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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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중그네>로 제131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오쿠다 히데오의 최신작입니다. 전작에서 다양한 강박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독특한 방법으로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이라부'를 유머러스하게 그려내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이번 신작 <남쪽으로 튀어>도 아주 유쾌하고 훈훈한 가족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네요. <공중그네>와 <인 더 풀>의 이라부 시리즈가 나오키상 수상작 치고는 좀 가볍고 허무맹랑했다는 불만이 있으신 분들도 이번 작품에서는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그만큼 재미있고 감동적인 성장소설+가족소설+풍자소설이거든요.

 

 도쿄에 사는 초등학교 6학년 지로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로 머리가 복잡한 소년입니다. 그 나이 또래에 겪는 몽정이나 스물스물 피어나는 성욕도 그렇지만, 돈을 가져오라고 협박하는 악마 같은 중학교 불량배도 무시 못할 고통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자칭 과격파 운동권 출신인 그는 '혁공동(아시아 혁명 공산자의자 동맹)'의 열혈 투사였습니다. 그러나 단체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내홍에 질린 그는 탈퇴 후 좌익과 우익을 모두 거부하는 극렬 아나키스트로 자처합니다. 세금? 절대 안 내죠. 아들의 학교? 다닐 필요 없대요. 국민연금? 국민연금을 낸다면 국민 관두겠답니다. 한 마디로 국기 기관 입장에선 '공공의 적'입니다.

 

놀라운 건,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랑스런 어머니 역시 '오차노미즈 대학의 잔다르크'라는 별명을 가진 투사 출신이라는 겁니다. 이제는 철지난 투쟁의 깃발을 여전히 높이 들고 21세기를 사는 이 부부의 아들은 지로는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눈을 돌리지 않는 부모(특히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전2권으로 이뤄진 이 작품의 1권에서는 우에하라 가족의 도쿄 생활기가 펼쳐지고, 2부에서는 국가의 모든 억압을 떠나 따뜻한 남국의 섬에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는 남쪽 생활기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지배자의 압박은 지상 낙원과도 같은 섬에까지 뻗쳐오고 맙니다. 우에하라 일가의 집터에 호텔을 짓겠다는 자본가와 관청이 연합해 그들의 집을 강제 철거하려고 합니다. 타고난 투사인 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리 없겠죠?

 

격렬했던 60년대 일본의 대학 투쟁을 바탕에 깔고 전개되는 일종의 후일담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우리나라 식의 재미없고, 패배주의적이거나, 혹은 자화자찬 식의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문학이 아니죠. 이 작품의 말미에서도 결국 강력한 정부의 공권력에 아버지 이치로는 패퇴하고 맙니다. 한 인간의 의지와 열정으로는 바꿀 수 없는 세상의 비애가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최후까지 투쟁하는 굳센 아버지의 모습은 그런 비애감을 뛰어넘는 위대한 인간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여기가 이 작품의 진짜 감동이 숨어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적고보니 마치 이 소설이 화염병이나 던지고 각목을 휘두르는 투쟁담에 불과한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남쪽으로 튀어>는 소년 지로의 눈에 비친 삭막한 도쿄의 현실이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지배자의 폭압, 어른들의 위선 등을 아주 '유머러스'하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다루고 있는 현실이 암담할수록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유머의 가치는 더욱 높아집니다. 진지한 주제지만 유머라는 당의정을 입혀 누구나 쉽게 접근하게 만드는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부분이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유머는 예컨대 이런 식입니다.

 

지로와 여동생 모모코는 의절한 엄마의 부모, 그러니까 외할머니 댁을 몰래 방문합니다. 뜻밖에 어마어마한 부자인 외가집을 보고 모모코는 말하죠.

"울 엄마,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란 딸이었네." 모모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가 보다."

"야반도주만 하지 않았으면 나도 저 집 아이가 됐을 텐데."

"바보, 엄마가 아버지하고 도망치지 않았으면 너는 태어나지도 않았어."

초등학교 4학년은 아직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좀더 풍자적인 예를 찾아볼까요. 2권 남쪽 섬을 철거하려는 정부, 자본가 세력과 우에하라 일가의 대결을 취재하는 매스컴 관계자들의 싸움입니다.

"어이, 아이들은 끌어들이지 마!" 다른 기자가 옆에서 거칠게 소리쳤다. "아이들 코멘트는 따지 않기로 합의했잖아."

"내가 언제 코멘트를 받았다고 그래? 나는 우에하라 씨에게 연락을 좀 해달라는 것뿐이야." 즉각 사납게 대든다. 모모코가 겁에 질려 지로의 등 뒤에 숨었다.

........

"아무튼 부부 이외에는 취재하지 않는다는 게 규칙이니까 그렇게 해달라고. 그걸 지키지 않으면 공동회견 떄는 뺄 거야."

"이 새끼, 총무 한 번 맡더니 이래저래 제멋대로 하고 있어."

"이봐, 말조심해." 기자가 얼굴을 붉혔다.

"제1선은 우리야. 나중에 왔으면서 무슨 잔소리냐고."

"이봐, 어지간히 해. 아이들 앞에서 어른들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다시 다른 기자가 끼어들었다.

"부끄러운 줄 알라고? 너희 회사지, 그 가게 삼각김밥을 몽땅 사들인 게?"

결국 기자 간의 취재 에티켓에 대한 논의는 삼각김밥으로 귀결되고 말았네요. ^^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작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지로는 우에하라 일가의 조상으로 짐작되는 아카하치에 대한 동화를 발견합니다. 아카하치는 아버지 이치로와 마찬가지로 타고난 반골에, 물러서지 않는 투사 기질을 가지고 있는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카하치는 동화 속에서 서양에서 온 배의 선원과 일본의 무녀 사이에서 난 아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순수 일본인이라고 할 수 는 없는 거였죠. 그러고 보니 아버지 이치로도 눈썹이나 머리 색깔이 붉습니다. 작가는 이제 토종 일본인 중에는 이런 기백있는 인물이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섬나라 일본인의 편협함, 용기없음 등을 비꼬려고 했다는 건 제 억측에 불과할 뿐일까요?

 

<남쪽으로 튀어>를 읽다보면 정말 모든 강요된 국가의 통제를 넘어 따뜻한 남쪽섬으로 가고 싶습니다. 세금도, 교육도, 전쟁도 없는 평화롭고 경치좋은 곳으로 말예요. 국가라는 것이 결국은 지배자의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은 아닐까 생각해보게도 되고요. 이 책을 읽으실 분들은 인간의 행복에 꼭 국가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투쟁을 보고 한뼘쯤 커버린 지로의 성장기로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로 이어져 있는 가족의 사랑을 그리는 가족소설로도, 현대사회에 대한 풍자소설로도, 유쾌한 재담으로 가득찬 유머소설로도 모두 만족스런 소설입니다. 반드시 읽어보시길...

 

마지막으로 여기나 거기나 일부 운동권의 폐해는 똑같이 심각한가 봅니다. 예전의 기억에 젖어 자랑질만 일삼는, 사회에 별 도움 안 되는 쓸모없는 운동권 잔당들에게 작품에 등장하는 이 대사를 바칩니다. 지로의 남쪽섬 친구 나나에의 대사입니다.

"아니, 상관없어. 멀쩡한 어른이 제대로 일도 안 하면서 반대운동은 무슨 반대운동이야?"

"그래?"

"글쎄, 초등학생에게는 제대로 설명을 못하겠다만, 뭐랄까, 일하기 싫은 거, 돈 못 버는 거, 출세하지 못한 거를 무슨 간판처럼 내세우는 것 같아. 무조건 정의만 부르짖으면 다들 아무 말도 안할 줄 아나 봐."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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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06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다양한 소재에 대한 안목이 부럽더군요. 쉽고 재미있게 읽게 만드는 능력도요.

비로그인 2006-08-07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섬으로 가고 싶어요~!

jedai2000 2006-08-07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맞습니다. 이런 작가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까지 썼다니 빨리 보고 싶을 뿐입니다. ^^

비숍님...모든 걸 잊고 떠나보시죠. ^^

oldhand 2006-08-0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

Koni 2006-08-07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재가 미묘해서 망설이던 책인데, jedai2000님 리뷰를 보고 읽기로 결정했어요.^^

jedai2000 2006-08-07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읽어보신 분들이 대체로 모두 만족하시는 분위기네요.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죠, ^^

냐오님...오, 영광입니다. 냐오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는 작품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