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서울역을 갔었다. 옛날가수 예민씨의 노래 중에 <서울역>이라는 명곡이 있는데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에 간 이유는 BOOK-OFF라는 일본 헌책방 체인점을 가보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는 굉장히 지점이 많다고 하나, 우리나라에서는 1호점이란다. 뭐 일본인들이 워낙 책을 많이 보고 또 책도 깨끗이 봐서 헌책방 문화가 굉장히 발달해 있다고 한다. 이 점은 우리나라와 비교되는데, 절판된 추리소설을 구하기 위해 국내 헌책방도 많이 돌아다녀봤지만 좁고 더럽고 영세하고 낙후된 곳 천지다. 특히 대부분의 운영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하시는데 살 책이 마땅한 것이 없어 그냥 나오려 하면 그순간부터 갑자기 밭은 기침을 컬럭컬럭 하신다. 여기서는 냉혈한이 아닌 이상에야 그냥 나올 수 없다. -_-;; 일종의 세련된 강매라고나 할까...

 

이렇게 낙후된 한국 헌책방과 비교해 보면 일본 BOOK-OFF는 확실히 다르다. 물론 한국 헌책방도 나름의 정서와 정감이 있지만 값싸고 깔끔하며 정리 정돈까지 잘되어 있는 BOOK-OFF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건 인지상정이리라. 아무튼 세계 최고의 질과 양을 자랑하는 일본추리소설을 기념삼아 몇 권 집어오려고 간 것이다. 물론 본인은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공부하고 있는 생초짜에 불과하다. 그나마 꼬부랑꼬부랑 비슷하게 생긴 글씨 때문에 맨날 까먹기 일쑤다. 하지만 평소의 지론, 무언가를 공부하고 싶으면 일단 사고 봐라, 그러면 나중에 사놓은 돈이 아까워서라도 공부하게 될 것이다를 실현하기 위해서 무조건 책을 사고 봤다.

 

사진을 작게 줄여 거의 알아보기 힘들텐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츠사마' 츠츠이 야스타카 옹의 대표작 <부호형사>다. 여형사가 사실 어마어마한 재벌의 후계자라 돈을 쳐발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위트와 재미가 만점인 작품이란다. 알만한 분은 다 아는 츠츠이 야스타카의 놀라운 재미를 생각해 보면 기대가 커진다...하지만 언제 읽을 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른 작품은 다카하시 카즈히코의 <용의 상자>라는 제목. 굉장히 유명한 작가지만 국내에는 단편집 하나만 나왔다. 이건 그냥 기념으로..  ^^;; 여기까지가 6,500원이었다. 책 상태도 좋은데 저렴하기도 하지...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소설 중 한 편인 <불야성 Sleepless Town>이다. 하세 세이슈라는 작가가 썼는데 표지에서 알 수 있듯 금성무 주연으로 영화화된 적도 있다. 스트리트 크라임 노벨이라는 별명을 내 멋대로 붙여준 작품으로 암흑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혼혈아 류젠이의 악몽같은 3일을 그리고 있다. 빠르고 박력 넘치고 한계를 넘는 강렬함으로 도배된 소설이다. 반드시 읽어보시길...

 

 

  이 사람이 바로 작가인 하세 세이슈다. 하세 세이슈는 한자로 '馳星周'라고 쓰는데 읽어보면 '치성주'이다. 누군가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 않는가? 그렇다. 이 작가는 주성치를 너무 좋아해 필명을 주성치를 거꾸로 해서 붙였단다. 이 사람 어떤 사람일지 감이 팍 오지 않나? 아주 쌈마이 정서가 생활화된 사람인 것이다. <불야성>에도 정상적인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 류젠이는 17세에 사람을 죽이고 남자를 강간한 엽기적인 인물이다. 이런 정 안가는 인물을 갖고 그토록 뛰어난 소설을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웹서핑하다 발견한 사진인데, 작가 하세 세이슈가 그렇게 좋아하는 주성치를 만나 파안대소하는 장면이란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폭력적이고 막 나가는 사람은 전혀 아닌데, 이상하게 하세 세이슈는 마음에 든다. 인간 세상을 정글에 비유해 내가 살려면 남을 죽여야 한다는 식의 극단적인 세계관도 좋고, 섭씨 2만도는 될듯한 들끓는 열기로 가득찬 작품의 분위기도 좋다. 한 마디로 좋아하는 독자는 아주 미칠 지경이고, 싫어하는 작가는 거품을 물고 씹는 그런 작가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자랑질이다. 어제 무심코 집은 <불야성> 문고본에 하세 세이슈의 친필 사인이 있었던 것이다. 분위기를 보니 1999년 7월 25일에 00씨에게 드린 책 같은데, 이 정신병자 같은 인간이 헌책방에 팔아버린 것 같다. 나 같으면 가문의 무한한 영광일텐데 팔아 버리다니 배짱도 좋다. 어쩌면 무심코 읽어보고 작품에 등장한 폭력신, 섹스신에 넌더리가 나서 팔아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어떻게 돌고돌아 한국에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하세 세이슈의 진가를 너무도 잘 아는, 친필 사인을 너무너무 받고 싶은, <불야성>같은 명작을 쓰고 싶은 본인에게 온 것은 일종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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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4-20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어도 읽으시는구요. 흑! 부럽습니다 ㅠ.ㅠ

jedai2000 2006-04-20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_-;; 저 하나도 못 읽어요. 언젠가 일어공부를 해서 읽으려고 그냥 사둔 거예요..^^;;

nemuko 2006-04-2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어...저도 북오프에서 불야성 샀는데 잘 뒤졌으면 사인본 가졌을텐데..으흑...
그래도 팬인 제다이님 손에 들어간 게 훨씬 다행이예요. 저라면 낙서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jedai2000 2006-04-21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하하 운이 좋았죠. 같이 가신 분도 내노라하는 하세 세이슈 팬인데 제가 먼저 챙기게 되었습니다. 네무코님이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는데 읽어볼 만한 작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다음에는 하세 세이슈 사인을 직접 받는 걸 목표로 정진하겠습니다..^^;;

oldhand 2006-04-2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공척씨의 女女탕탕과 크리스티의 공포의 肉女도 꼭 한번 보고 싶은 책입니다. ㅋㅋ

jedai2000 2006-04-2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그날 이야기 나온 얼 스탠리 가드너 원작, 사공척 번역, 제목 <女女탕탕>이군요. 완전 코미디네요..ㅋㅋ 삼박자가 딱딱 맞아 떨어져요..^^;;

panda78 2006-04-21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호형사 드라마는 별로던데, 원작은 재밌을 것같아요. ^^ 츠츠이 야스타카라니, 드라마의 인상만으론 무지 의왼데요? ^^;
저도 북 오프 가서 만화책이랑 쉬운 책 한두권 사 오고 싶네요. 요 며칠, 네무코님이 주신 호숫가 살인사건 원서를 보고 있는데, 하루에 두세 페이지가 한계군요. - _ -;;

jedai2000 2006-04-21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은 아주 유명합니다. 일본 미스터리 100선에도 들어갈 정도로 평이 좋아요. 츠츠이 선생이야 워낙 천재적인 작가니 뭘 써도 기본 재미 보증이니까요. ^^;; 북오프 한 번 놀러가세요. 2,000원 코너에서 잘 고르면 10,000원이면 다섯 권! ^^;;

BRINY 2006-05-06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호형사 드라마에서만 부호의 손녀딸인 여자 형사지, 원작은 본인이 부호인 남자 형사가 주인공이랍니다. 하세 세이슈의 친필 사인이 있는 책이라니, 부럽네요.

jedai2000 2006-05-0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아직 일본어를 못해 원작을 못 읽어봐서 그냥 드라마 내용이랑 비슷하겠거니 했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인데 언제 읽어볼 수 있을지 암담하네요. 하세 세이슈 친필 사인은 가끔 혼자 꺼내보면 실실 웃곤 합니다. 좋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