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2009년에 출간된 책만을 포함하며, 당연히 국내에 출간된 모든 서양 미스터리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 리메이크된 <심플 플랜>은 예전 번역본으로 읽었지만, 2009년판은 읽지 못해 제외합니다.

 

 

5위 네 번째 문 - 폴 알테르 
 


 



 

 

 

 

 

'존 딕슨 카를 너무 많이 읽은 사나이', 폴 알테르의 국내 데뷔작. 프랑스 출신의 이 작가는 영국(혹은 미국)의 추리소설 거장 존 딕슨 카에 깊이 매료되어 카의 전매특허인 밀실, 불가능 범죄만을 다룬 본격 추리소설만 40권 가까이 쓴 걸물이다. 추리소설 황금기라 불리던 1930년대에도 프랑스 작가들은 퍼즐풍의 본격 추리소설은 그다지 다루지 않았거늘, 50년도 더 지난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이런 스타일을 고집하고 있다는 게 무척 이채롭다. 이 작가가 어찌나 카를 좋아하는지, 작중 배경도 1950년대 영국, 탐정 역을 맡은 앨런 트위스트(뭔가 상징적인 이름이다) 박사까지 등장인물 전원이 영국인이다.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있는 외딴집의 꼭대기층 다락방. 우연히 그 집에 세들어 살게 된 강령술사 부부는 자신들이 유령과 이야기를 나눠보겠다며, 방이 네 개 있는 꼭대기층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완벽한 밀실 상태로 봉인된 네 번째 방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데...줄거리만 보면 완벽하게 존 딕슨 카가 쓴 소설이다. 강령술과 밀실, 헛다리만 짚는 경찰 그리고 모두의 의표를 찌르는 명탐정의 활약까지.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물리 트릭과 후반부의 메타 픽션 장치 모두 훌륭하다. 폴 알테르가 그토록 동경하던 딕슨 카 역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수작. 전형적인 본격 추리소설의 요소들에 현대성을 가미시켜 모든 추리소설 팬을 만족시킬 수 있을 듯. 여담으로 작년에 존 딕슨 카의 작품이 4편이나 소개되어 카의 팬으로서 무척 행복했다(다 봤는데, 그중 <구부러진 경첩>이 제일 뛰어난 것 같다). 올해도 존 딕슨 카는 물론, 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폴 알테르의 작품을 더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남겨본다.

 

 

4위 폴링 엔젤 - 윌리엄 요르츠버그

 



 

 

 

 

 

 

미키 루크, 로버트 드니로 주연으로 유명한 <엔젤 하트>의 원작 소설. 영화를 못 본지라,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읽었다. 1950년대의 사설 탐정 해리 엔젤이 줄담배를 피우며 술을 홀짝이는 장면이 계속되자, 어느새 내 입가에는 흐뭇하는 미소가 감돈다. 아, 이 책 분위기에 흠뻑 젖을 수 있는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이로구나. 그러나 해리 엔젤에게 실종된 왕년의 인기 가수를 찾아달라는 의뢰인의 이름은 루이 사이퍼. 앤젤과 사이퍼라...여기서부터 느낌이 심상치 않더니,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온갖 섬찟한 악마 숭배 상징과 부두교 의식이 핏빛으로 책장을 피로 물들이는 오컬트 호러의 냄새도 짙게 풍겨온다. 대체 어떤 결말이 기다릴까 긴장하며 몰입하다 보니, 어느새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있었다. 미국 대중문화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레이먼드 챈들러풍의 하드보일드에, 당대(1970년대) 유행했던 <엑소시스트> <로즈마리의 아기> <오멘> 등의 오컬트가 결합되는 순간 마치 마법과도 같은 화학 작용이 발생하였다. 잠복, 미행, 격투와 추리 등 익숙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매력에 푹 빠져 읽을 독자들도, 악마가 등장하는 악몽 같은 공포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들도 모조리 매료시킬 대단한 작품. 결말의 반전은 지금 보기엔 어느 정도 빤하지만, 이런 류의 반전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출간 당시에는 대단한 화제가 되었을 것 같다(박찬욱 감독의 모 영화와 상당히 비슷한 반전이 아닌가 싶다). 올해 최고의 작품 중 한 편으로 정말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다. 심지어 보너스로 실린 아주 짧은 단편 <짝패>마저도 재미있다.

 

 

3위 두 번째 총성 - 앤소니 버클리 

 



 

 

 

 

 

 

앤소니 버클리는 우리나라에서 지명도가 코넌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에 미치지 못하지만, 추리소설사적으로는 그들 못지않게 중요한 거장이다. 본격 추리소설의 대가들이 활동했던 1930년대에 역시 뛰어난 필력을 과시했으며, 하나의 사건을 놓고 여러 명의 탐정이 각자의 해답을 발표하는 <독초콜릿 사건>이나 탐정이 아닌 살인자의 심리를 강조하는 <살의> 같은 작품들은 기존 추리소설의 클리쉐를 하나하나 타파하고자 했던 그의 혁명가적 면모를 보여준다. 1930년에 발표한 <두 번째 총성>에서도 그는 또 한 번 살인-수사-추리의 순서로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종래의 추리소설을 넘어서려 하는데, 본인이 쓴 작품의 서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마디로 탐정소설은 더 복잡해져야 합니다. 현실에서는 정말 평범한 살인 뒤에도 여러 감정과 극적인 상황, 미묘한 심리와 무모한 행동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이 추구하는 바가 되어야 하지만 진부한 탐정소설 속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면이지요." 아마도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그럴싸한 '추리'뿐 아니라, 그럴싸한 '소설'을 쓰고 싶었던 작가의 출사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과연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사건의 와중에 조금씩 싹트는 주인공들의 로맨스나 영국 시골 마을에서 사건에 휘말린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반응이라 작가의 실험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앤소니 버클리의 메인 탐정, 로저 셰링엄이 살인 연극과 똑같이 벌어진 진짜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친구를 변호한다. 그 친구는 사상 최악의 보수적인 샌님. 그러나 그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고로 무장한 신여성과 티격태격하다 점차 사랑에 빠지는 추리소설 역사상 최고의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다. 이들의 불꽃 튀기는 사랑 전쟁은 누구나 흠뻑 빠질 만하다. 그러나 주의하시라. 앤소니 버클리는 손꼽히는 '추리소설가'라 결말이 그리 말랑하지만은 않을 테니...

 

 

2위 시인 - 마이클 코넬리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미스터리 스릴러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마이클 코넬리의 대표작. 그는 LA의 외톨이 경관 해리 보슈 시리즈를 주로 쓰고 있는데, <시인>의 주인공은 신문기자 잭 매커보이다. 사망이나 부고 기사를 주로 다루는 그는 스스로를 '죽음 담당'이라 부르며 그럭저럭 제몫을 해낸다. 하지만 경찰로 일하는 자신의 쌍둥이형 숀의 자살을 통해, 가벼운 마음으로 쓰곤 했던 죽음 기사가 남겨진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를 깨닫고 절망한다. 어느 정도 상처를 극복했을 무렵, 잭은 에드거 앨런 포의 시구를 유서로 써놓고 자살한 형 말고도,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 역시 포의 시구절을 남기고 자살한 경관들이 즐비함을 발견한다. 경찰만을 노리는 새로운 연쇄살인범의 출현을 감지한 그는 기자의 본능인 특종과 형의 복수를 위해 사건의 한복판으로 곧장 뛰어든다! 죽음을 가볍게만 여겼던 주인공이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깨닫는 도입부부터 독자를 빨아들인다. 남의 죽음으로 장사를 했던 지난 날을 후회하며 진지하게 형의 죽음에 맞서는 주인공의 행동 동기는 독자와 주인공의 감정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듯. <양들의 침묵>으로 폭발했던 1990년대 사이코 스릴러의 유행 아래 나온 작품이지만, 내 생각에 그 이상이거나 적어도 비슷한 수준은 가는 것 같다. 사이코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소설이 항상 그렇듯 FBI들의 정교한 수사 방식 묘사도 등장하고, 영화화하기 딱 좋은 잔인한 살해 장면이나 주인공과 여수사관의 안타까운 로맨스, 무엇보다 독자의 주의를 온통 한쪽으로 쏠리게 한 다음 뒷통수를 치는 교묘한 반전 등 모든 게 일류의 솜씨다. 마이클 코넬리는 해리 보슈, 잭 매커보이, 미키 할러 등 자신의 주인공들을 매 작품마다 종횡으로 연결시키는데 명수다. 그러니까 미드로 치면 스핀오프 방식이랄까. 어느 작품에서 좋아했던 해리 보슈가 다른 작품에서는 조연으로 나오고, 이 작품에서 언뜻 언급되었던 사건이 다른 책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는 등 독자의 관심을 촉발시키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시인>은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장면도 허투루 볼 수 없는 빼어난 스릴러. 거의 완벽에 가깝다.

 

 

1위 차일드44 - 톰 롭 스미스 

 

 

 

 

 

 

 

 

스탈린 시대의 소련을 배경으로 경찰과 유아 연쇄살인범의 대결을 그린다. 아무래도 신인작가 톰 롭 스미스의 굉장한 데뷔작 <차일드44>의 가장 탁월한 점은 철의 장막으로 가려진 당시 소련의 사회 분위기를 손에 잡힐 듯 그려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KGB의 전신인 MGB에서 꽤 큰 신임을 받는 수사관 레오는 스파이로 의심받는 수의사를 체포하면서 최초로 완벽하다고 믿어왔던 이 노동자들의 천국에 의심을 품게 된다. 단지 미국 대사의 개를 치료해줬다는 것만으로 스파이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는 수의사가 억울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신탁이나 다름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상부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자신의 모습이 과연 옳은 걸까. 그러나 레오의 진정한 위기는 사형당한 수의사가 적어낸 동료 스파이 명단에 자신의 아내가 올라 있다는 걸 발견하고 나서부터 시작된다. 아내를 고발하고 살아남아 여태까지 누렸던 안락한 삶을 계속 유지하느냐, 아니면 아내와 함께 모든 걸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느냐. 초반부 레오의 이 도덕적 딜레마는 사회구성원 모두(심지어 가족까지도)가 서로를 감시하며, 한 발만 삐끗하면 곧바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스탈린 치하의 사회상을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줘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44명의 어린이를 살해한 연쇄살인범을 추격하는 레오의 가장 큰 고뇌 역시, 증거 부족이나 범인을 체포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소련의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의 천국. 그곳에는 공식적으로 범죄가 있어서는 안 된다. 누구나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회에 범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선동 문구가 거짓이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련 지도부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건을 은폐하고 오히려 기존 질서를 해한다는 명목 아래 레오를 처치하려 한다. 국가라는 가장 강대한 적에게 쫓기면서도 진실과 정의를 위해 끝까지 단념하지 않는 레오의 자유 의지는 너무나도 감동적이고, 레오의 열정이 점차 민초들에게 번져 대대적인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대목은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답다. 진실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으로 소설의 핵심 요소인 흥미와 문학성, 두 마리 토끼를 멋지게 잡은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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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0-02-0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럴 수가! <시인>만 읽었네요..ㅜㅜ <차일드44> 흥미롭습니다..^^

카스피 2010-02-02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딕슨 카를 너무 많이 읽은 사나이'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 작가의 작품이 나왔군요.어디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jedai2000 2010-02-02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차일드44> 아마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재미는 <시인>이 더 있었는데, 더 감동적이고 힘있는 작품이라서요...

카스피님...앗, 아닙니다. <존 딕슨 카를 너무 많이 읽은 사나이>는 윌리엄 브리텐(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인가 하는 작가의 작품입니다. 전 그냥 제목만 차용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