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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쉰이 넘은 나이에 자전거 풍륜(風輪, 자전거 이름)과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떠난 여행
이야기를 담은 책인 <자전거 여행>. 그가 밟아서 돌린 페달은 자전거 바뀌뿐이 아니라 삶의 페달
이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밟아야만 돌아가는 고단한 여정이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
레 녹아나온다. 이 책을 만난 것은 축복이라고 말할 만큼 내게는 애착이 가는 책이다. 작가와 함께
굽이굽이 페달을 밟아가며 빠져들어 본 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아, 김훈은 정말로 글맛 나는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자전거에 대한 표현을 보면 그 관찰력과 은유
에 일정한 애정이 묻어난다. 그저 좋으려니가 아닌 이를테면 집요함 같은 느낌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 미쳐야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이 순간처럼 그 말이 딱 맞을 때가 없을 것
이다.
김훈의 글은 묵묵한 느낌이 가득하다. 간결함도 마음에 든다. 그의 글처럼 서늘하다고 느껴지는 작가지
만 마음 어디에선가 분출되는 뜨거움은 그의 의식과 글을 거쳐 독자에게 뜨거움보다 서늘하게 다가오
는 것이다. 뜨거운 동시에 서늘하다는 느낌이 잘 조화되었다. 그가 말한 대나무의 품성처럼 '그 성질
은 차고 단단하다.' (44쪽) 그 안에 모든 국면을 다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부럽다. <칼의 노
래>등의 작품보다 풍요로운 글투를 갖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또한 ,역사부터 ㅡ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칼의 노래>를 비롯하여 최근의 <남한산성>까지 봐도 알
수 있다. ㅡ 인류, 지리, 자연 등의 박학다식함도 충분한 재미를 준다. 자연 속에서 성찰하는 작가의 마
음은 깊고도 서늘한데 이 시대 진정한 지성이라 생각된다.
여행에서 마주한 풍경을 내적 성찰을 통해 담아내며 길에서 만난 이들과의 대화도 따뜻하다. 그의 간결
한 문장이 때로 딱딱 끊어지는 느낌도 들었지만 전혀 흠이 되지 않았다. 역시나 인문학적 깊이가 고수
임을 느낄 수밖에 없는 책이다.
사실 이 책에서 비판을 이끌어내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다. 아니 내게는 어려운 일이다. 즉, 비판
의 능력을 상실했다고나 할까. 김훈에 취했기 때문이며 이 책에 취했기 때문이다. 한 잔의 술로만 정신
을 훔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한 권의 책이 정신을 혼미하게 할 지경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
명의 힘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
패할 것이다. ㅡ 책 머리에서.
첫 장소인 여수 돌산도 향일암 이야기에 여러 해 전 다녀온 향일암을 떠올리며 그때 찍은 사진을 꺼내
들어 보았다. 작가의 설명과 똑같은 사진을 찾아내었다. '바위 틈새로 난 길을 비집고 한 사람씩 겨우
지나 갈 수 있다.', '절 마당에 이르면 갑자기 남해의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서, 이 절 마당은 수
직적인 고양감과 수평적인 무한감으로 가득하다.'라는 말이 쉽게 다가왔다. 광주의 무등산과 소쇄원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소쇄원은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한 곳이라 잘 기억해 두고 싶다.
정자와 세상과의 관계의 본질은 서늘함이다. 정자는 그 안에서 세상을 내다보는 자의 것인 동시에, 그
밖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자의 것이다. 정자는 '본다'는 행위가 갖는 시선의 일방성을 넘어선다. 시
선의 일방성에는 폭력이 숨어 있다. 이 폭력은 근대성의 일종이다...(생략)... ㅡ 39~40쪽.
작가의 미학이 담긴 글과 함께하는 시간이 값졌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훔치고 싶은 문장도 있었으며
이미 다녀온 장소를 만날 때면 새로운 느낌과 공감의 시간을, 미지의 곳은 가보고 싶어져 가볼 곳이 늘
어만 갔다. 이상문학상 작품 수상집에서 이미 읽은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는 다시 읽어도 좋았다.
또 그의 몇몇 문장에서는 다른 작품 <밥벌이의 지겨움>이 떠오르기도 했다.
시(詩)는 인공의 낙원이고 숲은 자연의 낙원이고 청학동은 관념의 낙원이지만,
한 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다 합친 낙원이다. ㅡ 96쪽.
한 모금의 차에서 낙원을 찾는 작가의 글에서 그의 여유가 묻어난다. 도서전에서 뵌 작가의 모습은 잊
을 수 없을 거 같다. 굳게 다물고만 있을듯했던 입에서 흘러나오는 또박또박한 말소리는 그의 글처럼
차분하고 서늘한데도 다정하게 느껴졌다. 사실 작가의 인터뷰나 주변인의 말을 들으면 꽤 유머도 있고
입담도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책으로 만나는 독자이기에 그의 글에서 풍기는 느낌으로 기억하고 싶
다. 언제까지나 내게 그저 글쓴이가 아닌 작가로 남기를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