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알베르 카뮈가 아끼는 책으로 찬탄을 마지않은 또 그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이 책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카뮈뿐 아니라 나를 포함한 많은 이의 마음에 큰 파장을 전한다.

섬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고독이다. 수많은 파도가 드나들지만 결코 머무르지 않는
미지의 신전. 남해안에 펼쳐진 다도해를 바라보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평화이다. 그 적막함이 너무도 깊
고 고요해서 공(空)의 상태로 내면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길이 순식간에 생겨난다. 그리고는 그 길을 따
라 내면의 섬을 어느덧 떠도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어느 해 힘든 일을 겪던 때 일부러 집과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직장을 잡았다. 길을 나서는 날 차창 밖
으로 빗물이 연방 배웅하고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생활은 정말로 고립이었다. 매
일 일도 많았지만 자진해서 늦게까지 일을 하다 퇴근하기 일쑤였으며 집에 와서의 유일한 취미는 내 안
의 섬을 가꾸는 일뿐이었다. 내게 너무도 큰방의 가운데에 덩그러니 앉아 섬에 물을 주었고 그러다 보
니 어느덧 나무 한 그루가 자랐다. 가끔 삶의 회의감이 버겁게 덮치는 날이면 나를 대신해 초록 잎을 흔
들며 울기도 하는 나무였다. 섬은 수면 위로 불거져 나왔지만 부유(浮遊)하는 하나의 절망이기도 했다.
그때처럼 침잠한 일이 그 후로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가끔 섬하면 그때 생각이 난다.

존재의 근원은 이다지도 뿌리째 흔들며 의미를 찾으라 하기도 하고 또 운 좋으면 이렇게 마음에 드는
작가를 만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다리가 하나 세워진 것일지도 모른다.

장 그르니에의 가장 유명한 책인 <섬>에는 그의 진가가 들어 있다. 그는 어쩌면 이토록 얇은 책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지 모른다. 카뮈의 추천서부터 시작하여 마음을 온통 살랑거리게 한 책이다. 물론
뒷부분의 인도 이야기는 몇 번 읽어도 그냥 읽고 넘어간다. 사실 인도는 예전에 너무도 가고 싶은 나라
였으나 책으로만 만난 인도지만 더는 흥미로운 나라가 아니어 그럴지도 모르겠다. 고양이 물루의 죽음
이야기는 <어느 개의 죽음>처럼 동물과 저자의 일상이 그려져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그르니에
의 글이 좋다. 유려하다는 말은 그에게 어울린다. 거침없는 그의 정신이 깃든 하나하나의 말은 친근하
기까지 하다. 그래서 장 그르니에를, 이 책을 만나는 것이 행복이다.


섬들을 생각할 때면 왜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되는 것일까? 난 바다의 시원한 공기며 사방의 수평선
으로 자유스럽게 터진 바다를 섬 말고 어디서 만날 수 있으며 육체적 황홀을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곳이
섬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섬에 가면 <격리된다 isole> ㅡ 섬 Ile의 어원 자체가 그렇
지 않은가? 섬, 혹은 <혼자뿐인> 한 인간. 섬들, 혹은 <혼자씩일 뿐인> 인간들. (123~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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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4-24 09:33   좋아요 0 | URL
장 그리니에, 그의 책을 대학교때 도서관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네요. 섬,섬,섬...풀잎이라 말하면 휘파람 소리가 난다지만 섬이라 말하면 왠지 멜랑코리한 고독이 느껴지지 않나요?ㅎㅎ

은비뫼 2007-04-28 02:59   좋아요 0 | URL
동감합니다, 잉크냄새님. ^^*
섬...특히나 섬의 받침인 'ㅁ'의 폐쇄성이 섬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