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추억 - 가슴 뛰는 그라운드의 영웅들
김은식 지음 / 이상미디어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때는 전국이 월드컵 열풍으로 뒤덮여 있던 2002년. 친구는 월드컵 열풍을 비판했다. 광기의 표출이란 것이었다. 친구는 광기가 안 좋은 힘과 결합할 때 벌어질 상황을 우려했다. 논리적으로 일리 있는 비판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박을 할 수도 없었지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얼마 전, 그 친구를 또 만났다. 우연히 야구 얘기가 나왔다. ‘야구에 관심도 없던 형이 어쩐 일이야?’ ‘야, 나도 이제 야구 잘 알아. <야구란 무엇인가>란 책도 읽었어’ ‘난 요즘 삼성이 잘 못해서 별로 관심없어’ ‘야, 삼성 야구는 재미없어. 전략이 없잖아’ 삼성팬으로 잠깐 발끈했다. ‘전략이 없다니, 뭐가 없어?’ ‘난 sk가 좋아. 한국에서 전략 있는 팀이 sk정도 밖에 더 있냐?’ 그 때 생각했다. ‘아~ 이 친구랑은 스포츠에 관한 얘긴 하지 말아야겠네’ 친구는 스포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야구를 좋아하는 것과 야구란 무엇인가를 아는 거는 전혀 다른 문제다. 야구, 더 나아가 스포츠는 논리적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열광과 분노를 담고 있는 감정의 영역이다. 아무리 약하고, 재미없고, 더티한 경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팀이 내가 응원하는 팀이라면 가슴으로 무한한 애정을 쏟게 되는 비논리의 공간, 그곳이 스포츠의 장이다. 친구는 내가 생각하는 스포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광기와 전략을 운운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비논리적인 감정의 동물로 변할 때는 야구 경기를 볼 때다. 한글을 간신히 깨우치던 시절, 이만수와 김봉연의 100호 홈런 경쟁을 보며 야구의 세계에 입문했다. 사자가 좋아, 삼성의 팬이 됐다. 그 때부터 시작된 야구사랑. 하지만 야구는 내게 즐거움보다는 분노를, 웃음보다는 눈물을 훨씬 많이 안겨줬다. 삼성은 최강 전력을 갖추고도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해야 했고, 삼성이 좌절하는 횟수에 비례해, 소년 야구팬의 상심을 날로 커져갔다. (야구팬의 분노와 슬픔은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가장 적확히 나타나있다.) 물론 인천 야구팬들에 비하면 내 좌절은 별거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삼성의 이미지는 묘했다. 전형적인 악역의 포스를 지닌 팀이었다.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좋은 선수들을 휩쓸고, 우승을 위해 승부를 조작하기도 하는(일부러 져주고), 그러면서도 권선징악 드라마의 마지막 결말처럼 우승엔 실패하는 악역, 그게 바로 삼성라이온즈였다. 문제는 내가 악역을 사랑했다는 점. 때문에 인천 야구팬들과 같은 동정표도 얻을 수 없는, 그러면서도 페이소스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삼성 팬들이었다. 그렇게 야구에 매달린 지 20년이 넘었고, 꽤 긴 시간 동안 야구의 추억은 꽤 두꺼워졌다. 
 


강은식이 쓴 <야구의 추억>은 적어도 내겐 모르는 정보를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옛 추억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여주는 오랜 친구 같은 책이다. 책엔 82년부터 기록된 무수한 그라운드의 드라마들이 담겨있다. 물론 대부분의 드라마는 슬픈 결말이었다. (사실 해태 타이거즈의 팬이 아니고서야, 대부분 슬픈 결말이 아니었을까) 더블헤더에서 9개의 안타를 몰아치던 타격 천재가 현대로 트레이드 돼 초라하게 은퇴했다는 강기웅의 이야기, 강속구 투수로 데뷔 전부터 주목을 받았지만 불안한 제구력으로 온갖 비난을 받았다는 박동희의 이야기, 94년 인천 팬들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김홍집의 이야기, 선동열을 상대로 181구의 투혼을 보여줬던 박충식의 이야기까지. 강은식은 스포츠팬의 가슴 속에 담겨있는 응어리를 절묘하게 흔들어대며 야구의 추억에 담겨있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리가 아닌, 좋고 싫고를 따지는 감정의 영역을 절묘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그는 기록 뒤에 숨어 있는 선수들의 드라마에 집중하고, 때로는 화려하지 않던 데드볼왕 김인식이나 전문 대타였던 김영직에게 애정을 쏟는다.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갈 수 있어도, 스포츠에 눈물을 흘려본 사람이라면 강은식이 쏟아내는 애정에 마음이 흔들린다. 물론 현재의 이야기가 없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그 때 우리를 울렸던 선수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으며, 그 때를 어떻게 회상할까 궁금하다. 발로 뛴 취재가 좀 더 곁들어 졌다면, 그가 솜씨 좋게 풀어내는 감정적 이야기는 더 큰 힘을 발휘하지 않았을까 싶다. 전체적인 글들이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된다는 점도 칼럼으로 볼 때와는 달리 아쉬웠다. 
 


아내는 내게 지금도 묻는다. 그렇게 괴로워 할 거면 왜 야구를 보냐고. 욕하면서, 화내면서 삼성을 좋아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답은 나도 모른다. 지금도 욕하면서 삼성을 응원하고, 경기에 질 때면 스포츠 기사 근처에 얼씬도 하기 싫다. 하지만 스포츠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화내고 울고 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한 번의 승리가 주는 맛은 달콤하고 우승의 성취감은 크다. 침대 밑에서 엉엉 울었던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야구에 대한 열광이 커져갔던 것이다. 경기만 하면 이기고, 언제나 내 뜻대로 되는 공간이 스포츠였다면 그 누구도 지금처럼 열광하지 않았을 게다.(그런점에서 2002년의 우승이 두산을 4승 무패로 이긴 2005년의 우승보다 감격적이었다.) 1994년, 대학교 1학년이던 선배는 한국시리즈 경기를 보던 친구를 평소처럼 놀려대며 장난을 쳤다. 그 때 친구는 TV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OO야. 미안한데 오늘 만큼은 좀 혼자 가만히 있게 해줄 수 있겠니. 아니면 함께 조용히 TV 보던가’ TV에선 엘지와 태평양의 한국시리즈가 펼쳐지고 있었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꼴찌를 전전하던 인천야구팀이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올라간 순간. 분명 선배의 친구가 흘린 눈물은 10년 넘게 슬퍼하며 커져갔던 야구에 대한 열광의 결과물이었을 게다. 그래서 지금도 난 욕하고 화내고 슬퍼하며 야구를 본다. 그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야구의 영역이다. 내가 지금 화내고 슬퍼했던 감정의 순간은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이 펼친 동작 하나하나에 새겨져, 또 하나의 추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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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19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프로야구 개막 카운트다운에 해가 뜨고 지는 2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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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감정의 영역. 좋은 글에 동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