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투명한 거미줄에서 스멀거리며 미끄러지는 거미처럼 인간의 고독은 숙명처럼 내면 안에서 산다.
은희경 하면 <새의 선물>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런 그녀의 이번 책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썼던 6개
의 단편을 모았는데 이미 여러 문예지에 실렸던 글이다.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작가의 글을 마주할 때
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정신을 집중한다. 잠시 방심하면 작가는 이를 허용하지 않은 채 독자를
텍스트 바깥으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가끔 그 끝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나를 글 속으로 다시 집어넣기
위해 밀어넣고는 했는데 하나의 단편이 끝날 때마다 다른 단편으로 들어가고자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결국 이 책을 덮고 드는 생각은 이렇다. 작가는 변화 중이구나….


<<의심을 찬양함>>으로 시작되는 글은 역시나 시니컬하다. 우연의 복선이 짙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
작가는 그저 지나칠 일을 하나의 대상으로 마주하고 앉아 풀어두는 일을 잘했다. 작가의 역량이겠다.
그러나 조금 서늘하기도 하지만 끝까지 책장 넘기는 일을 망설이게 하진 않았다.


정작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은 이유 없이 생겨나는 일들 아닌가요? 모두가 예측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생기는 일들은 인생이라고 할 수도 없죠. 우리가 계획을 세우는 동안 발생하는 우연이 바로 그 사람의
인생이라는 존 레논의 말을 당신이 들어보았는지 모르겠군요. (22쪽, 유진.)



<<고독의 발견>>의 난쟁이 여자와 K인 나. 몸을 공중에 띄우는 일에 관한 이야기. 여러 명으로 나누면
가능할까? 역시나 시니컬 아니 냉소적인 느낌.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제목과 동명의 단편. 참고로 이 제목은 릴케의 시에서 인용했다. 그 유
명한 <두이노의 비가>의 한 구절에서 말이다.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뚱뚱했던 아이. 그 아이는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보며 생각
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나(소년)를 멸시한다고. 사실 그 아이는 축복받지 못한 탄생이었다.
모든 탄생이 위대할 수 없겠지만 축복마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과 신체적인 다이어트뿐이 아닌 의식
적인 변화를 맞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날씨와 생활>>의 몽상가 B의 모습도 왠지 낯설지 않았으며 <<지도 중독>>은 개인적으로 가장 기
억에 남는 작품이었다. 여행에 대해 그리고 지도에 대해 그 밖의 것을 자꾸만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다.
또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대화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나뿐이었을까 싶다.


상투적인 말이긴 해도 어쨌든 인생이란 길찾기 이니까요. (178-179쪽)


마지막 단편인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로 끝이 난다. 잃어버린 기억이란 건 결국 다시 찾을 가능성
이 있다는 것일까. 때때로 의미 없이 찾아오는 기억에 빠져 버둥거리는 날들이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도 그럴 수 있겠지만 잃어도 좋을 만한 기억이란 어쩌면 생각보다 적을지도 모른다.

모든 작가들의 모든 글에는 자기확장 의식이 스며있다. 은희경의 이 책에서 느껴지는 것은 냉소보다는
사실 삶에 대한 처연함이었다. 인생의 빈 구멍을 모조리 틀어막을 필요는 없다. 가끔은 그저 그 구멍을
통해 숨을 쉬는 것도 괜찮으니 말이다. 시간이 더 지나 이 처연함을 뛰어넘는다면 더 의식을 가볍게 해
줄 진중함이 나올지 모르겠다.

그러니 이 책의 느낌은 곧 묵과 같았다. 가볍고도 무거운 묵.
구미를 당기는 향이 나지 않지만 먹어버리고 마는 묵. 무언가 고소한 양념을 슬쩍 치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나면서도 꾸역꾸역 먹었던 그런 기억 속의 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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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16 11:23   좋아요 0 | URL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인간의 고독은 숙명처럼 내면 안에서 산다'던 첫 글귀가 무척 인상적입니다.

은비뫼 2007-08-17 22:48   좋아요 0 | URL
사실 제 이야기였는데 보편화시켜서 말했는데 아마도... 인간이라면 그럴거라고 생각해서요. 나쁘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