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3세 - 전예원세계문학선 316 셰익스피어 전집 16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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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극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인 인간의 욕망이 다시금 거대한 역사정치극에서 빛을 발하는 작
품.
참 서두가 길기도 하지만 <리처드 3세>를 한 줄로 정의하자면 그렇다. 그의 여러 작품에서 보아왔
던 인물들을 합쳐보아도 이렇게 간악한 등장인물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4대 비극은 물론 그의 희극
에서도 만날 수 없는(희극에서 이런 인물이 있을 필요가 있겠느냐마는) 인물이 바로 리처드 3세.

여기 권력에 눈먼 글로스터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에드워드 4세의 둘째 동생으로 후에 리처드 3세로
불린다. 꼽추에 절름발이라는 신체조건을 타고난 그는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천
사가 아니다. 오히려 악마에 가깝다. 첫 장의 그의 대사에서 이미 악한 계략이 드러나는데 소위 요즘말
로 꽃미남이 되어 사교계에서 주목받을 수 없기에 그는 차라리 악마가 되어 그런 쾌락을 조롱하기로 한
다. 피붙이도 매몰차게 죽여버리는 그의 뒤틀린 내면은 결국 탐욕으로 이 정치극을 완성한다. 언급되지
는 않았지만 추론해 보건대 열등감의 표출이 이렇게 나타난 인물이라 생각한다.

그가 얼마나 악역인지 몇 마디 하자면, 자신이 죽인 형의 형수에게서 조카들까지 죽이고 나서는 한다는
말이 가관이다. 그 형의 딸과 결혼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하는 인물이라니! 결코
사랑 때문이 아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자신에게 위험이 될 모든 요소를 말끔하게 제
거하고도 모자라 왕이라는 직함을 빼앗길 가능성까지 미리 차단하려는 것이다. 형의 딸은 왕족의 혈통
으로 그녀와 결혼하는 자는 곧 그의 왕이라는 자리에 위험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눈치챘지만
이쯤 되면 인간말종임을 의심할수 없다. 아예 여기서는 인간이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자고 벼루는 느낌
이다.

또한, 하루가 멀다 하고 어제의 지인이 오늘의 적이 되는 형국이라 혼란스럽다. 피로 얼룩진 목숨이 많
아지자 살아남은 그의 피붙이나 미망인들은 자연 그를 저주한다. 극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마가렛 왕비
를 제외하고는 모두 두루뭉술하고 유약하다고나 할까. 글로스터의 간교한 혓바닥에 감겨 앤은 그와 결
혼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며, 형의 딸(마가렛)과 결혼할 수 있도록 설득하라는 말에 설득당하는 형수.
그리고 글로스터의 생모는 자신의 뱃속으로 낳은 글로스터의 악행을 보며 한탄한다.

그러나 형의 살아남은 아들 도셋은 바다 건너 리치먼드 백작(후에 헨리 7세, 랭커스트 가문)에게 가고
결국 리치먼드와 같이 영국으로 진격해 온다. 글로스터(리처드 3세)는 요크 가문이었는데 이 정치극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영국 왕의 역대 계보를 참고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15세기 후반 이 두 가문은 왕
위 계승을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였다. 그리고 승리했던 요크 가(家)의 이야기가 리처드 3세에서 진행
되는 것이다. 그리고 리치먼드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셰익스피어의 초기작품인데도 전혀 후기작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4대 비극과 비교해도 정말로 잘 만들
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4대 비극의 하나인 <맥베스>와 비슷한 느낌이나 맥베스 왕과 리처드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맥베스는 끊임없이 고민했던 것이다. 강하게 밀고 나가는데 다소 주저할 수밖에 없는 이
유가 된 것이었다. 옆에서 부추기는 부인의 말이라던가, 마녀들의 예언을 믿는 모습 등에서 고민하는
맥베스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리처드 3세는 그야말로 거침없이 일을 진행시킨다. 한순간의 갈등도 없
는 것이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욕설이 꽤 난무하는 이번 작품은 한편으로는 시원시원하기도
했다. 이 간사하고도 망설임 없는 악역의 매력 때문에 <맥베스>보다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물론
인간적인 모습의 맥베스도 훌륭하지만 극의 흐름을 보면 긴장감이나 가독성 면에서 리처드 3세가 뛰어
났다. 그리고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만이 인간적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드러냄과 드러내
지 않음 속에서도 느껴지는 것은 각자가 다르기 때문이겠지만... 리처드의 대사를 한 개만 적어본다.


내 양심은 천 개의 혀를 갖고 있어.
그런데 그 혓바닥 하나하나가 제멋대로 말할 밑천이 있단 말이야.

ㅡ 187쪽, 5막. 리처드(글로스터).



결국 마가렛(헨리 6세의 미망인)의 분노에 찬 저주가 모두에게 내려졌다. 책장을 덮고 나서 시나브로
되뇌는 한마디. '피로 얻은 것은 피로 잃고 말 것이다.' (51쪽, 1막. 마가렛)

역시 그 많은 혓바닥의 대가 끝에는 피를 뿌린 자 피로 젖어 가버리는 것이다. 한동안 셰익스피어의 희
극의 달콤함에 젖어 있다가 <리처드 3세>를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고나 할까. 요즘 사극 열풍 속에서도
느껴지지만 절대권력을 지향하는 세월은 태평하지 못하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고 채워질 수도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참으로 덧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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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11-06 14:33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에 대한 대단한 애정이네요.
리처드3세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윌리암 세바스찬 주니어 2세> 가 아닐까요?ㅎㅎ

은비뫼 2007-11-07 01:17   좋아요 0 | URL
올해 책읽기 계획이 <셰익스피어 다시 읽기>라서요. ^^
윌리암 세바스찬 주니어 2세. 크크크크크큭.

음유시인미스트 2012-06-19 17:43   좋아요 0 | URL
하지만 영국판 용비어천가 (..................)
본래는 십대부터 전쟁터를 전전했던 용맹한 기사이자 뛰어난 행정관이었고, 궁중의 일에도 관심이 별로 없었던 (형이 왕위에 오르고 난 뒤에도 북방에서 머무르고 궁중에는 거의 안들렀다고 함) 리처드 3세를 희대의 악한, 존속살해자, 악마나 다름없는 자로 만들어 악의 화신 리처드와 신의 사자 리치몬드의 대결 구도를 통해 튜더왕조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작품.... ㅠ_ㅠ

그래서 전 리처드 3세를 응원합니다.
Loyaulté me l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