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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설로 배우는 인간관계 3 ㅣ 평화를 만드는 소설 읽기
따돌림사회연구모임 서사교육팀 지음 / 작은숲 / 2020년 4월
평점 :
“그이는 이 집 아저씨더러 하등동물이란다. 병자 고름 긁어서 돈이나 모을 줄 알았지, 세상이 곤두서건 인간이 돼지가 되건 감각도 못허구, 그저 맛있는 음식에 좋은 옷, 편안헌 집에서 호박 같은 마나님이나 이뻐허구. 그런 것밖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구.”
“천민! 속물! 세상이 곤두서는 데는 태평이면서, 옷 좀 거꾸로 입는 건 저대지 야단이야”
“이 동물아! 내가 이렇게 꼼짝 않구서 처박혀만 있으니깐, 아무 내력 없이 그리는 줄 알아? 나는 이게 싸움이라구, 이래봬두. 더위가 나를 볶으니까, 누가 못 견디나 보자구 맞겨누는 싸움이야, 싸움!”
“속 모르는 소리 말아. 이걸 떠억 입구 이걸 푸욱 눌러쓰구, 저 이글이글한 불볕에, 어때? 온갖 인간들이 더위에 항복하는 백기 대신 최저한도루다가 엷구 시원한 옷을 입구서 그리구서 허어덕허억 쩔쩔매구 다니는 종로 한복판에 가 당당하게 겨울옷을 입구서 처억 버티구 섰는 맛이라니! 그게 어떻게 통쾌했는데!”
채만식 소설 ‘소망’에서 서술자의 남편은 ‘곤두서는 세상’에서 ‘태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천민, 속물, 하등동물’이라 욕하며, ‘불볕 더위’에 ‘겨울옷’을 입고 ‘종로 한복판’에 ‘버티고 서있는’ 저항을 한다. 서술자는 남편이 미쳤다고 생각해서 신경과 의사에게 진료를 의뢰하려 한다.
남편은 정말 미쳤을까? 적어도 그가 세상에 ‘부적응’하고 있는 것엔 틀림이 없다.
“남들은 다 같이 대학을 마치구 나와서두 삼사 년씩 취직을 못해 쩔쩔매는 세상에, 그해 동경서 나오던 걸루 신문사에 들어갔구, 인해 오년이나 말썽없이 있어 왔으니깐. 그만하면 신문사 인심두 얻구 또 사장도 자별하게 대접을 했답디다. 그런 것을 헌신짝 벗어 내던지듯 내던지구는 사람마저 저 지경이 되었으니..... 허기는 눈동자가 옳게 박힌 놈은 이짓 못해 먹겠다고, 그 무렵에 바싹 더 침울해 허기는 했었지만서두”
동경으로 유학을 다녀와 신문사에서 정직원으로 오랫동안 인정을 받았으니 생계엔 지장이 없을 뿐더라 남부럽지 않게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눈동자가 옳게 박힌 놈은 이짓 못해 먹겠다’면서 사직원을 내고 나왔으니, 그가 일부러 세상에 부적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면 부적응은 무조건 나쁜 것일까? 일제 강점기 시대에 언론인으로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기는커녕,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일제를 찬양하는 것이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라면? 그 적응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면 누가 제정신일 수 있겠소? 너무 똑바른 정신을 가진 것이 미친 짓이오!" (세르반테스 - ‘돈키호테’ 中)
미친 세상에 미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미친 세상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가족과 이웃에게 무조건 욕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한다고 미친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 미친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친 세상에 대응하는 방법을 달리 해야 한다.
세상이 미쳤으니 정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되, 그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낮은 자세로 친절하게 말해줘야 한다. 자칫하면 오히려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을 미쳤다고 생각하거나 불쾌감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쳐서 포기하지 않도록 늘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에 저항해야 한다. 마치 돈키호테처럼 말이다. 쉽게 해결될 것이란 기대를 가지면 쉽게 절망에 빠지고 절망에 빠지면 아예 희망을 갖지 않았던 것보다 더 깊은 열패감으로 완전히 반대의 사람이 되어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잘못을 고칠 줄 알며,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세르반테스 - ‘돈키호테’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