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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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는 경향신문에 2005년 연재됐던 만화 모음집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만화가 지망생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다. 5년 전에 나왔지만 지금 떠드는 88만원 세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특히 집에 물이 새자 주인공과 친구들은 주인에게 항의하러 간다. 하지만 주인의 뻔뻔한 대응. 하지만 앞에서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방으로 돌아와 ‘C-8’이라며 분노해보지만 거기까지다. 그들의 분노는 ‘왜 미안해하지 않는거냐’는 의구심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회의 부조리조차 개인의 부족함으로 받아들이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물론 신문 연재용으로 그렸기 때문인지 분량이 짧다. 때문에 내용의 깊이보다는 뒤통수를 휘갈기는 임팩트로 승부를 봐야한다. 마치 네 컷 만화처럼. 하지만 그 부분에서 <습지생태보고서>는 아쉽다. 에피소드를 다 읽고 난 뒤에도 뭔가 미적지근하다.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기엔 분량이 짧다. 공감이 좀처럼 어렵다. 때문에 만화 속 유머는 한층 더 먼 곳에 있다. 같이 웃고 싶지만 쉽지 않다. 극중 사물을 의인화하는 내용은 만화와 나 사이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든다. 현실논리를 대변하는 사슴의 존재도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상투적인 고민과 이야기도 엿보인다. 주인공들의 자취방을 습지로 비유해, 이곳의 생태를 관찰하겠다는 책의 컨셉도 명확하게 와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습지생태보고서>의 한 에피소드가 날 사로잡았다. ‘제목; 팔이 잘려 본 사람은 손가락 잘린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 등록금 때문에 휴학을 고민하는 친구에게 세 명의 친구가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전한다. ‘친구1; 야 우리집은 아직도 두 칸짜리 전세야. 니넨 그래도 아파트라도 있잖아.’ ‘친구2; 난 어릴 때 6개월 동안 밥에다 간장만 비벼먹은 적도 있다. 야.’ ‘친구3;너 태풍 부는 날 지붕 날아 갈까봐 잡고 있어봤냐?’ 대화는 끝났다. 이어지는 작가의 독백. ‘이런 경우 고민의 당사자는 죄인이 되고 가장 비참한 경험 소유자가 유일한 발언권자가 된다.’ 기가 막힌 현실 통찰력이다.



선배는 팔이 잘린 사람이 손가락 잘린 사람을 위로하지 못하는 경우를 두고 인간의 경쟁심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매사에 지나치게 경쟁적인 사람은 심지어 고통마저도 경쟁으로 받아들이고, 남의 고통보다 자신의 고통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넘어져서 팔꿈치가 까진 친구의 상처를 바라보며, ‘그건 아무 것도 아냐. 난 지난번에 롤러스케이트 타다가 아스팔트 위에서 넘어졌는데, 무릎 양쪽이 다 까졌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선배는 경쟁이 몸에 배어버린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피곤하다고 했다. 경쟁할 필요가 없는 부분까지도 경쟁하려드니까.



일면 이해가 가면서도 난 조금 다르게 생각해본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남의 상처를 이해하는 법을 몰라서, 위로하는 방법을 더더욱 몰라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상처가 더 크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자신의 방식대로 위로를 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야 그 상처 가지고 너무 괴로워 하지마. 난 이런 상처도 겪었어. 이것에 비하면 네 고통은 얼마나 작은 거니. 그러니 괴로워하지 말라고.’라고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동생 둘 딸린 소녀 가장이 할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밤마다 고생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고민은 투정에 불과했음을 깨달으라고 이야기하는 식이다. 그런데 어쩌지. 내가 겪는 상처는 투정이 아니라 진짜 아픔인걸. 네 눈에는 투정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 가슴은 지금 너무나 아프다는 걸. 내 상처도 네 상처 못지않게 깊고 크다는 걸.



우리는 동정하지 못한다. 남의 마음을 진솔하게 느끼지 못한다. 이성복 시인은 느끼지 못함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모든 느낌은 그(바슬라브 니진스키)에게 날카로운 칼끝으로 다가오며, 그 칼끝보다 더 지독한 것은 바로 타인의 느낌 없음이다..... .... 그가 그의 삶을 그토록 괴롭혔던 것은 세상의 모든 죄는 느낌 없음으로부터 저질러지기 때문이었다. (이성복,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힘들다고 이야기한 아내는 단지 따뜻한 위로가 듣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튀어나오는 고난의 경쟁담. ‘근데 니네 회산 편한 편이야. 사기업 다니는 애들은 훨씬 더 악랄한 상사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아. 그런 애들에 비하면 네 고통은 고통도 아니야.’ 마음으로는 전혀 남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고선, 입으로 다 안다는 듯 이야기한다. ‘나도 공기업 다녀봤잖아. 그런 빡빡함에 신물 나는 경우가 많지. 그럴 때 나는 그냥 눈귀 닫고 무시했어. 너도 그래봐.' 느끼지 못하는 말은 위로가 아니다. 염장이다.


물론 여자 친구를 위한 스포츠카를 사기 위해 밥을 굶고 괴로워하는 철없는 고민도 분명 있을게다. 하지만 난 상대의 고민과 상처가 철없는 고민인지 아닌지 평가하기 이전에, 있는 그대로 상대의 아픔을 느껴보고자 하는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처와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 앞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가 있다. 1.친구의 고민이 대화의 주제여야 한다. 갑자기 자신의 고생담으로 대화의 화제를 돌리지 말자. 전혀 위로되지 않으니까. 2.한 번 듣고 고민의 핵심을 다 아는 듯 이야기하지 말자. 고민 당사자는 당신처럼 단순한 뇌를 갖고 있지 않으니까. 3.상대의 고민을 평가하지 말자. 그냥 공감해보자. 때론 백 마디의 위로보다 함께 울어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될 수 있으니까. 팔을 잘린 사람도 손가락 잘린 사람의 상처를 함께 아파해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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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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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는 그를 진보 세력의 마키아벨리라 불렀다. 신영복 선생이 성(聖)의 세계에 존재하는 인물, 진보 세력의 정신적 지도자라면, 그는 현실 바닥에서 진보의 가치를 전략적으로 실현하고자 애쓰는 인물이었다. 대학 시절, 그는 운동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달했다. 하지만 세상의 벽은 견고했고, 무수히 좌절했다. 그는 잠시 물러나 이론을 연구했다. 더 많이 보고 배웠다. 그 후 정치권에 진출해, 진보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권력 투쟁에서 승리, 정권을 창출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정부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요직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6,17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참여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일했던, 그는 바로 유시민이다.


<청춘의 독서> 는 유시민의 생애에 큰 영향을 끼친 책에 관한 이야기다. 인생을 살아가며 갈림길과 장애물에 부닥쳤을 때, 그가 들쳐보던 책을 소개하고 있다. 유시민은 오래 전 읽었던 책을 지금 다시 꺼내 읽고, 그 때의 소회와 현재의 느낌을 씨줄과 날줄 삼아 책을 엮어 나간다. <청춘의 독서>는 유시민이 읽은 책의 서평 모음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 유시민이 걸어온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일종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책을 통해 그의 삶을 재구성해보는 것이 <청춘의 독서>가 지닌 또 다른 매력이다.

유시민은 올곧은 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다양한 책을 접했다. 독서를 통해 학생 유시민은 자신의 내면에 진보적 정치인 유시민의 씨앗을 뿌린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을 읽고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어째서 착한 사람들이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할까?’ ‘인간 사회는 이러한 부조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죄와벌>을 읽는 내내 이런 의문이 나를 사로잡았다.” (P.17) 그는 책을 읽고 막연하게 가난의 책임이 사람이 아닌 사회에 있음을 느꼈다. 난 바로 이 질문이야말로 정치인 유시민이 탄생하게 된 근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은 정치적 억압의 시대이자 독재의 시대였다. 농촌법학회에 들어간 유시민은 그 때 ‘더 많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했다.’(P.35)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보며 지식인으로서의 역할과 모습을 고민했고,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읽으며, 착한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는 사회에 저항해야 한다는 신념을 공고화한다. “억압과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연대하고 투쟁하는 것이, 단지 자기 자신의 행복을 도모하는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하고 역사와 문명의 승리를 앞당기는 거룩한 행위가 된다는 신념은 그 얼마나 매력적인가!” (P.53) <전환시대의 논리>는 청년 유시민의 개안을 가져왔으며, <공산당 선언>은 청년 유시민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그는 2002년 개혁국민당을 창당하며 정치에 입문한다. 그는 국회 안에서 보수 정치인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 해 말 대선에서, 그는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핵심 참모로 활동하며 그의 당선을 돕는다. 화염병과 돌멩이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던 청년 유시민이 권력의 중앙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몇몇은 권력의 핵심에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 초심을 잃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을 온 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단순히 지식소매상으로 남아있기에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나 뜨거웠다. 그가 사마천의 <사기>를 읽고 남긴 내용이다. “유방과 한신은 야수적 탐욕이 판치는 정치, 사회적 혼란과 전쟁의 한복판에 몸을 던졌다. 때로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고 때로 스스로 야수가 되어 싸운 끝에, 야수의 탐욕이 지배하는 혼란의 시대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냈다.... 정치는 위대한 사업이다.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P.180)


'왜 착한 사람이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에 몰두하던 소년 유시민은 가난한 사람에 관한 정부의 정책을 움직이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된다. 그래서인지 <청춘의 독서>에는 서민의 복지를 담당했던 책임자로서의 고뇌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는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인간의 평등과 생존권을 옹호하는 모든 사상과 이론은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유해한” 것’(P.83)이란 주장에 강력히 반박한다. 또한 그는 다윈의 주장을 통해 보건복지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윈은 국가의 공중보건 정책과 사회복지 정책을 “우리 본성의 고결한 부분”이 만들어낸 것이며, 만약 이것을 버린다면 “어느 정도의 이익”과 “극도의 죄악”이 공존하는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보다.’ (P.219)


(여기서 잠깐. 맬서스는 산술급수적인 식량 증가가 기하급수적인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해 결국 많은 인구가 굶주릴 것이라는 어두운 미래 전망을 했던 경제학자다. 우린 보통 맬서스에 대해 여기까지 알고 있지만,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인구를 조절하기 위한 자연의 조치다. 때문에 굶주리는 사람을 돕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므로 철저히 금지해야 한다. 이것이 맬서스가 했던 끔찍한 주장이다.)


2007년 유시민은 모든 공직생활을 끝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이름은 서울 시장 후보 주변을 맴돌고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정치인 유시민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청춘의 독서>에서 보여준 그의 박식함과 인간적인 솔직함을 바라보며, 그가 정치를 한다면 지금 보다 세상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렇다면 그가 야인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정계로 복귀하게 될까?


그는 <청춘의 독서>의 마지막 서평 책으로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소개한다.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은 과거 여러 세대의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자기의 잠재능력을 발전시켜나가는 데 있다....현대인은 여러 세대의 경험에서 배우고 그것을 자기의 경험과 결부시킴으로써 사고의 효율성을 몇 배로 확대하였다....역사는 획득된 기술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진보다.” (역사란 무엇인가 中) 역사의 진보를 믿는 그는 <청춘의 독서>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나는 지쳤다. 존경했던 이들은 먼 곳으로 떠났고, 사랑하는 동료들은 시대의 삭풍에 떨고있다...다른 생각 없이 그저 잘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하면서 나에게 친숙한 작은 공동체 안에서만 머무르고 싶다. 그런 나를 선생(E.H 카)은 따뜻하게 격려해준다. “역사와 사회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어떤 자동적인 또는 불가피한 진행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에 대한 믿음”이라고. 이 믿음만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그의 격려를 받아들여야 할까?’ (P.312)


24년 전, 유시민은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때,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의 마지막단락에 러시아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시를 인용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때문에 난 그가 다시 속(俗)의 싸움에 복귀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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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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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을 ‘헛똑똑이’라고 부른다.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로써는 확실한 정체성을 형성한 인간. 하지만 일의 세계에서 나오는 순간 텅 비어버린 감수성과 도덕성으로 상대방을 당혹케 만드는 인간’이 바로 헛똑똑이다. 주로 전문가 집단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교수, 펀드매니저 등등. 헛똑똑이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에 관해서 치열한 탐구열을 보이고, 그렇게 습득한 지식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그들 중 몇몇은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 또한 자신의 전문 분야를 벗어나는 순간, 햄스터 수준의 감수성과 상식으로 주변 사람들을 경악시킨다.

헛똑똑이의 부족한 감수성과 도덕성은 사이코패스의 기질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사이코패스의 흉악범죄는 상대방 감정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게다가 사이코패스 중 일부만이 흉악범죄자가 되며, 대부분은 사이코패스적 기질을 활용해 업무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많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햄스터 수준이다보니, 연대나 개혁 같은 사회적 의무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다. 때문에 대부분의 헛똑똑이들은 개인에 대한 성공엔 강한 열망을 나타내면서도, 나와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선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물론 PD나 기자와 같은 언론인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 KBS에 현 대통령의 언론특보 출신 사장이 임명됐다. KBS는 공영방송으로, 정부 정책을 거침없이 비판할 수 있는 프로그램 자율성이 중요하다. 때문에 KBS 사장에게는 다른 어떤 기관의 수장들 보다 엄격한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된다. 하지만 정부는 특보출신 사장 임명을 강행했다. 이에 KBS 구성원들은 강렬 반발하며 총파업으로 맞섰다............
라고 말해야겠지만, 놀랍게도 KBS는 조용했다. 급기야 총파업이 부결되는, KBS 노조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투표율은 80%가 넘었지만 반대율 역시 40%를 넘어섰다.

언론특보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다양했다. ‘KBS가 언제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냐’는 자조적 현실파. ‘개떡 같은 전임 사장 보다야 낫지 않겠냐’는 무대책 낙관파. ‘파업 같은 싸움보다는 프로그램과 리포트의 질에 더 집중해야 할 때’라는 모범생적 실리파. 하지만 모든 반대의 밑바탕에는 ‘싸운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패배주의적 정서가 깔려있었다. 결국 KBS는 조용한 길을 택했다. ‘공영방송의 독립이고, 언론 자유고 다 필요 없다. 우린 프로그램만 잘 만들면 된다.’ 내 눈에 비친 KBS의 모습은 이랬다. KBS는 ‘일로써는 확실한 정체성을 형성한 인간. 하지만 일의 세계에서 나오는 순간 텅 비어버린 감수성과 도덕성으로 상대방을 당혹케 만드는 인간’의 전형이었다. 헛똑똑이들에게 언론 자유나 독립적인 공영방송 확립은 남의 문제인 것 같았다.


이언 맥큐언의 <암스테르담>은 두 명의 헛똑똑이에 관한 이야기다. 클라이브는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곡가이며, 버넌은 일간지의 편집국장이다. 두 사람 모두 몰리라는 여성을 사랑했으며, 자신의 분야에서 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일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순간, 진공 상태의 도덕성과 감수성을 마주하게 된다. 클리이브는 곡에 대한 영감을 유지하기 위해, 강간당하는 여성을 그냥 지나친다. 버넌 역시 적나라한 사진을 이용해,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외무장관을 끌어내리고자 한다. 결국 이 사건들은 두 사람을 파멸로 이끌게 된다.

이안 맥큐언은 <암스테르담>을 쓰며, 연극을 염두에 뒀다고 말한 바 있다. “원래 이 작품에는 comi-tragedy라는 부제가 달려있었고, 그래서 다섯 장으로 구성되었죠.” 그래서인지 난 <암스테르담>을 읽는 내내 셰익스피어 비극을 떠올렸다. 그리스비극에서 인물들은 신이 부여한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비극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비극에서는 주인공의 결함이 비극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햄릿>에서는 우유부단함이, <오셀로>에서는 질투심이, <리어왕>에서는 어리석음이, 그리고 <맥베스>에서는 야심이 비극의 원인이 됐다. 그리고 이언 맥큐언은 오늘날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결점으로 텅 비어버린 감수성과 도덕성을 지목한다. 이는 곧 헛똑똑이들의 부족한 도덕성과 감수성이 이미 현대 사회의 일상이 될 정도로 만연해있으며, 개인과 사회에 파멸을 가져올 만큼 위협적임을 말해준다. 결국 <암스테르담>이 보여주는 비극은 이언 맥큐언이 오늘날의 헛똑똑이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다.


세상의 급류는 끊임없이 인간의 감수성과 도덕성을 마모시킨다. 자연히 나이가 들수록 감수성은 무뎌지고 도덕성은 모호해질 것이다. 세상과 조금씩 타협하게 된다. 그 때부터 세상은 조용해진다. 감수성과 도덕성의 부재는 곧 내부 에너지의 상실로 이어진다. “오전치고는 드물게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버넌 핼러데이는 문득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암스테르담>의 문장처럼, 극단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일지도 모른다. 외부 사물을 보고도 느끼지 못하고, 외부 자극에도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순간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은 연민(eleos)과 공포(phobos)를 환기시키는 사건을 통해 감정(pathema/pathos)의 카타르시스(katharsis, 정화)를 행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리스 시대에나 통용될법한 이야기일 뿐, 현대인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다. 감수성이 무딘 헛똑똑이들의 연민과 공포는 어지간한 사건으로 꿈쩍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감수성이 완전히 퇴화된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 <암스테르담>을 권한다. 이언 맥큐언의 소설을 읽고 부족한 감수성과 도덕성이 가져오는 비극을 통해 감정의 정화를 경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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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경제학 1 - 부동산의 비밀 위험한 경제학 1
선대인 지음 / 더난출판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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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큰 침체에 빠져있던 지난 가을, 엄마는 조심스럽게 아파트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아파트 값이 많이 내려갔던데 지금 너 사는 집 전세 빼고, 은행에서 대출 좀 받아서, 아파트 하나 사두는 게 어때? 지금이 기회인 거 같은데." 엄마 말에 난 잠시 당황했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금융위기가 언제 끝날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었다. 전문가들도 나서서 '이럴 때는 무리하게 투자하기 보다는 가만히 있는 게 낫다'고 말하던 때였다. 그래서 단호하게 거절했다. 1년이 지난 요즘, 엄마는 나만 보면 1년 전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신다 "요즘 집값 다시 오르는 거 봐라. 그 때 엄마 말 듣고 좀 사놨으면 얼마나 좋았냐. 이젠 올라서 사고 싶어도 못 산다. 아까워서 어째~" 아쉬워하던 엄마에게 한 마디 건넸다. "엄마, 근데 이제 아파트 사서 재미 보는 시댄 지났어. 아파트에 거품이 많이 껴있었으니까 앞으론 떨어질 거야." 내 말에 엄만 피식 웃었다. "흥, 거품이니, 이제 곧 떨어지느니 하는 말은 10년 전부터 나오던 얘기다."


지금도 난 엄마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혹시나 나의 이론적 지식보다는 엄마의 체험적 지식이 더 정확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최근에 우리 집 근처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생겼다. 2,000세대는 넘는 단지였다. 처음엔 '저 정도 공급이면 그래도 주변 아파트 가격이 좀 떨어지겠지' 싶었다. 그런데 새로 생긴 아파트의 32평 가격이 무려 10억 원에 달한다는, 전세도 3억이 넘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격이었다. 가계의 평균 소득 대비 10억이란 가격은 턱없이 높았다. 과연 10억짜리 집을 쉽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은행 융자를 끼고 구입한 투기 수요가 대부분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한국에선 금융위기의 공포가 채 가시기도 전에, 활발한 부동산 대출이 이뤄지고 있다는 의미다. 금융위기에도 한국의 부동산 불패 신화는 사라질 줄 몰랐다.


일반적으로 경기가 좋아지면, 은행들은 대출 기준을 낮춘다. 그러면 돈이 시중에 많이 돌게 된다. 동시에 경기 호황은 사람들에게 풍요감을 심어준다. 사람들은 주식과 부동산 가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신용 공급도 늘어나 투자도 쉬워진다. 이 때 과잉거래가 발생하고, 투기가 시작된다. 투기는 자산 가격에 거품을 가져온다. '친구가 부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사람들의 안락과 판단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없다'는 말처럼 자산 가격의 상승은 더 많은 투자금의 유입을 불러온다. 이제 투자를 움직이는 동력은 광기로 돌변한다. 하지만 거품은 항상 터지기 마련이다. 거품은 그 의미 자체로 지탱할 수 없는 가격변동이나 현금흐름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경기가 하강 국면에 들어서면 다시 대출 기준이 엄격해진다. 시중에 화폐가 줄어들게 되고, 경기는 더욱 얼어붙는다. 경기가 둔화되면 부동산 가격의 상승률이 대출금리보다 낮아지게 되고 부동산을 팔려는 사람이 늘어난다. 부동산 가격은 자연히 떨어지게 되고, 거품은 꺼진다. 이게 바로 거품이 꺼지는 일반적인 모델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부동산에는 경제학의 일반적인 모델이 적용되지 않는다.


왜 일까. 그 답은 바로 현 정부의 정책에 숨어있다. 한 마디로 떨어지는 부동산 가격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막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부동산 거품이 꺼지는 징후들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먼저 지방을 포함한 수도권의 미분양 아파트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국민경제와 가계의 평균적인 체력에 비해 아파트 가격이 너무 높아, 아파트 거래량은 급감하고 있다. 수도권으로 유입되는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아파트 공급을 늘어나고 있다. (그동안 지어왔던 아파트 물량도 곧 쏟아질 예정이다.) 여기에 세계 경제는 여전히 금융위기의 여파로 얼어붙은 상태다. 물론 부동산 거품이 급격하게 꺼지게 되면 한국 경제는 크게 휘청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처럼 건설사가 은행 대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건설사의 도산은 은행의 파산까지 불러올 수 있게 된다. 때문에 거품이 꺼지는 속도를 조절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문제는 현 정부가 아예 거품 자체를 그대로 유지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우선 부동산 거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재건축 규제기준을 완화하고 종부세 등의 세금을 감면했다.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한 규제를 완화한 것이다. 또한 정부가 건설사들의 대규모 미분양 아파트를 구입해줬다. 대한주택보증이 2조원을 들여 환매조건부 방식으로 미분양물량을 매입하게 해준 것이 대표적이다. (P.169) 건설사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도 이뤄졌다. 게다가 금리를 낮추고 가계의 담보대출기간을 연장해줬다. 가계의 부동산 투매현상을 막기 위해서였다. 부동산 관련 대출을 늘려, 부동산 값 폭락을 막겠다는 의민데, 한 마디로 국민이 빚을 내게 해서 아파트 값을 유지시키겠다는 것이다. 덕분에 가계 대출 잔액은 외환위기 직후 165조 8,000억에서 648조 3,000억으로 늘어났다. 결국 정부는 한편으로 부동산 가격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란 신호를 계속 보내면서, 다른 한 편으로 부동산 대출을 쉽게 해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경기가 둔화된 상황에서도 신용 공급이 줄어들지 않고 부동산 가격은 떨어질줄 모른다.


‘여보 우리도 열심히 일해서 애가 학교 갈 즈음엔 10년만 열심히 허리띠 우리 작은 집이라도 하나 장만합시다' 라는 이야기는 현실에선 통용되지 않는다. 월급을 열심히 모아도, 죽기 직전에 나야 간신히 집을 구입할 수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아파트 값 상승으로 1년치 월급을 벌었다는 얘길 들으면 그나마 일하고자 하는 의욕도 사라진다. 물론 건설 경기가 전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거품을 한 방에 제거하는 일은 정권 차원에서도 쉽지 않다는 것 안다. 하지만 서민 경제를 외치는 정부라면, 다른 건 몰라도 부동산 가격의 안정만큼은 1순위로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닐까. 앞으로 몇 년 뒤, 엄마가 내 앞에서 자신의 경험 지식을 자랑하며 '그 때 네가 내 말 안 들어서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는 것 아니냐' 고 탄식하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한다.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한 사람들이 광기에 휘말려 판단한 사람들보다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비정상적인 요구는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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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12-0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거품이 터진다 터진다 하면서 안 터지는지 늘 궁금했는데 여기 해답이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좋은 리뷰 덕분에 뭔가 깨달은 느낌입니다.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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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 내 비가오더니 월요일엔 가을이 되어 있었다. 집 앞 가로수들이 온통 붉고 노랬다. 후드드득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예전에 신랑이 그랬다. 어느 유명한 외국 시인은 한 계절이 지나 식물들이 죽는 걸 보고 자연이 얼마나 잔인한가에 대해 통찰했다고. 진짜 유명한 시인이었고 좀 더 멋있는 표현이었던 거 같은데 난 기억 안난다. (신랑 이 글 보면 부연 설명  좀 남겨주길.) 암튼 그 말을 떠올리긴 했으나 내 감수성은 거기까지 못 미친다. '낙옆 떨어지는 거 이쁘네' 정도만 생각할 뿐이지. 
 

     그치만 식물이 아니라 사람이 시드는 건 다르다. 주말에 비가 나뭇잎에 노화현상을 촉진시키고 있을 때 난 집에서 '에브리맨'을 읽었다. 에브리맨은 주인공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통사람을 위한 보석가게 이름이기도 하고, 늙어죽는 모든 사람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한다. 주인공은 자라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결국 늙고 병드는데, 이 소설은 그 늙고 병드는 장면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늙고 병들어가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알려준다. 그러니까 지나간 젊음에 얼마나 미련을 갖게 되는지 말이다. 부질없이.  


     나도 모든 사람들처럼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서, 이 보편적 상황에 관한 책은 꽤 슬프고 끔찍했다. 그래도 언젠가 겪을 일이라면 알아 두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약을 먹는 셈 치고 읽었다. 물론 나도 언젠가 확연하게 찾아올 노화를 담담하게 견디기 어렵겠지만, 흘려보낸 과거와 건강이 아쉬워 바둥댈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비타민 먹고 운동이나 할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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