 해줄 수 없는 것이다. 체호프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작가는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는 사람이지 그것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다.”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약이 아니고 그 병을 직시하고 그 병과 함께 살아가는 용기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의사 체호프는 작가 체호프로 읽히기 시작한다. (박현섭 의학은 나의 아내요, 문학은 나의 애인 - 의사작가 체호프)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생명과학자들은 미친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보기엔 차라리 생명과학에 집착하는 문학자들이 미친 과학자들의 허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생명과학자들은 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들처럼 비밀리에 실험을 진행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하는 연구가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연구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과학 연구는 밀실에서 몇 사람만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규모화되고 사회적 관심의 중심이 되었다. 지난 수십년 간의 의학 연구와 관련하여 스캔들이 발생하곤 했다. 그때마다 과학자들은 그 교훈을 받아들이고 또 뼈저리게 반성했고 수많은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예를 드면 오늘날 저명한 과학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서는 임상실험심의위원회의 검토를 거치고 이의 확인서를 받아야 하며, 미국에서는 더 나아가 국가에서 연구비를 받는 연구의 진행자들은 반드시 윤리교육을 이수하도록 강제하고 있을 정도다. 이런 노력은 생명과학이야말로 다른 어떤 연구보다 윤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이런 생명과학 연구의 선두주자로서 이에 상응하는 윤리적, 법적 연구자들이 있다. 나는 생명의 존엄성과 연구의 윤리성을 강조하는 이들이 끊임없이 제기하는 비판이 사실은 나 같은 생명과학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도리어 우리나라에서는 생명 문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 없이 감정적이거나 일방적인 주장만이 난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두번째로 과학자에 대한 오해는 일반 대중이 가지고 있는 과학의 능력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한다. 과학자들은 본능적으로 줄기세포든 어떤 치료 방법이 되든, 또는 어떤 과학 기술의 발전이 되든지, 새로운 과학기술은 기존의 삶의 방식에 또 다른 유용한 도구를 더하는 것이지 모든 방법을 대체하고 발생 가능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물론 과학자들은 자신의 유용성을 절실히 신뢰하고 그런 믿음이 연구 과정에서 부딪치게 되는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는 힘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인식 때문에 과학자들이 사회가 모두 반대하는 실험을 강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의 한계를 잘 모르는 대중은 과학기술이 모든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사람들은 과학자들에게 희망을 건다. 그러나 모든 해결책이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점을 간파하는 영민한 사람들은, 흔히 예술가들이 그러한데, 희망보다는 가능한 파멸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파멸에 대한 집중은 곧잘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두려움은 쉽게 무조건적인 거부를 불러온다. 게다가 과학적 내용을 한낱 스릴러의 소재로 삼아 과장하고 왜곡하는 오늘 같은 상황에서야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1978년은 최초의 체외수정이 성공한 해다. 이때 매스미디어의 보도를 살펴보면 실제로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장 노동자와 트럭 운전사로 평범하게 살던 브라운 부부는 9년간의 결혼 생활에도 임신에 성공하지 못하자 새로운 방안을 찾게 되고 결국 산부인과 의사와 생리학자 에드워드의 도움(체외수정술을 시행했다)을 받아 임신에 성공, 임신 기간 중 미약한 임신중독증과 약간의 저체온을 제외하고는 정상인 루이스 조이 브라운을 출산하게 된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사흘 동안 1면 기사로 신기술의 개가를 기뻐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은 기사거리를 얻기 위해 무리한 제안을 했고, 또 일부 다른 언론은 사실을 왜곡하고 흥미 위주로 글을 게재했다. 예를 들면 언론은 루이스를 부모의 기여는 없이 제조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시험관 아기라고 불렀는데, 이 호칭 때문에 오랫동안 사회와 일반 대중은 이 신기술을 불안하게 여겨야 했다. 또 당시 언론은 불임을 해결하기 위한 이 기술을 유전자 조작과 등가물로 여기고는 끊임없이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거론했다. 이 최초의 시술은 25년 넘게 흘렀다. 이후 수천 수만의 체외수정은 안전하게 시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루이스 자신이 평범하고 또 건강한 여성으로 성장하여 이 기술의 안전성을 증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신기술은, 아니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어느 정도 부당하게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 (황우석 의료기술에 대한 문학적 과장 -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변명)

 

루쉰이 선택한 길은 일본 동북 지방의 한 도시에 자리 잡은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였다. 그리고 이 의학이라는 공부 길은 비단 루쉰만의 것은 아니었다. 신해혁명을 일으킨 쑨원도 한때는 광뚱에서 개업을 한 적이 있는 의사였고, 문학인으로는 궈모뤄 역시 의사 지망생이었다. 당시 중국의 별명은 동아병부(東亞病夫)’ 곧 동아시아의 병든 남정네였고, 그 병든 남정네를 치유하겠다는 뜻을 세운 젊은이들이 의학이라는 길을 선택했다고 보면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센다이에서 의학도의 길을 착실히 걷고 있던 루쉰에게 뜻하지 않은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세칭 환등기 사건이 그것이다. 어느날 수업이 휴강을 하자 빈 시간을 메울 양으로 학생들에게 우연히 제공된 것이 환등기를 통한 전황 사진이었다. 그 무렵을 전후해서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일본의 전과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 필름 안에는 루신의 눈길을 잡아끈 장면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일본 군인이 긴 칼을 뽑아들고 중국인의 목을 베는 장면이었다. 루쉰의 동포이기도 한 그 중국인의 죄목은 러시아 군대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것이고, 그 주변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구경을 하고 있는 군상들은 모두 중국인들이었다. 하나같이 넋이 나가 얼굴로 자기 동포가 다른 나라 사람에게 처형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 서 있는 광경인 것이다.

루쉰은 그 장면을 본 것을 계기로 인생의 진로가 바뀌고 만다. 빙 둘러싼 채 그 광경을 구경하는 중국인들. 허우대는 멀쩡하건만 얼이 빠지고 넋이 나간 형상인 것이다. 중국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의 치료가 아니라 정신의 치료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그 영혼을 치료하려면 어쩌면 의학이 아니라도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영혼을 치료하려는 길, 곧 문학이라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유중하 루쉰이 그린 최초의 근대인,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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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 - 질문하고 토론하고 연대하는 ‘프랑스 아이’의 성장비결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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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정의 딸 칼리가 쓴 프랑스 학교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목수정이 쓴 딸 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다. 영국 대안학교를 다닌 학생이 쓴 책 '서머힐에서 진짜 세상을 배우다'나 스웨덴 공립학교를 다닌 학생이 쓴 '열다섯 살 하영이의 스웨덴 학교 이야기'처럼 학생의 관점이 궁금해서 읽은건데 낚였다ㅋ 그러나 결과적으론 좋은 선택이었다. 덕분에 응팔을 늦게나마 보게 된 행복까지.


예전엔 홍세화를 통해 프랑스를 알았는데 요즘은 목수정을 통해 그렇다. 목수정은 아버지가 아동문학가 목신일(이고 할아버지 독립운동가 목치숙인 뼈대(?)있는 집안 출신이다

 

이 책에서 목수정을 통해 프랑스 교육을 알게 된다. 독일 교육은 박성숙을 통해, 덴마크는 오연호, 핀란드는 후쿠다 세이지, 영국은 닉 데이비스, 미국은 마이클 애플을 통해 그러한 것처럼. 비교해서 읽으면 좋을 듯.

 

프랑스 교육을 정리하자면 학생들을 혁명으로 탄생한 공화국의 시민으로 교육시킨다는 점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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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신생아는 병원에서 집으로 오는 첫날부터 자신의 방에서 혼자 자야 한다.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젖병을 물려줄 때도 엄마들은 아이와 눈을 맞추며 곧 네가 원하는 젖병을 줄 테니 기다리란 말을 차분하게 해줄 뿐, 젖병을 들고 숨 가쁘게 아이에게 달려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도 엄마가 자신의 메시지를 간파했음을 알아차리고,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기다리는 기적이 눈앞에 펼쳐진다. 밤이 되면 아이가 부모와 떨어지기 싫어 울어도 그냥 내버려둔다. 그리하여 기필코 아이가 저녁 7~8시에 잠들게 한다. 초보 부모들에게 이 노하우들을 충실히 전수하는 사람은 소아과 의사들이다.

 

아이가 고집을 부리면 프랑스 부모들은 설명하고 설득한다. 그리고 선택의 범위를 제시한다. 아이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어른의 언어로 계속해서 설명한다. 프랑스에는 유아에게만 쓰는 특유의 단어가 없다. 아이도 처음 말을 배울 때부터 어른들의 말을 따라 한다. 아이들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해 어른들 세계에는 없는 배꼽인사 같은 것은 시키지 않는다.

 

이 나라 사람들은 여행을 최고의 교육이라 믿는다. 낯선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문화를 접하며, 접촉과 경험의 폭을 넓히는 것만큼 사람을 풍요롭고 깊게 해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아이를 몸 안에서 키워내 출산을 할 뿐 아니라 젖을 먹이고, 몸을 주는 지혜를 풀어내 어린 생명체를 길러내는 여성의 능력을 갖지 못한 남성들은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개척했다. 예를 들면 사냥 같은 것. 과거엔 들짐승을 사냥했다면 지금은 고객을, 기업을, 돈을 사냥하고, 여성들과 비교해 그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다. 전 세계 노동인구의 3분의 2는 여자지만, 전 세계 부의 100분의 1만이 여성의 소유라는 유엔의 여성 지위에 대한 보고서는 남성들이 여성에 비해 얼마나 뛰어난 사냥 실력을 가졌는지를 입증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들은 자신들이 능력을 발휘하는 그 분야에서 실력을 입증하는 것만이 유용한 존재의 의미를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인 것처럼 패러다임을 몰고 가버린 데서 비극은 발생한다.

 

당연히 있어야 할 위인전이 눈에 띄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라는 흔한 질문이 없다. 리스펙트(respect)라는 영어 동사와 비슷한 프랑스어 단어 레스펙테(respecter)의 의미는 영어의 맥락과는 조금 다르다. 영어의 리스펙트가 누군가를 우러러보고 따르는 비스듬한 경사의 상하 개념 속에서 작용하는 존경의 감정이라면, 프랑스어의 레스펙테는 수평적인 관계선상에서 누군가를, 그러니까 그의 말과 생각, 의견을 신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학교에서는 전교생에게 매주 한 권씩 새로운 책을 읽게 한다. 독서는 전교생이 학년과 반에 관계없이 해야 하는 공통의 숙제인 셈이다. 전체 학급이 한주일에 한번은 사서 교사와 도서관에서 수업을 한다. 아이들은 사서 교사와 함께 둘러 앉아 자신들이 그 주에 새로 읽은 책을 소개한다. 아이들이 서로에게 책을 권하고 돌려보는 일이 화제의 중심이 된다. 도서관의 학교의 심장이 된다.

이곳은 텔레비전이 없는 집이 흔하고 많은 학부모가 아이들의 텔레비전 시청에 부정적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tv 프로그램이나 가수 이야기보다 그들이 요즘 읽고 있는 책을 대화의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다.

 

담임 교사 프랑수아즈는 그 책을 당장 불태워버리세요. 집에서 문제집을 가지고 아이에게 추가적인 학습을 시키거나 선행학습을 시키는 행위야말로, 공부에 대한 아이들의 호기심을 앗아가고 공부를 지켜운 것으로 만드는 최적의 방법이란다.

 

프랑스에서는 서너 살 때부터 생활 태도에 대해 집중적으로 교육시킨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부탁합니다등의 기본적인 언어 습관은 물론, 식탁에서는 전식과 본식, 후식 사이의 엄격한 순서를 지키게 한다. 뿐만 아니라 간식은 하루에 한 번, 늘 정해진 시간(4시에서 4시 반경)에 엄마가 골라준 건강한 간식들을 먹는다. 하루 종일 군것질을 입에 달고 사는 일은 결코 허락될 수 없으며, 아이들이 용돈을 들고 마트에 가서 제가 먹고 싶은 과자를 마음대로 사먹는 일도 가능하지 않다. 놀이를 마치면 장난감을 정리하고, 자기 전에는 부모의 얼굴에 뽀뽀를 하며 잘 자라고 인사하며, 그리고 제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것까지 생활의 리듬이 완전히 습관으로 정착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훈련된다. 얼핏 보면 프랑스는 자유가 넘실대는 사회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자유는 가정, 탁아소, 학교, 이웃, 친척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이처럼 단단한 틀을 만들어주고 나서야 그 틀을 준수하는 선에서만 허락된다.

 

프랑스 학교에는 없는 것이 참 많다. 먼저 입학식과 졸업식이 없다. 대학교만이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각자에게 부여되는 번호도 없다. 교사가 이름 대신 번호로 아이들을 부르는 일은 프랑스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우등상, 효행상, 개근상을 주며 누군가의 빼어남이나 성실함을 고취시키고 만방에 알리는 조회 시간도 없다. 사생대회나 백일장처럼 그림과 글짓기에서 자웅을 가르는 일도 없으며, 교내 합창대회를 열어 반끼리 치열한 승부를 가르는 일도 없다. 엄숙한 교가도 없다. 이 나라 모든 공립학교의 교훈은 자유 평등 박애. 교복도 없고 내가 알기론 촌지의 관습도 없다. 그리고 아이들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할 결정적인 단어, ‘전교권이 없다. 등수가 없다. 초등학교뿐 아니라 엄격하기로 소문난 4구의 샤를마뉴 중학교에 갔는데도 역시 등수는 없었다. 고등학교에 가도 마찬가지다. 중학교에서부터 학업에 대한 평가가 축하합니다”, “잘했습니다”, “열심히 하세요등의 등급으로 매겨지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아이들이 얻은 점수대로만 주는 것이 아니라, 점수는 좋았으나 학습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은 경우는 점수가 좋아도 축하합니다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등수의 부재가 베푸는 미덕은 무한하다. 먼저 아이들은 쉽게 우정을 지킬 수 있다.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특별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면, 공부를 잘하는 것은 한 아이가 갖는 특징 중 하나가 될 뿐이다.

 

어린 시절 아이는 부모를 영웅으로 생각한다. 내 부모는 뭐든 모르는 것이 없고 나의 모든 꿈을 실현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아이가 커가면서 부모에 대한 시선을 달라진다. 부모가 허점투성이의 평범한 어른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망도 한다. 그러나 신뢰와 사랑으로 구축된 부모와 자식 사이라면 아이들은 청소년기에 이르러도 막말을 한다거나 부모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과도하게 사춘기를 앓는 아이는 부모의 부족했던 애정에 신호를 보내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 모든 신호를 유심히 관찰하고 반응해야 한다.

행복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계속 행복을 유지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 아이가 지금 행복한가. 이 아이가 계속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무엇을 도와야 할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평소에 늘 행복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한다. 부모와 교사는 그것을 도와주는 사람이다.

 

프랑스 학교에 가정 과목은 없는 대신, 남녀 모두 기술 과목을 배운다. 요즘 아이가 열성을 다해 몰두하고 있는 기술 수업의 프로젝트는 나무 위에 짓는 오두막집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저마다 로빈슨 크루소가 되는 것이 꿈이기라도 한 듯, 숲 비슷한 곳에 가기만 하면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나무를 모아 오두막집을 지으려고 달려든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여성 엔지니어, 건축가들이 이 나라에 있는 거구나 싶다.

 

프랑스 공교육 속에서는 크로스오버가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아카데믹한 틀 안에서의 교육 내용과 현실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 사이의 경계가 또렷하지 않다. 이른바 진도를 나가는 와중에도 우리가 현실에서 중요하게 포착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면 서슴지 않고 문을 열어 거기에 다가선다.

교과과정에 갇히지 않고, 입시에서 좋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이 없기 때문에 허용되는 일상적 일탈이다. 세상과 쉽게 통하는 가르침이기에 학교는 아이들에게 유용한 곳이라는 신뢰를 얻게 된다. 학원이 끼어들 틈이 없다. 교사가 교과서대로만 진도를 맞추는 대신 현실의 흐름에 따라 경계를 넘나들며 크로스오버를 하는데 어떤 학원이 여기에 장단을 맞출 수가 있겠는가

프랑스에서는 사교육을 위한 학원 시스템은 없지만 가정교사는 있다. 가정교사의 역할은 한정적이다. 부모도 교사도 아닌 제3자로서 일시적인 슬럼프에 빠진 아이에게 로프를 던져주어 나오게 하거나,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부모가 안심하기 위한 보험용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 교육에 근본적으로 학원시스템이 불가능한 것은 학교에서 교사마다 다른 것을 가르치는 까닭이다.

 

프랑스 교육부의 철학 바칼로레아 담당 교육감은 이 시험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철학 수업을 통한 우리의 목표는 학생들이 생각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자 시민으로 완성될 수 있도록, 그들이 건설적인 생각의 자유를 획득 공화국 프랑스의 이상 실현에 기여하길 바란다

나만의 사고 체계, 세계관 없이 세상에 발을 딛는 청년에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바로 대세를 좇는 삶이다. 자기 세계관이 없으면 가장 번성한 종교인 자본주의가 그들의 사고를 점령하여 그들에게 대세를 좇게 하며 결국 박 터지는 경쟁 속에서 영혼을 탈취당할 것이다.

출제자의 의도를 잘 파악하여 그가 요구하는 정답을 맞히는 능력을 갖춘 체제 순응적인 엘리트를 길러낼 것인가.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여 세상의 모순에 과감히 문제를 제기하는,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될 시민들을 길러낼 것인가.

 

요즘처럼 마크롱의 대학 개혁 반대 집회나 철도 노동자들의 격렬한 파업 투쟁이 진행되는 기간이면 망아지 같던 고등학생들이 중학생과는 다른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들은 전국 조직을 가진 고교생연합회를 통해 파업을 결의하고 교문에 쓰레기통을 쌓아 봉쇄한 후 거리를 향한다.

교사들의 경우에도 이런 집회와 파업이 있는 날 교원노조를 통해 함께 다수가 파업을 하며, 이 파업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으로 교원의 지위에 위협이 가해지는 바 없듯이, 학생들 역시 전체 투표를 통해 결의된 파업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

사실 프랑스 고교생들의 정치 참여는 전혀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를 복기해보면, 금당 알 수 있다. 17~18세는 가장 빨리 피가 끓어오르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 조직에 눈뜨기 시작하는 나이다.

일제에 저항했던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인 유관순을 떠올려보자. 그녀는 당시 이화학당에 다니던 열일곱 살의 소녀였다. 1929년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도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대규모 항일운동이었다.

1960419혁명을 촉발시킨 것도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시위에 참여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죽음이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 항쟁에 수많은 고교생 시민군이 있었음도 알고 있다. 지난 촛불 정국 때 어른들이 국정농단 세력에 대한 질타에 머무르던 순간, 가장 먼저 혁명정부라는 어휘를 들고 거리를 누볐던 사람들은 바로 고등학생이었다.

지난 수십년간 건강한 사회 작동에 필요한 학생들의 참여를 입시 지옥에 철저히 가둔 한국 사회가 오히려 진단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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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학교 - 성미산학교의 마을 만들기
성미산학교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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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인해 거리’(사회적 거리)격리’(자가 격리)가 필수가 된 시점에 도시는 모여 살기에 적절한 공간이 아니다. 애초에 도시(都市)는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市場)이므로 사람이 잠을 자고 쉬는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는 과밀한 거대 도시를 줄여야 한다. 작고 작게 띄엄띄엄...

 

달리 얘기하자면 교환의 범위와 크기를 줄여야 한다. 될 수 있으면 자급자족하는 쪽으로. 거대 도시가 아니라 마을에 모여 살아야 한다. 그 속에서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 마을의 중심에는 학교가 있어야 한다. 어릴 때부터 마을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생각이 마음 속 깊이 뿌리 내리도록 키워야 한다.

 

도시에서 마을 학교를 꿈꾸고 현실로 일궈 내는 실험이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다. 바로 이 성미산 학교이다.

 

<밑줄>

장기적으로 볼 때 도시에서도 살림에 필요한 것을 자급해야 한다. 필요한 전부를 자급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겠지만(적절한 교환과 분업은 필요하다) 자립도를 꽤 높은 수준까지 올려야 한다.

지금 성미산학교의 가장 큰 과제는 마을에서 먹고사는모델을 몇가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마을 경제를 살리는 길이고, 학생들의 대안적 진로를 여는 일이고, 마을의 일꾼을 배출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졸업 이후 마을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는 풀무학교에 물어야 한다. 홍순명 선생이 들려주는 졸업생 이야기에는 졸업생 00이 마을에서 00을 했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물론 풀무학교는 농촌에 있고, 농업학교로 출발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도시에서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의하지는 않았다.

 

학생들이 단순히 관심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마을과 학교, 자신을 둘러싼 관계들을 고려하여 필요한 일을 찾아 배우면서 해결해 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속에서 배움의 과정을 스스로 기획해야 할 때도 있고 기존의 질서 속에서 겸손하게 일을 배워야 할 때도 있고 낯선 문화를 접하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해야 할 때도 있다. 이를 통해 좁게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감각을 갖게 될 것이고 넓게는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한 실천의 밑거름을 마련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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