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 문학
마종기 손명세 정과리 이병훈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문송이라는 말이 있다. 문과라서 죄송하다. 문과생이 이과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해서, 취업 시장이 이과생 위주라서 이런 말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문이과로 분리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일제의 잔재이다. 과거사 청산을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통섭이 미래의 생명줄이기 때문에 문이과는 통합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의학문학의 만남을 다룬 책을 읽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의사가 되려다 소설가가 된 루쉰, 의사이자 소설가였던 체호프 등을 읽으면서, 의학은 개인을 치료하고 문학은 사회를 치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의학문학은 '치유'라는 공통 분모를 가진 셈이다.

 

한편 이 책에선 매우 재미있는 글 한편을 발견할 수 있다. 2005년 황우석의 논문조작 사실이 보도되기 전 황우석의 글, ‘의료기술에 대한 문학적 과장 -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변명이다.

 

내가 보기엔 차라리 생명과학에 집착하는 문학자들이 미친 과학자들의 허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해결책이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점을 간파하는 영민한 사람들은, 흔히 예술가들이 그러한데, 희망보다는 가능한 파멸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파멸에 대한 집중은 곧잘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두려움은 쉽게 무조건적인 거부를 불러온다. 게다가 과학적 내용을 한낱 스릴러의 소재로 삼아 과장하고 왜곡하는 오늘 같은 상황에서야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문학(예술)이 과학의 문제를 제기하자, 그런 문학이 오히려 문제라는 지적에서, 왜 황우석이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다. 문학과 과학은 본디 하나인데 편의상 나눈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걸 굳이 구분하여 한쪽을 무시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밑줄>

의사 주인공들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은 체호프 자신이 보여준 직업적 개성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동료는 체호프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항상 주의 깊게 들었으며 심지어 환자가 병과 상관이 없는 잡답을 할 때조차도 지친 기색 없이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했다고 증언했다. 요컨대 환자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의사로서의 성실한 자세가 작품 속에서는 예술적인 변형을 거치면서 묘한 방식으로 실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체호프가 의사 활동을 시작한 1884년은 그가 결핵으로 객혈을 한 첫 해이기도 했다. 결국 이 병이 원인이 되어 그가 마흔넷이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했으니, 의사이자 작가인 체호프는 평생을 환자 체호프와도 함께한 셈이다. 의사 주인공과 환자 주인공 사이의 기묘한 친연성, 나아가 의사 주인공들 속에 잠재해 있는 질병의 이미지는 바로 체호프 자신의 그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전적으로 작가의 의도를 따르는 허구의 존재들이다. 요컨대 체호프의 의사 주인공들은 육체적인 증상의 근원에 자리잡은 내면의 병,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세계 자체의 질병을 응시하는 작가 체호프의 시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삶이 궁극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라면, 그것을 완전히 치료하겠다는 건 망상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체호프의 의사는 다만 진단을 내릴 뿐 처방을 해줄 수 없는 것이다. 체호프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작가는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는 사람이지 그것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다.”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약이 아니고 그 병을 직시하고 그 병과 함께 살아가는 용기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의사 체호프는 작가 체호프로 읽히기 시작한다. (박현섭 의학은 나의 아내요, 문학은 나의 애인 - 의사작가 체호프)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생명과학자들은 미친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보기엔 차라리 생명과학에 집착하는 문학자들이 미친 과학자들의 허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생명과학자들은 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들처럼 비밀리에 실험을 진행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하는 연구가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연구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과학 연구는 밀실에서 몇 사람만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규모화되고 사회적 관심의 중심이 되었다. 지난 수십년 간의 의학 연구와 관련하여 스캔들이 발생하곤 했다. 그때마다 과학자들은 그 교훈을 받아들이고 또 뼈저리게 반성했고 수많은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예를 드면 오늘날 저명한 과학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서는 임상실험심의위원회의 검토를 거치고 이의 확인서를 받아야 하며, 미국에서는 더 나아가 국가에서 연구비를 받는 연구의 진행자들은 반드시 윤리교육을 이수하도록 강제하고 있을 정도다. 이런 노력은 생명과학이야말로 다른 어떤 연구보다 윤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이런 생명과학 연구의 선두주자로서 이에 상응하는 윤리적, 법적 연구자들이 있다. 나는 생명의 존엄성과 연구의 윤리성을 강조하는 이들이 끊임없이 제기하는 비판이 사실은 나 같은 생명과학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도리어 우리나라에서는 생명 문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 없이 감정적이거나 일방적인 주장만이 난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두번째로 과학자에 대한 오해는 일반 대중이 가지고 있는 과학의 능력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한다. 과학자들은 본능적으로 줄기세포든 어떤 치료 방법이 되든, 또는 어떤 과학 기술의 발전이 되든지, 새로운 과학기술은 기존의 삶의 방식에 또 다른 유용한 도구를 더하는 것이지 모든 방법을 대체하고 발생 가능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물론 과학자들은 자신의 유용성을 절실히 신뢰하고 그런 믿음이 연구 과정에서 부딪치게 되는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는 힘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인식 때문에 과학자들이 사회가 모두 반대하는 실험을 강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의 한계를 잘 모르는 대중은 과학기술이 모든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사람들은 과학자들에게 희망을 건다. 그러나 모든 해결책이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점을 간파하는 영민한 사람들은, 흔히 예술가들이 그러한데, 희망보다는 가능한 파멸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파멸에 대한 집중은 곧잘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두려움은 쉽게 무조건적인 거부를 불러온다. 게다가 과학적 내용을 한낱 스릴러의 소재로 삼아 과장하고 왜곡하는 오늘 같은 상황에서야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1978년은 최초의 체외수정이 성공한 해다. 이때 매스미디어의 보도를 살펴보면 실제로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장 노동자와 트럭 운전사로 평범하게 살던 브라운 부부는 9년간의 결혼 생활에도 임신에 성공하지 못하자 새로운 방안을 찾게 되고 결국 산부인과 의사와 생리학자 에드워드의 도움(체외수정술을 시행했다)을 받아 임신에 성공, 임신 기간 중 미약한 임신중독증과 약간의 저체온을 제외하고는 정상인 루이스 조이 브라운을 출산하게 된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사흘 동안 1면 기사로 신기술의 개가를 기뻐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은 기사거리를 얻기 위해 무리한 제안을 했고, 또 일부 다른 언론은 사실을 왜곡하고 흥미 위주로 글을 게재했다. 예를 들면 언론은 루이스를 부모의 기여는 없이 제조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시험관 아기라고 불렀는데, 이 호칭 때문에 오랫동안 사회와 일반 대중은 이 신기술을 불안하게 여겨야 했다. 또 당시 언론은 불임을 해결하기 위한 이 기술을 유전자 조작과 등가물로 여기고는 끊임없이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거론했다. 이 최초의 시술은 25년 넘게 흘렀다. 이후 수천 수만의 체외수정은 안전하게 시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루이스 자신이 평범하고 또 건강한 여성으로 성장하여 이 기술의 안전성을 증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신기술은, 아니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어느 정도 부당하게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 (황우석 의료기술에 대한 문학적 과장 -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변명)

 

루쉰이 선택한 길은 일본 동북 지방의 한 도시에 자리 잡은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였다. 그리고 이 의학이라는 공부 길은 비단 루쉰만의 것은 아니었다. 신해혁명을 일으킨 쑨원도 한때는 광뚱에서 개업을 한 적이 있는 의사였고, 문학인으로는 궈모뤄 역시 의사 지망생이었다. 당시 중국의 별명은 동아병부(東亞病夫)’ 곧 동아시아의 병든 남정네였고, 그 병든 남정네를 치유하겠다는 뜻을 세운 젊은이들이 의학이라는 길을 선택했다고 보면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센다이에서 의학도의 길을 착실히 걷고 있던 루쉰에게 뜻하지 않은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세칭 환등기 사건이 그것이다. 어느날 수업이 휴강을 하자 빈 시간을 메울 양으로 학생들에게 우연히 제공된 것이 환등기를 통한 전황 사진이었다. 그 무렵을 전후해서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일본의 전과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 필름 안에는 루신의 눈길을 잡아끈 장면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일본 군인이 긴 칼을 뽑아들고 중국인의 목을 베는 장면이었다. 루쉰의 동포이기도 한 그 중국인의 죄목은 러시아 군대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것이고, 그 주변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구경을 하고 있는 군상들은 모두 중국인들이었다. 하나같이 넋이 나가 얼굴로 자기 동포가 다른 나라 사람에게 처형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 서 있는 광경인 것이다.

루쉰은 그 장면을 본 것을 계기로 인생의 진로가 바뀌고 만다. 빙 둘러싼 채 그 광경을 구경하는 중국인들. 허우대는 멀쩡하건만 얼이 빠지고 넋이 나간 형상인 것이다. 중국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의 치료가 아니라 정신의 치료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그 영혼을 치료하려면 어쩌면 의학이 아니라도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영혼을 치료하려는 길, 곧 문학이라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유중하 루쉰이 그린 최초의 근대인,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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