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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태어날 때 전 알몸이었습니다. 하나의 인간 덩어리였죠. 아. 아니군요. 나이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 종교란 옷도 입고 있었네요. 전 모태신앙입니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알몸이었던 적은 없네요. 하지만 태어난 이후 급속도로 새 옷을 껴입기 시작했습니다. 전문용어로 사회화 과정을 겪기 시작한거죠. 강남사람이란 옷도 입었고요. 4년제 대학생, 서울 사람, 노무현지지자, 이성애자, 회사원 등의 옷을 입었고요. 다양한 무리에 얼굴 들이밀면서 그 때 그 때 새 옷을 하나씩 껴입었습니다.
지금은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입니다. 너무 많은 옷을 입었거든요. 근데 제가 정상이래요. 모두가 많은 옷을 껴입고 있으니까요. 이 옷들이 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는 우리가 입은 옷을 연구했답니다. 그 옷을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를 정의 내리려고 했다네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우리가 마땅히 입어야 할 옷의 목록을 작성하기도 했답니다. 이성, 도덕, 종교 같은 옷을 말이죠. 웃기죠?
근데 옷이 많아지면서 저랑 지나치게 다른 옷을 입은 사람과는 아예 만나지도 않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전 노숙자 옷을 입은 사람에 대해 모릅니다. 난곡동 달동네 옷과 생활 수급자 옷을 입은 사람도 모르고요. 이슬람 옷을 입은 사람도, 팔레스타인족 옷을 입은 사람도 모릅니다. 가끔은 내가 껴입은 옷들 때문에 다양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차단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전 나은 편입니다. 다른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옷이 좋다며 싸우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그래서 전 옷을 다 벗고 싶을 때가 있어요. 처음엔 어색할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익숙해지면 좋을 수도 있습니다. 알몸으로 만난다면 누구나 똑같이 만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자기 앞의 생生>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옷을 다 벗진 못하더라도 벗으려 노력해야겠다는 사실을요. 모모(모하메드)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알몸을 투시하는 능력이지요. 아니 그에게 옷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모모는 처음부터 아빠란 옷, 나이란 옷도 입고 있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는 모두와 어울릴 수 있습니다. 여자가 되고픈 전직 복서 출신 트랜스젠더 롤라 아줌마랑도 어울리고요. 유태인 로자 아주머니와도 지낼 수 있습니다. 85세 하밀할아버지도, 세네갈인인 포주 은다 아메데씨도 모모의 친구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옷 입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옷을 하찮게 생각하는 모모는 그래서 참 힘듭니다. 창녀란 옷을 입었단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못 키웁니다. 사람이란 옷을 입었기에 로자 아주머니는 고통스러움에도 계속 목숨을 연명해야 합니다. 아들이 유태인으로 컸다는 사실을 알고 아랍옷을 입은 아버지는 충격 속에 목숨을 잃습니다. 모모는 이 모든 게 야속하기만 합니다. 자기 앞에 놓인 옷 때문에 모두가 힘들어해야 하니까요.
저도 가끔 제 옷의 무게 때문에 힘들 때가 많습니다. 카뮈란 사람이 그러더군요. 우리는 무거운 옷을 입어야 할, 또 그 옷 때문에 다투고 괴로워해야 할 숙명을 타고났다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옷 때문에 항상 무언가에 억눌려 지내는 고통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 앞에 놓인 生은 그렇게 암울하지만은 않습니다. 모모를 보면 알 수 있거든요. 모모는 로자 아주머니, 모세, 하밀 할아버지, 롤라 아줌마, 자움씨 형제, 왈룸바 일행을 사랑합니다. 사랑으로 모모는 야속한 세상을 견딥니다. 맞아요. 우리는 다른 누군가와 부대끼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힘은 옷의 무게를, 아니 옷을 입어야만 하는 숙명을 충분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는 아무도 살 수 없다는 하밀 아저씨의 말은 그래서 가슴에 와 닿습니다. 우리 모두 모모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옷을 하나씩 벗으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게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 앞의 生을 즐길 수 있는 조건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