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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안도현 엮음, 김기찬 사진 / 이가서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 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 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 가운데다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아니, 여러 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ㅡ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장석남> 본문. 29쪽.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라는 긴 제목의 책을 선물 받았을 때 시집이라는 것과 흑백사진이 인상깊었다. 엮은이 역시도 시인으로 노트에 베끼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시를 간추렸다는 흥미로움에 오래전 사진까지 정감있게 느껴졌다. 잃어버린 향수 같은 추억이 스민 책이었다. 내가 격은 적 없는 이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만나며 또한 그만큼 구수한 시들은 무더운 여름을 보내는 내게 즐거움이자 여유를 한번에 주었다.
누군가의 삶을 드러내는 모습은 늘 숙연함을 자아낸다. 그래서 더 정겹다. 웃음이 있고, 사랑이 있고, 아픔이 있어서. 쓰다듬어 주고 싶은 예쁜 책이라 말하고 싶다. 많은 시 중 위에 적은 장석남의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이 자꾸 눈에 어른거렸다. 자주 펴들고 일부러 말로 소리 내 보기도 한다. 이 시인은 정말 맑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정적이면서 동적인 그리고 이미지화시키며 어느새 못물처럼 스미게 하는 시 한 편에 마음이 절로 정화된다. 학창시절 노트에 시를 적어서 누군가에게 선물하던 때가 떠올라 추억 같은 시집이기도 했다. 지금은 왜 시 한 수 적을 시간도 갖지 못하고 지내는 것일까. 베끼고 싶은 시를 만나도 그저 마음으로 읽고 간혹 소리 내 읽는 게 다가 되어버렸다. 펜을 잡고 꾹꾹 눌러가며 시 한 소절이라도 베끼어 써봐야 겠다.
-4341.12.23.불의 날.(08041_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