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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달 있었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탄 사람은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었다. 그는 <카포티>라는 작품에서 소설가이자 기자였던 트루먼 카포티 역할을 잘 소화해내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 트루먼 카포티는 1959년 실제 있었던 일가족 살해 사건의 범인들을 인터뷰하면서 그 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논픽션 소설의 명작 <인 콜드 블러드>. 영화는 이 당시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 집필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했다고 한다. <인 콜드 블러드>는 70년대에 국내에도 <냉혈>과 <냉혹>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고 하지만 실체를 볼 수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에 새로 번역된 책으로 잘 묶어져 나와 많은 독서가들을 기쁘게 하고 있다. 동시에 영화 <카포티>도 개봉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트루먼 카포티와 <인 콜드 블러드>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영화 개봉은 흥행성이 불투명하다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힘들 것 같다고 한다.
1959년 11월 15일 캔자스 주 홀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린다. 총성은 네 발이지만 결국 죽는 사람은 모두 여섯 명이 되는 '클러터 일가족 살해 사건'의 서막이 울린 것이다. 존경받는 농장 주인 허버트 클러터와 그의 부인 보니, 딸 낸시, 막내아들 캐년은 홀컴 마을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허버트 클러터씨의 아내인 보니가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옥의 티일뿐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으며, 이웃들에게는 사랑을 받았고, 가족들 끼리도 화목했다. 한 마디로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라는 것. 그러나 11월 15일의 가을 밤, 그들은 두 명의 낯선 방문객을 받고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떠나고 말았다.
홀컴 마을의 두 불청객, 페리 스미스와 딕 히콕은 도둑, 강도, 사기 행각을 아무 죄책감없이 저지리는 불량한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부유한 클러터 가를 털기 위해 자동차에 탔고, 1,287 킬로미터를 여행해, 그렇게 했다. 유감스럽게도 페리와 딕이 가져간 건 돈이 전부가 아니라, 클러터 가족의 목숨까지 함께였다는 게 비극의 씨앗이 된 셈이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여기까지 읽고, 필자에게 항의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범인을 밝혀 놓으면 무슨 재미로 읽냐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가 이 책에서 가장 뛰어나고, 비범하게 재미있는 부분이다. <인 콜드 블러드>는 전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작가 트루먼 카포티가 6년간 직접 범인들을 포함해 수천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써 내려간 진실의 기록이 바로 <인 콜드 블러드>인 것이다.
따라서 범인의 정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범인의 이름은 아예 처음부터 나온다. 작가는 책 앞머리에 이 책에 묘사된 것들은 전부 사실이라고 적어 놓았다. 저널리즘의 형식에 소설의 기법을 적용한 논픽션 소설의 출발점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4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거칠게 나누어 클러터 일가가 살아있었던 마지막 하루를 묘사하는 것이 첫 번째 장, 살해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들의 이야기, 페리와 딕의 도피행각과 체포, 그들의 재판과 교수형 장면이 마지막 장이다. 이 모든 실제 이야기들을 작가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작품 속에 생생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작가 트루먼 카포티는 대화의 94% 이상을 기억에 저장할 수 있는 비범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이렇듯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가 사건 관련자 모두를 취재해 기록한 이 작품에는 그날밤의 진실이 살아 숨쉬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취재와 인터뷰 등을 지루하게 나열하고 있지만은 않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등의 소설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가답게 사건 직전의 불길한 분위기, 홀컴 마을의 전원 풍경, 섬세한 인물의 내면 묘사 등에서 우수한 소설의 향기 또한 풍겨난다. 이런 점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를 보자. 일가족 살인 사건의 충격이 어느 정도 지나간 홀컴 마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 풍조가 나타난다. 문을 잠그고 자는 집이 없을 정도로 모두가 친하고 서로를 아는 시골 마을이 공포에 지배당하고 만 것이다. 그때만 해도 범인이 드러나지 않았을 때라, 마을 사람들은 범인이 이웃 중 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 이제 누구도 서로 믿지 못하는 미국의 현대적 삶이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싹 튼 불신 풍조는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사실성을 강조하는 신문 기사라면 결코 이런 사실이 아닌 부분을 적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트루먼 카포티는 이 비극적 사건에 내재하는 어떤 본질적인 것을 직시하고 있었고 이 작품에 그것을 녹여내고 있다. 그는 기자의 눈과 소설가의 가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 트루먼 카포티는 고향 친구였던 <앵무새 죽이기>의 하퍼 리와 함께 이 사건을 6년간 취재하고 집필한 끝에 결국 걸작 <인 콜드 블러드>를 완성한다. 이 작품으로 명예와 부를 누렸지만 사생활에 있어서 절제를 모르는 사람이라 약물 중독으로 죽었다. <인 콜드 블러드> 이후에 그럴듯한 작품을 남기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 작품 하나 만으로도 그는 불후의 업적을 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 콜드 블러드>는 그를 둘러싼 모순으로 가득찬 작품이다. 논픽션이면서 소설이라는 작법 상의 모순이 첫째라면, 범인 중 한 사람인 페리 스미스에 대한 애정의 모순이 두 번째이다. 작품을 읽다보면 그냥 불량끼 있는 건달풍의 딕 히콕보다는, 감성적이고 예술적 재능이 많은 신비로운 사나이 페리 스미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더욱 느낄 수 있는데, 항간에는 작가가 페리를 사랑해서 그랬다는 말도 떠돌았다. 실제로 페리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증명하는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작가는 페리가 빨리 사형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소설의 끝을 하루속히 냈으면 하는 욕망이 있었을테고, 주인공이 사형되는 극적인 결말이 작품의 성공을 더욱 높일 거라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애정을 느끼는 대상이 빨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 속의 격렬한 모순이 그 두 번째인 것이다. 이처럼 <인 콜드 블러드>는 모순으로 가득차 폭발할 듯한 작가의 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토록 진실한 이야기 속에서 이토록 개인적인 모순이라니...도무지 모를 작품이다. 하지만 단언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걸작이다.
"정말로 진지한 대작을 쓸 생각을 하고 있어. 그 작품은 소설과 아주 똑같을 거야. 한 가지 다른 점만 빼면. 그 안에 적힌 모든 단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진실이라는거지."
- 트루먼 카포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