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2009년에 출간된 책만을 포함하며, 당연히 국내에 출간된 모든 일본 미스터리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5위 전설 없는 땅 - 후나도 요이치 




 

 

 

 

 

 

매년 일본에서 출간되는 미스터리를 대상으로 순위를 매기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의 최초 1위작. 열대 우림의 원시적인 생명력이 넘실거리는 남미라는 이국적인 배경 속에서, 욕망으로 꿈틀대는 일군의 거친 사나이들이 거액의 돈과 천연자원을 놓고 격돌한다. 작가 후나도 요이치는 국제 모험소설이라 불리는 이 장르의 장인으로, 국내에 그의 작품은 휴양지로 유명한 필리핀 세부의 참혹한 현실을 다룬 <무지개 골짜기의 5월>이 번역되어 있으며 그 외에 이 작품만 소개되었다. 기둥 줄거리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고전 명작 <7인의 사무라이>와 비슷한데, 7인의 용병(이중 2명이 일본인이다)이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땅을 빼앗으려는 베네수엘라의 자본가 집단에 맞서 콜럼비아 난민들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처절한 전쟁이 끝나고 민초들만 살아남아 다시금 삶을 살아가는 마지막 장면 역시 <7인의 사무라이>를 연상시킨다. 결국 역사의 승자는 몇 명의 영웅이 아니라,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어떠한 역경에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삶을 살아나가는 민초들이라는 걸 말하려는 작가의 메시지가 아닐까. 언뜻 보면 기관총과 폭탄이 난무하는 테스토스테론 과다분비 액션활극이라 할 수도 있지만, 30년 넘게 남미와 동남아 등을 누비며 직접 취재를 하고 당대 제3세계의 현실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책 속에 담아내는 후나도 요이치의 작품은 한 편의 인문서로서도 손색이 없으니 말초적인 재미에만 치중하는 여타의 활극과는 분명히 그 궤를 달리한다.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소설을 읽고 싶은 분에게 추천한다.
 
 
4위 죽음의 샘 - 미나가와 히로코 
 
  
  
 

 

 

 

 

 

독일 나치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애인의 군입대로 혼자 아이를 낳아야 하는 마르가레테는 '생명의 샘'이라는 뜻을 가진 레벤스보른 출산원에 입소한다. 당시는 인종주의나 우생학이 극에 달했던 시기라 우월한 아리안의 피를 가진 아이를 낳도록 나치 정부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레벤스보른에서 간호사 일을 하며 자신의 아이를 낳을 준비를 하던 마르가레테는 의사 클라우스 베셀만의 청혼을 받아들여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게 되지만, 동시에 그가 거둬들인 두 양자의 어머니 역할도 해야 한다. 그러나 궁극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클라우스는 점차 광기를 드러내며 그녀와 아이들을 압박하는데...작가는 10년에 달하는 자료조사와 구상 기간을 거쳐 완성했다고 하는데, 과연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나 헤르만 괴링 같은 실제 나치의 지도자들은 물론, 잔학한 생체실험으로 유명한 요제프 맹겔레 박사도 클라우스의 선배로 나오는 등 역사적 고증도 탄탄해 한마디로 묵직한 소설 읽는 맛이 있다. 또한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쓴 '나선형 폐성'이라는 수기를 일본 번역가가 일본어로 옮겼다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어 실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사실감을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나치가 행했던 생체실험과 인종 청소 등을 가감없이 보여줘 전쟁이 힘없는 여자와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가에 대한 가슴 아픈 진실을 알리며, 성악을 통해 극한의 미의식을 완성시키려 하는 클라우스의 광기는 미와 추, 예술 지상주의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든다. 일본 번역자 후기를 통해 한 번의 반전을 더 꾀하고 있는데, 분명 흥미로운 건 사실이지만 내내 진지했던 작품에 굳이 그런 기교까지 부릴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의문은 있다. 뛰어난 문장력과 신비스런 분위기, 생각지도 못했던 추리소설다운 트릭에 뜻밖의 반전까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다.
 
 
3위 방해자 - 오쿠다 히데오 
 
  
 

 

 

 

 

 

<공중그네>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폭소탄 유머소설가로 자리매김한 오쿠다 히데오가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미스터리 걸작. 두 아이의 엄마로 대형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림에 보태는 평범한 주부가 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다니는 작은 회사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 당시 유일하게 회사에 남아 있던 남편이 용의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소박한 행복에 서서히 균열이 오기 시작한다. 만약 내 남편이 범인이라면?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손가락질을 받고, 남편은 회사에서 해고되어 집 대출금조차 갚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고민은 나비 효과처럼 작은 실수들이 눈사태처럼 커져 언제든지 한순간에 아찔하게 추락해버릴 수 있는 현대인의 마음속 공포를 놀랍도록 날카롭게 자극한다. 한편 이 방화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는 교통사고로 임신 중인 아내를 잃고 불면증과 신경 쇠약에 시달리는데, 야쿠자와 결탁한 선배 형사를 감시하는 모두가 기피하는 더러운 일을 하다가 우연히 시비를 거는 동네 불량소년을 폭행해 목이 잘릴 판이다. 커다란 금전적 피해나 인명 사고도 없는 자그마한 방화 사건에 얽힌 주인공들의 내일은 이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암담하며, 누구나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는 우울한 운명의 소용돌이로 가득하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닥친 비극을 통해 현대 일본 사회를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같은 해에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과 느낌이 비슷하고, 어느 평범한 주부의 어쩔 수 없는 일탈 행동을 그려 강렬한 독서 체험을 선사하는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도 생각나는 줄거리다. 전 3권으로 출간되어 금전적인 부담이 있지만, 정말이지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박진감 넘치는 책으로 특히 2권 마지막 페이지에서 돋은 오싹한 소름은 지금도 생생하다.

 
2위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 야마구치 마사야 



 

 

 

 

 

  

1989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현재까지 일본 미스터리 사상 최고 걸작 중 한 편이라는 어마어마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 1998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가 뽑은 과거 10년간 베스트 1위, 20주년 기념 베스트에서는 2위(1위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도쿄 쇼겐샤 선정 본격 추리소설 100선에서도 당당히 1위를 기록, 타이틀 만으로는 국가대표급 추리소설이라 할 만하다. 최근 미국에서 시체가 되살아나는 믿지 못할 일들이 연속되는 가운데(작품 속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 기능한다), 뉴잉글랜드의 거대 장의업자 가문에서 벌어지는 연속 살인사건을 어쩌다 보니 '되살아난 시체'가 된 주인공 그린이 탐정이 되어 해결한다는 내용이다. 되살아난 시체들은 일단 죽었기 때문에 생체 활동이 멎어 서서히 썩어가는 애로사항은 있지만, 살아 있을 때와 동일한 지적 능력과 기억을 가지고 있어 충분히 탐정으로 활약할 수 있다. 보통 대부분의 미스터리는 금전적 동기나 입막음 등을 위해 누군가를 죽인 범인을 찾는 게 핵심적인 요소지만, 이 작품에서는 사람을 죽여도 곧바로 되살아나기 때문에 그런 일반적인 동기가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죽여봐야 얻을 수 있는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죽여야만 할까? 이 점을 치열하게 파고들면 이 복잡한 사건들의 진짜 얼개가 보일 거라는 힌트를 드리고 싶다. 일종의 좀비가 나오는 비현실적인 설정의 작품이지만, 어디까지나 추리소설, 그것도 독자와의 치열한 두뇌싸움과 앞뒤가 딱딱 맞는 논리성으로 충만한 본격 추리소설이다. 무엇보다 주인공 그린 자체가 '살아 있는 시체'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린의 경우를 통해 다른 '살아 있는 시체'의 능력이나 심리, 행동 원리 등을 철저히 분석할 수 있다. 이처럼 작가가 손에 쥔 모든 카드를 철저하게 공개하는 셈이니 어디서도 반칙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스쳐 지나가듯 언급되는 작은 설정이나 단서들까지 꼼꼼하게 따져가면 당신도 충분히 답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시체가 되살아나는 불가해한 '매직'을 철저한 '로직'으로 풀어내는 본격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1위 내가 죽인 소녀 - 하라 료 



 

 

 

 

 

 

일본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거장 하라 료의 두 번째 작품. 하라 료는 이 장르의 진정한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들을 수없이 읽고 충실하게 사숙한 끝에, 챈들러의 페르소나이자 셜록 홈스에 버금가는 영원한 탐정의 아이콘 '필립 말로'를 방불케 하는 사와자키 탐정을 창조했다. 전작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사와자키 탐정은 갈 데 없이 고독하고 황량한 내면을 드러내지만, 내게는 몰래 숨겨두고 있다가 가끔씩 꺼내 보이곤 하는 그의 따스한 품성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질 따름이다. 이번 작품에서 사와자키는 천재소녀 바이올리니스트의 유괴 사건에 휘말려 범인들에게 돈을 건네주고, 소녀를 되찾아오는 어려운 의뢰를 맡게 된다. 범인들이 시키는 대로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다 외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다른 2인조 불량배에게 습격을 받아 돈가방을 뺏기고 기절해버리는 사와자키. 그는 간신히 깨어났지만, 범인들은 원하는 장소에서 돈을 받지 못했으므로 계약은 종료됐다고 고한다. 결국 며칠 뒤 소녀는 시체로 발견되고 사와자키는 엄청난 자괴감에 빠져 절망한다. 내가 제대로 돈가방을 운반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녀가 죽었구나, 하고. 제목의 <내가 죽인 소녀>는 이런 의미다. 사와자키 탐정은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고 소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소녀 유괴 및 살해를 행한 진짜 범인들과 중간에 돈가방을 털어 모든 일을 꼬이게 만든 2인조 불량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별 볼일 없는 의뢰라고 생각했던 일 뒤에 엄청난 음모가 있었다는 플롯과 속도감 넘치는 전개, 여전히 하드보일드의 에센스를 간직한 근사한 문장의 향연이 펼쳐진다. 더구나 끝에는 웬만한 본격 미스터리를 능가하는 트릭과 반전까지 있으니, 읽는 동안 남은 페이지가 아까울 정도였다. 50쪽만 더 읽으면 끝이구나, 아깝다, 하며 안타까워 했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두 가지 면에서 일본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사건의 배후에 드러난 동기가 결국 일본적인 '폐'를 끼치지 않는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는 게 그 첫째다. 두 번째는 남의 것(특히 서양)을 가져와 일본식으로 아기자기하게 다듬어 때때로 원본보다 오히려 더 나은 걸 내놓는 전형적인 일본 문화가 떠올라서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문체나 분위기 등을 일본이라는 배경 속에 위화감 없이 녹여내고, 챈들러의 작품에는 부족했던 트릭이나 반전 같은 추리소설 장치들은 더욱 강화시킨 모양새가 딱 그렇지 않나.

 
베스트 단편

<고백> 중 '성직자' - 미나토 가나에 

 


              

 

 

 

 

 

2008년 일본 서점계를 휩쓸었던 작품. 판매만큼이나 비평적으로도 호평을 받아 신인 작가 미나토 가나에는 이 작품 한 편으로 그야말로 신데렐라로 부상했다. 어느 중학교에서 벌어진 몇 건의 살인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 각자의 시점에서 정말은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인가를 '고백'하는 형식으로 이뤄진 연작 단편집으로, 작가가 원래 공모전에 출품해 호평받은 첫 번째 단편 '성직자'의 뒷이야기를 이어서 쓴 것이다. 중학생 제자들의 장난으로 소중한 딸을 잃은 여교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복수를 한다는 내용의 단편 '성직자'는 전혀 피칠갑을 하지 않고도 조근조근히 서스펜스의 피치를 올려가다 결말에서 범인인 제자는 물론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까지 어마어마한 공포를 안겨주고 끝이 난다. 연작 단편집이니만큼 뒤에 실린 다른 단편들과 내용도 이어지고, 사실 뒷이야기들도 다 재미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이고, 모골이 송연했던 단편은 역시 '성직자'였기 때문에 <고백>이라는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을 시간이 없는 분들도 이 단편 하나만이라도 꼭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마음에 선정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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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0-01-2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위와 2위, 베스트 단편은 읽었네요^^;;; 선방했다는. '방해자'가 문득 읽고 싶어집니다~

이매지 2010-01-24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죽인 소녀, 살아있는 시체-는 읽으려고 쟁겨둔 책들인데,
전설 없는 땅은 이 참에 보관함에 쏙 넣었어요 :)

jedai2000 2010-01-25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방해자' 재미 보장입니다~ 제가 유독 좋게 본 건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3권을 빛의 속도로 읽었다능ㅎㅎ 회사에서도 몰래 보고 그랬답니다^^

이매지님...'내가 죽인 소녀'는 범행 동기가 심하게 일본적이라는 약점은 있지만, 그거야 일본에서 나온 책이니 당연한 거겠지용. 그 점만 양해해준다면 역대 최고작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전설없는 땅'도 읽는 내내 흥미로우실 겁니다^^

빅마마 2010-01-31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내가죽인 소녀만 읽었네요 전설없는 땅부터 언능 봐야겠습니다~

jedai2000 2010-02-01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빅마마님...부디 즐거운 독서하시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