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 신경림의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시
신경림 엮음 / 다산책방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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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가 갖고 있는 감정의 끝은 어디일까요? 무한대란 표현은 우리의 감정을 측정하기 위해 나온 말이 아닐까 싶어요.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할 때 우리 마음속에선 천지가 개벽하는, 감정의 격랑이 입니다. 비단 사랑을 할 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삶 속의 눈물을 발견했을 때, 자연의 오묘함을 체화할 때, 사회의 불합리에 화가 끓어오를 때도 우리의 감정은 온 우주를 집어 삼킬 만큼 무한해집니다. 우린 그 무한한 감정에 허덕이다가, 때론 그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유한성 때문입니다. 말이란 그릇은 우리의 감정을 담기에 너무나 조그마합니다. 그래서 신은 우리에게 시인을 선물해주셨습니다.
 

시인은 마술사입니다. 그들은 측정 불가한 우리의 감정을 조그만 그릇에 담아줍니다. 그들은 무한한 감정 속에서 작은 결정체들을 뽑아냅니다. 그 결정체에는 뜨거운 사랑과 눈물이, 팔팔한 깨달음과 성스러운 숭고가, 활화산 같은 격정의 알맹이들이 담겨있습니다. 시인은 결정체를 뽑은 후에 그에 맞는 그릇을 조탁합니다. 언어를 새롭게 창조하기도 하고 기상한 비유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감정의 알맹이들이 ‘전용 그릇’에 담기는 순간 측정될 수 없었던 우리의 무한한 감정은 우리 앞에 형상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린 그 형상을 보며 예전에 느꼈던 하늘과 땅의 열림을 되살리는 것이죠.
 
시인 신경림씨가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시를 선별하여 <처음처럼>이란 시집을 냈습니다. 감정은 처음에 가장 강렬합니다. 그만큼 깊고 거대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한 감정은 서서히 늙어갑니다. 사라질 때까지 말이죠. 그래서 처음 느꼈던 감정은 소중합니다. 시인은 내 인생의 첫 떨림이란 부제로 <처음처럼>에 실린 시들을 소개합니다. 책을 읽다보니 어느새 권태와 무료함 속에 갇혀 시들어버린 감정의 마그마가 두터운 암반을 뚫고 솟아오르는 듯합니다. 처음 느꼈던 순수한 떨림이 되살아납니다. 

 ‘어느 날 당신과 내가/날과 씨로 만나서’(정희성,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사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는 멀리 있습니다.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머뭇거리지 말고/서성대지 말고/숨기지 말고/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문정희, 겨울 사랑) 가고 싶다고요. 때론 님이 그리워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서정주, 동천)놓기도 합니다. ‘여기에 내리고/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나희덕, 젖지 않는 마음)있다는 사실이 시인은 너무 슬픕니다. ‘꽃이/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최영미, 선운사에서)이라며 이별의 슬픔을 갈라진 마음이 상처사이로 드러냅니다. 시간이 한 참 흘러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내리던 집/그 여자네 집’(김용택, 그 여자네 집)을, 그 여자를 사랑했던 마음을 그리워합니다. 

 우리의 감정이 반드시 사랑과 연관되어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김종삼, 묵화)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광경이 우리의 감정을 흔들기도 합니다. ‘호박잎에 싸 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백석, 주막)고 말하는 소년의 모습에서도 ‘타래곱과 도루모기와/ 피터진 탁의 볏 찌르르 타는/아스라한 연기 속에서/목이랑 껴안고/웃음으로 웃음으로 헤어져야’(이용악, 슬픈 사람들)하는 피난민의 모습에서도 감정은 잔잔한 파도 속에 사로잡힙니다. 때론 나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삶 속의 진실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 진실은 절제되어있어 더 감흥의 폭이 큽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천상병, 귀천)며 삶을 소풍이란 언어에 담아내는 시인.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때도 있는데’(백석, 남산의주 유동 박시봉 방)라며 자신의 심연을 탐험하는 자의 심정을 드러냅니다. 

책에 실린 더 좋은 시들을 소개할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책 속에 실려 있는 아름다운 그림들은 언어란 조그만 용기 속에 압축 포장되어 있는 감정들을 독자들이 쉽게 꺼낼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열립니다. 그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감정의 알맹이들. 어느새 내 감정도 그 알맹이들 속으로 녹아듭니다. 가끔 이렇게 우리는 머리가 아닌 가슴을 이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노을 (조태일)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사람들은 누구나
해질녘이면 노을 하나씩
머리에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서성거린다.
 
쌀쌀한 바람 속에서 싸리나무도
노을 한 폭씩 머리에 이고
흔들거린다.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누가 서녘 하늘에 불을 붙였나.
그래도 이승이 그리워
저승 가다가 불을 지폈나.
 
이것 좀 봐.
이것 좀 봐.
 
내 가슴 서편 쪽에도
불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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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 그랜드 펜윅 시리즈 1
레너드 위벌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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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릴 적 난 이 세상의 모든 결정이 합리적 절차를 통해 이성적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했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초등학교 시절 5년간, 서울대공원으로 봄 소풍을 갔었다. 그런데 6학년 때만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난 당연히 학교 선생님들이 ‘6학년에게 맞는 효과적 야외학습 장소 연구’ 같은 방식을 통해 새로운 소풍 장소를 개발해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고 난 더 높은 곳에 있는 어른들은 좀 더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보다 고차원의 논리를 사용해 무언가를 결정할 것이라 생각했다. 교장선생님들의 결정은 더 고차원적으로 이뤄지고, 장학사들은 더욱더 높은 수준의 판단을 보여 준다는 식으로 말이다. 대통령은 세상에서 제일 합리적으로 판단할거라 생각했다. 
 

   사회에 나온지도 3년이 넘었다. 시간이 흘러 나도 어느새 결정을 하는 위치가 되었다. 당시 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캠프를 개최했었다. 캠프는 부산에서도 열렸는데, 캠프 장소는 구덕청소년수련관이었다. 만약 내가 캠프에 참가한 어린이었다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거리, 교육효과, 재미, 안전성, 청결도 등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요인을 고려한 뒤 가장 적합한 캠프 장소를 택했나보다.’ 하지만 아니었다. 당시 부산 지역에 큰 체육관을 갖고 있으면서 예약이 안 된 곳은 구덕 수련관 한 곳 뿐이었다. 구덕청소년수련관이 당첨된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서서히 깨달았다. 나도 이제 어른의 세상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어렸을 때 상상했던 고차원적의 합리적 판단 과정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았다.
 

 나의 깨달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어른들의 행위 덕분에 더욱 확고해져갔다. 한 번 보자. 오늘날 미국은 석유를 위해, 더 나아가 중동 지역의 패권을 위해 이라크를 침공했다.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약소국들은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지 못하게 한다. 미국은 소련과 중국이 싫어 한국과 일본을 지원한다. 과거 소련도 미국, 영국, 프랑스가 싫어 동구권 국가들을 지원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내년 대선, 더 나아가 금배지 유지를 위해 하나 둘씩 탈당하고 있다. 신문은 배부른 방송이 보기 싫어 중간광고를 비롯한 광고시장의 자유화를 반대하고 방송은 삐뚤어진 신문이 보기 싫어 엄격한 독점기준을 설정한 언론법을 지지한다. 그랬다. 세상의 대부분 결정은 초등학교 6학년생의 기준과 질적인 측면에서 유사했다. 그 기준은 아주 단순했고 명료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역시 어른들답게 아이들이 갖지 못한 탁월한 능력을 하나 지니고 있었다. 자기정당화란 능력 말이다. 아이들을 보자. 제인이는 영준이가 미워서 때렸다고 말하고 점례는 동필이가 얄미워서 따돌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은 인류 평화를 위해 대량살상무기를 지닌 이라크를 침공했고 약소국의 핵무기 보유를 금지한다고 말한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한국 정치 발전을 위해 탈당을 하며 신문은 시청자를 위해, 방송은 독자를 위해 서로를 비판한다고 말한다. 단순한 이기심으로 돌아가는 어른들의 행위는 그래서 아이들의 행동보다 훨씬 위선적이다. 모든 판단의 근저에 있는 정치성을 부정하는 어른들의 행위는 그래서 역겹다.    

 

 <약소국 그랜드 팬윅의 뉴욕침공기>는 이런 위선적인 국제관계를 까발린다. 물론 정공법이 아닌 풍자를 이용한 방식으로 말이다. 물론 1950년대 소설이기에(물론 난 읽으면서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풍자의 강도는 요즘 소설에 비해 약하다.(박형서의 ‘두유전쟁’과 비교 해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약소국 그랜드 팬윅..>은 풍자의 교과서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냉소적인 문체로 터무니없는 사건을 진지하게 묘사하는 방식은 최근 한국 소설의 핵심 유머 코드다. <그랜드 팬윅..>은 이런 방식을 이용해 사회 곳곳에 숨겨져 있는 위선을 살며시 드러낸다. 유머코드를 통해 벗겨본 사회의 위선은 또 다른 코미디다. 이렇게 소설은 자연스럽게 비판과 유머를 동시에 제공하며 풍자의 목적을 훌륭히 수행해낸다. <그랜드 팬윅...>을 읽으며 문득 오늘날 어른들의 위선을 한 번 살짝 들춰본다. 그 안에 미국, 영국, 프랑스도 정치인, 언론인도 없다. 제인이와 영준이, 점례와 동필이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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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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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7년 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를 출간한다. 자연세계를 탐구하기 위한 뉴턴의 이성적 활동이 집대성된 책이었다. 당시 이 책의 출간은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다. 이제 유럽은 서서히 종교의 시대에서 합리의 시대로 이동하게 된다. 일반인들의 쉬운 이해를 위해 역사학자들이 만든 구분에 따른다면, 바야흐로 근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성은 산업혁명과 독립혁명,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다주었다. 이 후 이성은 서양을 지배하는 절대가치가 되었다. 하지만 회의하는 이성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니체, 실존주의, 해체주의 등이 등장하며 이성에 내재된 비합리성을 공격한다. 작위적으로 나누자면 탈근대의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던 이성. 그 이성은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을 일으켰다.(1918년, 1939년) 지식인들은 이성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찾기 시작했다. 유럽에선 이렇게 400년에 걸쳐 전근대에서 근대로, 다시 탈근대로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한국도 유럽처럼 변화하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유럽이 400년 동안 경험한 움직임을 10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압축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결과 “서구에선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가 통시적으로 이어지는 선형성”을 띠는 반면, “한국에서는 시간마저 압축되어 세 개의 역사적 지층이 공시적으로 존재하는 비선형성”을 띠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한국에선 아직 근대화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빠른 성장을 위해선 이성의 도움이 필요했다. 한국은 성장에 도움이 되는 부분, 즉 경제 영역에 한정하여 서구의 근대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세기 영국정부가 영국노동자에게 가했던 차가운 이성의 활동은 한국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일례가 규칙적인 노동 확립이다. 초기 산업혁명 당시 영국에는 성월요일 관행(토요일 오후의 과음으로 인해 월요일 날은 쉬는 관습)이 있었다. 하지만 기업가는 노동자들의 관습(음주, 무질서한 축구경기, 권투 시합, 축제 등)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낙인찍고 이를 억압했다. 한국에서도 ‘인간개조’의 기치아래 노동자들을 시간의 틀에 가두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일본인들이 ‘게으르다’고 했던 조센징은 어느새 부지런한 노동 기계로 개조됐다.”(한국인의 주당 노동시간은 47.6시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아직 나머지 모든 영역에는 이성이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기술과 제도는 서구의 합리주의를 따라잡았지만 한국인의 습속(habitus)은 여전히 조선 시대에 머물러있다. 감성이 넘실되는 공간엔 이성이 자리 잡을 공간은 없어 보인다. 이를 증명할 예는 무수히 많다.  한국인은 모든 분야에서 전사가 되었으며(교통사고가 난 경우를 생각해보자. 독일인은 서로 인사하고 경찰이 알아서 처리하길 기다린단다.) 논문을 조작한 황우석 박사에게 변치 않는 충성심을 보여줬다.(황우석 사태에서 우리가 본 것은 데카르트가 그렇게 경계하던 ‘정념’의 현화였다.) ‘법이나 규칙의 지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크게는 법의 불평등한 적용에서부터 작게는 식당에서 떠드는 아이 내버려 두기까지)여전히 국가의 흥망은 왕(대통령)에게 달려있다는 주술적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더 많은 예를 들 필요도 없다. 말도 안 되는 일에 분노해봤던 우리의 경험을 떠올려보라. 그렇다.  우리의 습속은 근대화의 세례(?)를 아직 받지 못했다.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낯선 눈으로 한국의 문화를 파헤친다. 그는 “이 책의 목적은 한국인의 몸에서 그 ‘구성된’ 층위를, 다시 말하면 한국인의 아비투스를 드러내는데 있다.”고 말한다. 근대와 전근대, 그리고 미래의 시간이 혼합되어 극심한 변동과 불안정을 겪고 있는 한국. 그 변동과 불안정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혹사시키는 한국인. 진중권은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예리한 논리력으로 한국인의 아비투스를 두루 해부한다.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것이 되어 보이지 않던 우리의 존재를 끄집어낸다는 점만으로 이 책은 빛이 난다.
 
   다만 저자가 진중권이란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다. 그가 ‘미래주의’로 구분한 부분은 한국인의 특성을 잘 집어내지만 엄밀히 보면 이 장(chapter)의 문제제기는 국적 간 문제라기 보다는 세대 간 문제에 가까워 보인다.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란 의미다. 현상을 구조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현상을 읽어내는 것에 그쳐 궁금증을 유발하는 부분도 있다. 진중권이라면 현상을 좀 더 깊게 구조적으로 분석해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억지스러운 부분이 읽히기도 한다. (이어령 교수의 글을 읽을 때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작은 옥에 티에 불과하다. 그의 방대한 지식을 타고 한국인의 아비투스를 살펴봤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내 머리는 포만감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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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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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운영한지 3년이 다 되어 간다. 주로 책을 읽고 든 생각과 느낌을 정리했다. 올 한 해가 가는 지금, 내가 그동안 정리했던 글들을 보니 내심 뿌듯하다. 하지만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생긴 나름의 스트레스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항상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엔 어떻게 블로그에 소개할까'하는 압박감. 이 압박감이 가끔은 소설읽는 재미를 앗아가기도 한다. 게다가 대학 전공 공부의 영향이었을까. (전 영문과를 나왔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항상 해석하려 하고, 때론 의미를 찾아내려 한다. 심지어 박형서의 <자정의 픽션>를 읽고 난 다음에도 니체가 한 말을 떠올렸으니. 이 정도면 내 압박감이 꽤 심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읽었다.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 책은 유달리 편하게 잘 읽혔다. 별 생각, 고민 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추운 겨울날 따스한 아랫목에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실제로 작가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다.), 구라를 신명나게 잘 푸는 남대문 시장 건어물 가게 수다쟁이 김창식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실제로 '나쁜 소설'은 '읽는 소설'이 아니라 '듣는'소설이다.)이 든다. 편하고 재밌다. <자정의 픽션>이나 <카스테라>를 읽을 때처럼 박장대소하게 되진 않지만, 입가에 미소는 끊이지 않게 되는 책. 그 책이 바로 이기호의 <갈팡질팡.....>이다.  

 

일단 재밌다. 소설가는 기본적으로 이야기꾼이어야 한다. 이 점에서 이기호는 탁월한 소설가다. 소설가 박경리 옆 집에 살았던 한 친구가 '단지 옆 집에 살았던 이유'만으로 박경리에게 조폭 친구가 운영하는 단란주점 상호 '토지'의 허용권을 받으러 가게 되고('원주통신'),  세 남자가 제각각의 사연으로 세 개의 국기게양대에 밤 새 매달려 있게 된다.('국기게양대 로망스-당신이 잠든 사이에2')  형식도 기발하다. 실제로 읽어주는 소설도 있고('나쁜 소설'), 요리 책 처럼 문단 앞에 번호가 붙어있는 소설도 있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 흙') 독자가 등장인물(할머니)이 되어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구성된 소설도 있다.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 지루할 틈도, 뭘 고민하고 생각할 틈도 없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시중에 나와 있는 가벼운 명랑 코믹 소설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두 작품 '나쁜 소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리고 조금 무거운 분위기의 '수인'에서는 '소설'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과 고민들이 담겨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소설 같은 현실과 '윤대녕' 소설 속에 그려지는 현실 같은 소설 사이에 세워진 벽'(나쁜 소설), '나는 에라이, 뿅! 만큼 살았으니, 에라이 뽕!같은 소설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갈팡질팡.....')같은 문장에서 나타나듯, 작가는 현실을 반영하는 소설이 사실은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고민은 잠시 제쳐두고 싶다. 일단 재밌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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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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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 전 알몸이었습니다. 하나의 인간 덩어리였죠. 아. 아니군요. 나이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 종교란 옷도 입고 있었네요. 전 모태신앙입니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알몸이었던 적은 없네요. 하지만 태어난 이후 급속도로 새 옷을 껴입기 시작했습니다. 전문용어로 사회화 과정을 겪기 시작한거죠. 강남사람이란 옷도 입었고요. 4년제 대학생, 서울 사람, 노무현지지자, 이성애자, 회사원 등의 옷을 입었고요. 다양한 무리에 얼굴 들이밀면서 그 때 그 때 새 옷을 하나씩 껴입었습니다.


지금은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입니다. 너무 많은 옷을 입었거든요. 근데 제가 정상이래요. 모두가 많은 옷을 껴입고 있으니까요. 이 옷들이 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는 우리가 입은 옷을 연구했답니다. 그 옷을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를 정의 내리려고 했다네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우리가 마땅히 입어야 할 옷의 목록을 작성하기도 했답니다. 이성, 도덕, 종교 같은 옷을 말이죠. 웃기죠?   


근데 옷이 많아지면서 저랑 지나치게 다른 옷을 입은 사람과는 아예 만나지도 않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전 노숙자 옷을 입은 사람에 대해 모릅니다. 난곡동 달동네 옷과 생활 수급자 옷을 입은 사람도 모르고요. 이슬람 옷을 입은 사람도, 팔레스타인족 옷을 입은 사람도 모릅니다. 가끔은 내가 껴입은 옷들 때문에 다양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차단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전 나은 편입니다. 다른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옷이 좋다며 싸우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그래서 전 옷을 다 벗고 싶을 때가 있어요. 처음엔 어색할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익숙해지면 좋을 수도 있습니다. 알몸으로 만난다면 누구나 똑같이 만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자기 앞의 생生>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옷을 다 벗진 못하더라도 벗으려 노력해야겠다는 사실을요. 모모(모하메드)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알몸을 투시하는 능력이지요. 아니 그에게 옷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모모는 처음부터 아빠란 옷, 나이란 옷도 입고 있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는 모두와 어울릴 수 있습니다. 여자가 되고픈 전직 복서 출신 트랜스젠더 롤라 아줌마랑도 어울리고요. 유태인 로자 아주머니와도 지낼 수 있습니다. 85세 하밀할아버지도, 세네갈인인 포주 은다 아메데씨도 모모의 친구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옷 입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옷을 하찮게 생각하는 모모는 그래서 참 힘듭니다. 창녀란 옷을 입었단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못 키웁니다. 사람이란 옷을 입었기에 로자 아주머니는 고통스러움에도 계속 목숨을 연명해야 합니다. 아들이 유태인으로 컸다는 사실을 알고 아랍옷을 입은 아버지는 충격 속에 목숨을 잃습니다. 모모는 이 모든 게 야속하기만 합니다. 자기 앞에 놓인 옷 때문에 모두가 힘들어해야 하니까요.  


저도 가끔 제 옷의 무게 때문에 힘들 때가 많습니다. 카뮈란 사람이 그러더군요. 우리는 무거운 옷을 입어야 할, 또 그 옷 때문에 다투고 괴로워해야 할 숙명을 타고났다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옷 때문에 항상 무언가에 억눌려 지내는 고통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 앞에 놓인 生은 그렇게 암울하지만은 않습니다. 모모를 보면 알 수 있거든요. 모모는 로자 아주머니, 모세, 하밀 할아버지, 롤라 아줌마, 자움씨 형제, 왈룸바 일행을 사랑합니다. 사랑으로 모모는 야속한 세상을 견딥니다. 맞아요. 우리는 다른 누군가와 부대끼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힘은 옷의 무게를, 아니 옷을 입어야만 하는 숙명을 충분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는 아무도 살 수 없다는 하밀 아저씨의 말은 그래서 가슴에 와 닿습니다. 우리 모두 모모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옷을 하나씩 벗으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게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 앞의 生을 즐길 수 있는 조건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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