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로운 일상만 반복될 것 같은 수영장에서도 가금은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언젠가 어떤 아주머니는 수영모자와 물안경만 쓰고 샤워장을 나왔다. 샤워하느라 벗어놓은 수영복은 그대로 샤워기 조절 레버 위에 걸쳐둔 채였다. <중략> 다들 비슷비슷한 모습이어서 누가 조금 전 소동의 주인공인지 금세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태연하게 풀을 향해 걸어나오던 그 아주머니의 검은 사타구니와 늘어진 젖무덤만은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슬프다고도, 그렇다고 우습다고도 할 수 없는 기묘한 이미지였다. <중략> 왜 하필 그때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후로도 모욕을 받거나 궁지에 몰리면 여지없이 그 이미지가 집요하게 점멸하였다. 그러는 바람에 나는 모욕을 되갚아주거나 궁지를 탈출할 기력마저 잃어버리곤 하였다. 얼굴도 없이 오로지 몸통만으로 된 그 이미지는 마치 무슨 토르소 조각 같았다. 위기의 국면, 모멸의 순간마다 그 토르소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래? 힘 내라구! <중략> 토르소는 또 말했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그렇게 뛰쳐나가기 전까진 나도 멀쩡한 인간이었다구. 너 따위의 머릿속에 토르소로 남기는 싫었다구. <후략> --- '오빠가 돌아왔다' 너의 의미 中 ---

'도날드 닭'을 그린 이우일의 그림이다. 저 그림과 글을 보고 나는 교훈을 하나 얻었다. 아니, 결의를 다졌다는 표현이 더 맞으려나? "혹여나 수영복을 잊고 풀에 나가는 사태를 맞더라도, 누군가의 머리 속에 위기와 모멸의 토르소로 남으면 안 되겠다!" -.- 내 머리 속은 나도 이해 못하겠다. <샤워장을 나서기 전엔 꼭 수영복을 체크하자> 뭐, 그런 것도 아니고...

여하간, 저 그림은 왠지 슬프다. 고대 다산을 상징하는 미의 여신상과 같은 외형을 하고 있지만, 이젠 아무도 저런 모습을 아름답고 풍요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슬픈 토르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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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3-1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진 뱃살이 서글퍼질 때, 목욕탕에서 팽팽한 가슴을 보면 부러울 때, 있어요.
그럴 때 마냥 내 육신이 슬퍼지지만 다른 맘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몸에 애정을 기울이면
마음은 20대로 되려나요. 적어도 몸을 과소평가하진 말아야겠다는 생각, 나이가 들수록 새록새록해요.

Smila 2004-03-20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장면이 계속 머리에서 사라지지가 않더군요. 사실 어떤 실내 수영장이건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는 전설은 다 있잖아요^^ 문제는 수영복을 잊고 나온 여인이 20대 초반의 처녀인 경우는 거의 없다는 거죠. 다 아줌마죠.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사실조차 때때로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육체에 대한 무관심이 가슴아프더라구요.

진/우맘 2004-03-20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을 과소평가 하지 말자.
육체에 대한 무관심.
흠....

가을산 2004-03-20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대학생 때 20대 초반 총각이 같은 사건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다. 전혀 고의가 아니게!
그림.. 머리가 너무 생략되어서 몸이 더 슬퍼보이네요.
중년의 몸을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오히려 중년이 되면서 '날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좋지 않나요? 전 20대 때도 날씬한 것과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좋던데요. --a
그리고 몇년만 더 지나 생리에서 해방될 날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진/우맘 2004-03-20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가을산님. 엄마나 선배들 얘기 들어보면, 폐경으로 인해 심한 정신적 공황을 겪던걸요!

가을산 2004-03-20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받아들이기 나름인 것 같아요.
호르몬 발란스가 깨져서 오는 증상으로 고생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그거라면 약이 있구요..
증상보다 '끝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해방이다'라고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어요.
저도 정작 그 나이가 되면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이왕이면 '해방'으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마립간 2004-03-21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이미지를 빌겠습니다. 허락해 주실거죠.

나그네 2016-10-24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용하신 책의 제목이 정확히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