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소설로 배우는 인간관계 3 평화를 만드는 소설 읽기
따돌림사회연구모임 서사교육팀 지음 / 작은숲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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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이 집 아저씨더러 하등동물이란다. 병자 고름 긁어서 돈이나 모을 줄 알았지, 세상이 곤두서건 인간이 돼지가 되건 감각도 못허구, 그저 맛있는 음식에 좋은 옷, 편안헌 집에서 호박 같은 마나님이나 이뻐허구. 그런 것밖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구.”

 

“천민! 속물! 세상이 곤두서는 데는 태평이면서, 옷 좀 거꾸로 입는 건 저대지 야단이야”

 

“이 동물아! 내가 이렇게 꼼짝 않구서 처박혀만 있으니깐, 아무 내력 없이 그리는 줄 알아? 나는 이게 싸움이라구, 이래봬두. 더위가 나를 볶으니까, 누가 못 견디나 보자구 맞겨누는 싸움이야, 싸움!”

 

“속 모르는 소리 말아. 이걸 떠억 입구 이걸 푸욱 눌러쓰구, 저 이글이글한 불볕에, 어때? 온갖 인간들이 더위에 항복하는 백기 대신 최저한도루다가 엷구 시원한 옷을 입구서 그리구서 허어덕허억 쩔쩔매구 다니는 종로 한복판에 가 당당하게 겨울옷을 입구서 처억 버티구 섰는 맛이라니! 그게 어떻게 통쾌했는데!”

 

채만식 소설 ‘소망’에서 서술자의 남편은 ‘곤두서는 세상’에서 ‘태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천민, 속물, 하등동물’이라 욕하며, ‘불볕 더위’에 ‘겨울옷’을 입고 ‘종로 한복판’에 ‘버티고 서있는’ 저항을 한다. 서술자는 남편이 미쳤다고 생각해서 신경과 의사에게 진료를 의뢰하려 한다.

 

남편은 정말 미쳤을까? 적어도 그가 세상에 ‘부적응’하고 있는 것엔 틀림이 없다.

 

“남들은 다 같이 대학을 마치구 나와서두 삼사 년씩 취직을 못해 쩔쩔매는 세상에, 그해 동경서 나오던 걸루 신문사에 들어갔구, 인해 오년이나 말썽없이 있어 왔으니깐. 그만하면 신문사 인심두 얻구 또 사장도 자별하게 대접을 했답디다. 그런 것을 헌신짝 벗어 내던지듯 내던지구는 사람마저 저 지경이 되었으니..... 허기는 눈동자가 옳게 박힌 놈은 이짓 못해 먹겠다고, 그 무렵에 바싹 더 침울해 허기는 했었지만서두”

 

동경으로 유학을 다녀와 신문사에서 정직원으로 오랫동안 인정을 받았으니 생계엔 지장이 없을 뿐더라 남부럽지 않게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눈동자가 옳게 박힌 놈은 이짓 못해 먹겠다’면서 사직원을 내고 나왔으니, 그가 일부러 세상에 부적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면 부적응은 무조건 나쁜 것일까? 일제 강점기 시대에 언론인으로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기는커녕,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일제를 찬양하는 것이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라면? 그 적응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면 누가 제정신일 수 있겠소? 너무 똑바른 정신을 가진 것이 미친 짓이오!" (세르반테스 - ‘돈키호테’ 中)

 

미친 세상에 미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미친 세상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가족과 이웃에게 무조건 욕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한다고 미친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 미친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친 세상에 대응하는 방법을 달리 해야 한다.

 

세상이 미쳤으니 정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되, 그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낮은 자세로 친절하게 말해줘야 한다. 자칫하면 오히려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을 미쳤다고 생각하거나 불쾌감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쳐서 포기하지 않도록 늘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에 저항해야 한다. 마치 돈키호테처럼 말이다. 쉽게 해결될 것이란 기대를 가지면 쉽게 절망에 빠지고 절망에 빠지면 아예 희망을 갖지 않았던 것보다 더 깊은 열패감으로 완전히 반대의 사람이 되어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잘못을 고칠 줄 알며,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세르반테스 - ‘돈키호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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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전 창비교양문고 6
염상섭 지음 / 창비 /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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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만세 전의 겨울이 시간적 배경이다. '나'(이인화)는 동경(도쿄) 유학생으로 경성에 있는 아내가 위독하단 전보를 받고, 신호(고베), 하관(시모노세키), 부산, 김천을 거쳐 경성에 도착한다.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다시 일본을 향해 출발한다.

 

아내가 죽을 것 같다는 전보를 받고 아직 죽지는 않은게로군!”, 죽기 직전의 아내를 두고 어서 끝장이나 났으면!”, 죽은 아내에 대해 하나를 낳아 놓으니까 신진대사로 하나는 가야지요.”라고 말하는 남편이다.

 

가족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하니, 민족과 민중에 대한 인식 역시 지극히 개인적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출간된 소설이란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일제의 탄압으로 처음엔 연재가 중지되었으니까. 작가 염상섭이 일본 유학 중에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구속된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만세전의 주인공 이인화는 채만식 태평천하의 주인공 윤직원 영감처럼 비판을 하기 위해 만든 인물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이인화를 이해해 달라는 말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인화)를 이해하기 힘들다.


지금 우리 사회에 나는 만족하는가? 만족한다면 이유는 특별한 불이익을 받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러나 불만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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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간에 서로 믿는다는 것은 결국 사랑한다는 말이지만, 사랑한다는 것도 극단에 가서는 남이 나를 사랑하거나 말거나 저 혼자의 일이다. 저 사람이 받지 않더라도 자기가 사랑하고 싶으면, 자기가 만족할 데까지 사랑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사랑할 자유도 있거니와 사랑을 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부부간이라고 반드시 사랑하여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을까.

 

나는 그 소위 우국지사는 아니나 자기가 망국백성이라는 것은 어느 때나 잊지 않고 있기는 하다. 학교나 하숙에서 지내는 데는 일본사람과 오히려 서로 통사정을 하느니만큼 좀 낫다. 그러나 그외의 경우의 고통은 참을 수 없는 때가 많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망국백성이 된 지 벌써 근 십년 동안 인제는 무관심하도록 주위가 관대하게 내버려 두었었다. 도리어 소학교 시대에는 일본 교사와 충돌을 하고 퇴학을 하고 조선 역사를 가르치는 사립학교로 전학을 한다는 둥, 솔직한 어린 마음에 애국심이 비교적 열렬하였지마는, 차차 지각이 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간 후에는 간혹 심사 틀리는 일을 당하거나 일년에 한번씩 귀국하는 길에 하관에서는 부산, 경성에서 조사를 당하고, 성이 가시게 할 때는 귀찮기도 하고 분화기도 하지만는 그때뿐이요, 그리 적개심이나 반항심을 일으킬 기회가 적었었다.

 

덕의적 이론으로나 서적으로는 무산계급이라는 것처럼 우리 친구가 되고 우리 편이 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에 그들과 마주 딱 대하면 어쩐지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혹은 그들에 대한 혐오가 심하여지면 심하여질수록 그 원인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논법으로, 더욱더욱 그들을 위하여 일을 하여야 하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지는 모르나, 감정상으로 그들과 융합할 길이 없다는 것은 아마 엄연한 사실일 것 같다.

 

소위 구제니 자선이니 하는 것은 향기 있고 아름다운 말이나 행위로 알지만, 실상은 사회가 병들었다는 반증밖에 아니 되고, 그 어느 구석에든지 이기적 충동이 있다고 보이는데요.

 

인생의 이상이란 것은 나는 생각해 본 일도 없습니다마는, 구태여 말하자면 자기를 위하여 산다 할까요. 하지만 결코 천박한 이기주의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순사나 헌병이라도 조선인보다는 일본인 편이 나은 때가 많다. 일본 순사는 눈을 부라리고 그만둘 일도, 조선 순사는 짓궂이 뺨을 갈기고 으르렁대고서야 마는 것이 보통이다. 계모 시하에서 자라난 자식과 같은 심보다.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만나면 피차에 동정심이 날 때도 있지마는, 자기 자신의 처지에 스스로 불만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가 심하면 심할수록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더 밉고 보기싫어서 그런가 보다. 혹시는 제 분풀이를 여기다 하는 것일 것이다.

 

생각하면 조선사람이란 무엇에 써먹을 인종인지 모르겠다. 아침에도 한잔, 낮에도 한잔, 저녁에도 한잔, 있는 놈은 있어 한잔, 없는 놈은 없어 한잔이다. 부어라! 마셔라! 그리고 잊어버려라! 이것만이 그들의 인생관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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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 교회교육을 디자인하다
권순웅 외 지음 / 들음과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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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합동에서 코로나 이후의 교회교육에 대한 책을 냈습니다. 총신대 유아교육과/기독교교육과 교수들과 예장합동계열 교회(주다산, 하남) 목사들의 공동작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생긴 문제를 가정예배, 소규모 온라인 공부, 자연 속에서의 오프라인 만남 등으로 해결하자는 겁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코로나로 인해 생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코로나로 인해 드러난 기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말입니다.

 

따라서 코로나는 문제를 일으킨 악마가 아니라, 문제를 알려준 천사입니다.

 

<밑줄>

상호작용(소통)으로 교회의 변화가 있다. 성도의 피드백을 경청해야 한다. 불평을 조언으로 받으라.

 

여러 옵션과 개인 스타일의 사역. 성도의 기회를 고려한 접근이 필요하다. 일괄적인 방식은 비효율 문제를 넘어 거부감을 준다.

 

가정 예배는 가능한 온 가족이 모두 모인다. 찬송가 한 장을 부르고, 본문 말씀을 2회 이상 읽고 가족 구성원이 돌아가면서 각자 깨달은 점을 나눈다. 가장이나 예배 인도자가 가정 예배 순서지를 참고하여 말씀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한다. 다음으로, 본문을 다시 읽고 주기도문으로 마친다.

 

구글 미트를 사용하여 온라인 제자훈련을 진행하는 담당 교역자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노트북을 사용했고, 학생들은 모바일 또는 pc를 통해 접속한다. 학생들이 한 주간 삶 속에서 은혜 받은 이야기 및 제자 훈련 과제를 어떻게 실천했는지 나눈다.

 

주일 오후 3시에는 온라인 음악 방송을 진행했다. 청년 임원들이 직접 구성하여 진행한 찬양과 기도 공유 프로그램이다. 코로나 19 사태로 교회에 직접 와서 예배를 드리지 못해 영적인 침체로 힘들었던 청년들을 위해 진행한 청년부 라이브 토크쇼로 일상의 은혜를 나누며 영적 회복을 도모했다.

 

변화를 거부하면 도태되고, 변화를 받아드리면 생존하고, 변화를 주도하면 길을 낸다.

 

교회는 본질인 공동체성을 지키고자 했고 아쉽게도 이는 교회의 공공성의 결여로 비추어지게 했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으로 성도들조차도 교회에 가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따라서 안전을 위한 방역은 물론이고 예배를 향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을 지양하고 개개인 또는 소그룹으로 활동하게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매주 15가정 정도를 선발하여 토일에 하남 교회 수양관에서 캠핑을 한다. 의미 있는 영화를 통해 부모와 자녀가 서로 공감하고 대화할 수 있도록 한다. 영화 감상 후 모닥불 토크 타임을 준비한다.

 

전통적인 가정예배는 대부분 부모 중심으로 구성되어 실행되고 있다. 즉 부모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며 기도 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의 가정예배는 다분히 인도자 중심이어서 유초등부 자녀들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결국 예배의 참여동기 및 예배 몰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코로나 19 시대 가정예배는 자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프로젝트 기반의 가정 예배이어야 한다.

 

랜선 주제 합창제는 여름성경학교 주제가를 개인이 녹화하여 하나로 합쳐 편집하는 프로그램이다. 교회마다 여름성경학교 주제와 그에 따른 주제가가 있다. 주제가를 학생들에게 파일로 보내주고 학생은 그 음악 파일을 틀어 놓고 이어폰으로 들으며 노래를 녹음한다. 녹음은 가급적 카메라가 있는 컴퓨터나 노트북을 활용하고 녹음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녹음한 후 저장한다. 이후 녹음파일을 교사 또는 교역자에게 보내고 교회에서는 학생들이 보내온 이 파일들을 편집하여 하나의 합창 파일을 만든다. 그리고 이 완성된 파일을 학생들에게 다시 보내서 자신들의 완성한 프로젝트를 다 같이 감상한다.

 

오프라인에서 했던 것을 그저 온라인으로 옮겨놓는다면 현장에서 했던 프로그램의 효과가 반감될 뿐이라며, 온라인에서는 새로운 성격의 시도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시도의 일환으로 최근 사역자들이 기획하여 가족과 공동체, 사역자를 서로 이어주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대화와 찬양, 무대 위와 무대 밖 성도들의 인터뷰가 어우러진 정서적인 온라인 라이브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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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범우문고 2
법정스님 지음 / 범우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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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이 1970년대 초반에 주로 신문사에 투고한 글들을 모아둔 책이다. 1932년생이시니 40대 초반에 쓰신 글이다. 비교적(?) 젊은 시절이라 그런지 사회에 날 선 비판이 곳곳에서 보인다. 현실 참여적이고, 타종교에 대해서 포용적인 태도가 50년이 훌쩍 지난 이 시점에 읽어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바꿔 말하면 50년이 넘도록 사회가 변화하지 않았다는 얘기ㅠ.

 

서민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 장려되고 있는 건축양식이 아파트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아파트가 본래의 건축 목적을 외면한 채 호화판으로 기울고 있으니 어떻게 된 노릇인가. 심지어 한 가구에 2천만 원짜리까지 있으니, 그것도 파격적인 가격이라고 한다니 서민들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아파트와 도서관 )”

 

요즘 아파트가 한채에 77억이 넘는다는 사실을 하늘에 계신 법정스님껜 안 알리는 게 낫겠다. 아니 알려야겠다. 부활하시어 부동산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부동산의 무소유, 공유를 위하여.

 

 

<밑줄>

복원된 불국사에서는 그윽한 풍경 소리 대신 씩씩하고 우렁찬 새마을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것 같다. (복원 불국사 )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 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에. (오해 )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 것을 (설해목 )

 

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관념이니까.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동화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미리 쓰는 유서 )

 

<리그 베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여러 종교를 두고 생각할 때 음미할 만한 말씀이다. 사실 진리는 하나인데 그 표현을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가끔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불교의 대장경을 읽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 조금도 낯설거나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 또한 기독교인이 빈 마음으로 대장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문제는 그릇된 고정관념 때문에 빈 마음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데서 이해가 되지 않고 있을 뿐인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표현을 빌리면, 종교란 가지가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가지로 보면 그 수가 많지만, 줄기로 보면 단 하나뿐이다. 똑같은 히말라야를 가지고 동쪽에서 보면 이렇고 서쪽에서 보면 저렇고 할 따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에 이르는 개별적인 길이다. 같은 목적에 이르는 길이라면 따로따로 길을 간다고 해서 조금도 허물될 것은 없다. 사실 종교는 인간의 수만큼 많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특유한 사고와 취미와 행동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목으로 기독교와 불교를 볼 때 털끝만치도 이질감이 생길 것 같지 않다. 기독교나 불교가 발상된 그 시대와 사회적인 배경으로 해서 종교적인 형태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이다. 종교는 인간이 보다 지혜롭고 자비스럽게 살기 위해 하나의 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서로 사랑하느냐에 의해서 이해의 농도가 달라질 것이다. 진정한 이해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요한의 첫째 편지> 412) ” (진리는 하나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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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나무야 -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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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님이 20년 징역과 7년 칩거 후에 국내를 여행하며 쓴 여행기입니다. 수차례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마음을 경건하게 해주는 경전입니다. 짧은 글들을 모아 놓은 얇은 책이지만 결코 짧지도 얇지도 않은 삶의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함께 들고 다니며 읽어도 좋습니다.

 

 

<밑줄>

갇힌 사람들에게 출소의 가장 큰 의미는 독보’(獨步)입니다.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위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고의 논리학인 수학은 언제나 등식을 기본으로 합니다.

평등의 철학 위에서 문제의 해결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난중일기에는 군관, 병사 그리고 마을의 고로(古老)와 노복들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운집 속에 서 있는 충무공의 모습이야말로 그의 참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탁월한 전략도 바로 이러한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연전연승 불패의 신화도 바로 이러한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군량도 병력도 이 풍부한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최초의 비구니 마하프라자파티가 싯다르타를 기른 그의 이모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런 의미로 가슴에 와닿습니다. 그녀가 생후 이레 만에 어머니를 여읜 어린 싯타르타를 길러내었듯이 지금도 백흥암의 비구니 스님들은 말없이 또 한 사람의 싯다르타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옛 사람들은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말라고 하는 무감어수의 경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만 그것이 바로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는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감어인.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과의 사업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보기를 이 금언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調)는 글자 그대로 말씀()을 두루() 아우르는 민주적 원리이며 화()는 쌀()을 나누어 먹는() 밥상공동체임에 틀임없습니다.

 

완만하면서도 무덤덤한 능선은 무언의 메시지였습니다. 무등산은 최고의 산이 아니라 무등(無等)의 산, 곧 평등(平等)의 산이었습니다. 평등은 단지 차별의 철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이야말로 자유의 최고치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물이고 평화로운 물이지만 이제부터는 하늘로 오르는 도약의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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