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범우문고 2
법정스님 지음 / 범우사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법정스님이 1970년대 초반에 주로 신문사에 투고한 글들을 모아둔 책이다. 1932년생이시니 40대 초반에 쓰신 글이다. 비교적(?) 젊은 시절이라 그런지 사회에 날 선 비판이 곳곳에서 보인다. 현실 참여적이고, 타종교에 대해서 포용적인 태도가 50년이 훌쩍 지난 이 시점에 읽어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바꿔 말하면 50년이 넘도록 사회가 변화하지 않았다는 얘기ㅠ.

 

서민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 장려되고 있는 건축양식이 아파트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아파트가 본래의 건축 목적을 외면한 채 호화판으로 기울고 있으니 어떻게 된 노릇인가. 심지어 한 가구에 2천만 원짜리까지 있으니, 그것도 파격적인 가격이라고 한다니 서민들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아파트와 도서관 )”

 

요즘 아파트가 한채에 77억이 넘는다는 사실을 하늘에 계신 법정스님껜 안 알리는 게 낫겠다. 아니 알려야겠다. 부활하시어 부동산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부동산의 무소유, 공유를 위하여.

 

 

<밑줄>

복원된 불국사에서는 그윽한 풍경 소리 대신 씩씩하고 우렁찬 새마을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것 같다. (복원 불국사 )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 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에. (오해 )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 것을 (설해목 )

 

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관념이니까.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동화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미리 쓰는 유서 )

 

<리그 베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여러 종교를 두고 생각할 때 음미할 만한 말씀이다. 사실 진리는 하나인데 그 표현을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가끔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불교의 대장경을 읽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 조금도 낯설거나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 또한 기독교인이 빈 마음으로 대장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문제는 그릇된 고정관념 때문에 빈 마음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데서 이해가 되지 않고 있을 뿐인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표현을 빌리면, 종교란 가지가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가지로 보면 그 수가 많지만, 줄기로 보면 단 하나뿐이다. 똑같은 히말라야를 가지고 동쪽에서 보면 이렇고 서쪽에서 보면 저렇고 할 따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에 이르는 개별적인 길이다. 같은 목적에 이르는 길이라면 따로따로 길을 간다고 해서 조금도 허물될 것은 없다. 사실 종교는 인간의 수만큼 많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특유한 사고와 취미와 행동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목으로 기독교와 불교를 볼 때 털끝만치도 이질감이 생길 것 같지 않다. 기독교나 불교가 발상된 그 시대와 사회적인 배경으로 해서 종교적인 형태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이다. 종교는 인간이 보다 지혜롭고 자비스럽게 살기 위해 하나의 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서로 사랑하느냐에 의해서 이해의 농도가 달라질 것이다. 진정한 이해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요한의 첫째 편지> 412) ” (진리는 하나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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