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 그랜드 펜윅 시리즈 1
레너드 위벌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어릴 적 난 이 세상의 모든 결정이 합리적 절차를 통해 이성적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했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초등학교 시절 5년간, 서울대공원으로 봄 소풍을 갔었다. 그런데 6학년 때만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난 당연히 학교 선생님들이 ‘6학년에게 맞는 효과적 야외학습 장소 연구’ 같은 방식을 통해 새로운 소풍 장소를 개발해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고 난 더 높은 곳에 있는 어른들은 좀 더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보다 고차원의 논리를 사용해 무언가를 결정할 것이라 생각했다. 교장선생님들의 결정은 더 고차원적으로 이뤄지고, 장학사들은 더욱더 높은 수준의 판단을 보여 준다는 식으로 말이다. 대통령은 세상에서 제일 합리적으로 판단할거라 생각했다. 
 

   사회에 나온지도 3년이 넘었다. 시간이 흘러 나도 어느새 결정을 하는 위치가 되었다. 당시 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캠프를 개최했었다. 캠프는 부산에서도 열렸는데, 캠프 장소는 구덕청소년수련관이었다. 만약 내가 캠프에 참가한 어린이었다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거리, 교육효과, 재미, 안전성, 청결도 등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요인을 고려한 뒤 가장 적합한 캠프 장소를 택했나보다.’ 하지만 아니었다. 당시 부산 지역에 큰 체육관을 갖고 있으면서 예약이 안 된 곳은 구덕 수련관 한 곳 뿐이었다. 구덕청소년수련관이 당첨된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서서히 깨달았다. 나도 이제 어른의 세상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어렸을 때 상상했던 고차원적의 합리적 판단 과정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았다.
 

 나의 깨달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어른들의 행위 덕분에 더욱 확고해져갔다. 한 번 보자. 오늘날 미국은 석유를 위해, 더 나아가 중동 지역의 패권을 위해 이라크를 침공했다.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약소국들은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지 못하게 한다. 미국은 소련과 중국이 싫어 한국과 일본을 지원한다. 과거 소련도 미국, 영국, 프랑스가 싫어 동구권 국가들을 지원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내년 대선, 더 나아가 금배지 유지를 위해 하나 둘씩 탈당하고 있다. 신문은 배부른 방송이 보기 싫어 중간광고를 비롯한 광고시장의 자유화를 반대하고 방송은 삐뚤어진 신문이 보기 싫어 엄격한 독점기준을 설정한 언론법을 지지한다. 그랬다. 세상의 대부분 결정은 초등학교 6학년생의 기준과 질적인 측면에서 유사했다. 그 기준은 아주 단순했고 명료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역시 어른들답게 아이들이 갖지 못한 탁월한 능력을 하나 지니고 있었다. 자기정당화란 능력 말이다. 아이들을 보자. 제인이는 영준이가 미워서 때렸다고 말하고 점례는 동필이가 얄미워서 따돌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은 인류 평화를 위해 대량살상무기를 지닌 이라크를 침공했고 약소국의 핵무기 보유를 금지한다고 말한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한국 정치 발전을 위해 탈당을 하며 신문은 시청자를 위해, 방송은 독자를 위해 서로를 비판한다고 말한다. 단순한 이기심으로 돌아가는 어른들의 행위는 그래서 아이들의 행동보다 훨씬 위선적이다. 모든 판단의 근저에 있는 정치성을 부정하는 어른들의 행위는 그래서 역겹다.    

 

 <약소국 그랜드 팬윅의 뉴욕침공기>는 이런 위선적인 국제관계를 까발린다. 물론 정공법이 아닌 풍자를 이용한 방식으로 말이다. 물론 1950년대 소설이기에(물론 난 읽으면서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풍자의 강도는 요즘 소설에 비해 약하다.(박형서의 ‘두유전쟁’과 비교 해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약소국 그랜드 팬윅..>은 풍자의 교과서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냉소적인 문체로 터무니없는 사건을 진지하게 묘사하는 방식은 최근 한국 소설의 핵심 유머 코드다. <그랜드 팬윅..>은 이런 방식을 이용해 사회 곳곳에 숨겨져 있는 위선을 살며시 드러낸다. 유머코드를 통해 벗겨본 사회의 위선은 또 다른 코미디다. 이렇게 소설은 자연스럽게 비판과 유머를 동시에 제공하며 풍자의 목적을 훌륭히 수행해낸다. <그랜드 팬윅...>을 읽으며 문득 오늘날 어른들의 위선을 한 번 살짝 들춰본다. 그 안에 미국, 영국, 프랑스도 정치인, 언론인도 없다. 제인이와 영준이, 점례와 동필이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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