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라이징
토머스 해리스 지음, 박슬라 옮김 / 창해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한니발 렉터 박사가 돌아왔다. 하지만 안 돌아왔어도 좋을 뻔했다. 아니,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 스릴러 장르의 영화와 소설을 통틀어서 우리 뇌리에 가장 인상적이고 공포스런 캐릭터로 남아 있는 한니발 렉터가 지금의 유명세를 얻게 된 건 1988년에 출간되고, 1991년에 영화화되어 전 세계적인 히트작이 된 <양들의 침묵> 때문이었다. 이 작품은 놀랍도록 치밀하고 탄탄한 줄거리에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엽기적인 살인마들의 끔찍한 범행에 대한 리얼한 묘사를 더하고, 한니발 렉터, 클라리스 스탈링, 잭 크로포드, 버팔로 빌까지 개성 넘치고 다차원적인 인물이 어우러져 커다란 성공작이 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조나단 드미 감독이 원작이 있는 영화는 항상 원작보다 못하다는 불문율을 깨고, 원작만큼의 혹은 원작보다 더 나은 완성도로 영화를 완성함으로써 소설과 영화 양쪽 모두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레드 드래곤>과 <양들의 침묵>에 등장하는 한니발 렉터는 악역이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연쇄살인범을 뒤쫓는 FBI 수사관보다, 한니발 렉터에 열광하게 된 건 많은 부분 한니발 렉터를 연기한 안소니 홉킨스 경의 신들린 연기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식인을 즐기면서도 어딘가 고상하고 기품이 흐르는 분위기와 뛰어난 정신의학 지식으로 날고 기는 수사관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노니는 지적인 모습만 보여주다,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마침내 감추어진 야수성을 폭발시키는 그의 강렬한 연기는 진정 영화 역사상 최고의 연기 중 하나로 꼽힐 만하다. 물론 원작이 한니발이라는 캐릭터의 토대를 마련해준 것이지만, 그 토대 위에서 마음껏 역량을 펼쳐보인 안소니 홉킨스 경의 역할도 못지않게 컸던 것이다. 소설이 영화의 기반이 되고, 영화는 소설을 더욱 빛내주었으니 아주 행복한 윈-윈 사례라고 하겠다.

 

이렇게 한니발의 인기가 대단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작가 토머스 해리스는 후속작에서 아예 한니발을 주인공으로 삼고 제목도 <한니발>로 붙여버린다. 전작의 후광을 업고 이 작품도 국제적인 성공작이 되긴 했지만, 한니발만큼의 인기가 있던 총명하고 굳센 신참 FBI수사관 클라리스 스탈링이라는 캐릭터를 완전히 망쳐버려(내 기준에선...) 개인적으로는 실패한 속편이라 본다. 그래도 여기까지면 어떻게든 참을 수 있다. <한니발>은 긴장감이나 치밀함 면에서는 전작만큼은 못해도 그런대로 봐줄 만은 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비밀스런 유년기를 그리는 <한니발 라이징>은 총체적인 실패작이다. 

 

리투아니아의 귀족 가문인 렉터 가는 2차대전이 발발하자 숲속의 은신처로 피난을 간다. 장남인 소년 한니발은 나이에 비해 놀라운 지식 수준으로 이미 천재의 싹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여동생 미샤는 겨우 아장아장 걷는 정도다. 기나긴 피난 생활은 굶주림으로 괴롭긴 해도 그런대로 평화로웠다. 무시무시한 불청객들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독일인도 아니면서 나치에 동조해 독일군을 따라다니며 앞잡이 노릇을 하는 악당들이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전범으로 처형될 걸 두려워 숲속으로 도망온 것이다. 악당들과 한니발, 미샤는 동거 아닌 동거를 하게 되고, 배고픔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한 그들은 미샤를 먹어버린다. 전쟁이 끝나고, 숙부 로버트 렉터와 숙모 무라사키 부인의 보살핌 속에 성장한 한니발은 그러나 여전히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과거의 악몽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이상이 대강의 줄거리인데, 완전히 새로운 것도 아니고 전작 <한니발>에서 한니발의 과거를 언급하면서 대부분 나온 이야기다.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치밀함도 없고, 심장을 조이는 스릴감도, 그로테스크한 엽기 범죄의 충격도 거의 느낄 수 없다. 청년 한니발이 악당을 한 명씩 처치하는 구성으로 진행되는데, 악당들은 그야말로 존재감이 없어 한니발의 상대가 전혀 되지 못한다. 해서 별로 머리를 쓸 여지도 없다. 잠깐 발악하다 이내 죽어 나자빠지니 긴장감이 생길 턱이 있나. 애정과 우정을 넘나드는 한니발과 레이디 무라사키의 관계도 김빠진 콜라같이 변죽만 울리다 끝나니 별다른 애절함을 느끼기 힘들다.

 

영화와 소설에서 한니발 렉터가 그토록 우리의 심장을 서늘하게 했던 건, 그가 정체불명의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한니발이 식인에 탐닉하게 된 계기와 마음을 닫아버린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다.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괴물은 이미 괴물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이 정도 설명에 한니발을 동정하고 이해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한니발에게 감정을 주려고 마음먹었다면 이보다는 더 탄탄한 줄거리와 구성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다. 영화화에 맞춘 듯 급조된 이야기와 느슨한 전개, 번쩍이는 클라이막스가 없는 <한니발 라이징>은 이 점을 간과한 듯 싶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부분은 나치의 침공을 자진해서 돕는 '히비스'라는 민간인들이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역사적 사실이 유일했다. 전혀 몰랐던 부분이기에. 작가 토머스 해리스는 <양들의 침묵>으로 현대적인 스릴러의 기틀을 세웠으며, 제임스 패터슨이나 퍼트리샤 콘웰 등의 블록버스터 스릴러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엿가락 늘어뜨리듯 한니발만 붙잡고 늘어지지 말고(그의 작품 5편 중 4편에서 한니발 렉터가 등장한다), 좀더 참신하고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한번 독자의 마음을 송두리째 쥐고 흔들 만한 예의 그 충격적인 스릴러를 발표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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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2-16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역시 대세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한다군요.

jedai2000 2007-02-16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오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져야 할 것 같습니다~.

sayonara 2007-02-18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니발' 후반부터 어영부영하더니...
내 이럴 줄 알아써요... -_-;

jedai2000 2007-02-19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정녕 토머스 해리스에게 제2의 <양들의 침묵>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인지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