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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 신경림의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시
신경림 엮음 / 다산책방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우리가 갖고 있는 감정의 끝은 어디일까요? 무한대란 표현은 우리의 감정을 측정하기 위해 나온 말이 아닐까 싶어요.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할 때 우리 마음속에선 천지가 개벽하는, 감정의 격랑이 입니다. 비단 사랑을 할 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삶 속의 눈물을 발견했을 때, 자연의 오묘함을 체화할 때, 사회의 불합리에 화가 끓어오를 때도 우리의 감정은 온 우주를 집어 삼킬 만큼 무한해집니다. 우린 그 무한한 감정에 허덕이다가, 때론 그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유한성 때문입니다. 말이란 그릇은 우리의 감정을 담기에 너무나 조그마합니다. 그래서 신은 우리에게 시인을 선물해주셨습니다.
시인은 마술사입니다. 그들은 측정 불가한 우리의 감정을 조그만 그릇에 담아줍니다. 그들은 무한한 감정 속에서 작은 결정체들을 뽑아냅니다. 그 결정체에는 뜨거운 사랑과 눈물이, 팔팔한 깨달음과 성스러운 숭고가, 활화산 같은 격정의 알맹이들이 담겨있습니다. 시인은 결정체를 뽑은 후에 그에 맞는 그릇을 조탁합니다. 언어를 새롭게 창조하기도 하고 기상한 비유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감정의 알맹이들이 ‘전용 그릇’에 담기는 순간 측정될 수 없었던 우리의 무한한 감정은 우리 앞에 형상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린 그 형상을 보며 예전에 느꼈던 하늘과 땅의 열림을 되살리는 것이죠.
시인 신경림씨가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시를 선별하여 <처음처럼>이란 시집을 냈습니다. 감정은 처음에 가장 강렬합니다. 그만큼 깊고 거대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한 감정은 서서히 늙어갑니다. 사라질 때까지 말이죠. 그래서 처음 느꼈던 감정은 소중합니다. 시인은 내 인생의 첫 떨림이란 부제로 <처음처럼>에 실린 시들을 소개합니다. 책을 읽다보니 어느새 권태와 무료함 속에 갇혀 시들어버린 감정의 마그마가 두터운 암반을 뚫고 솟아오르는 듯합니다. 처음 느꼈던 순수한 떨림이 되살아납니다.
‘어느 날 당신과 내가/날과 씨로 만나서’(정희성,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사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는 멀리 있습니다.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머뭇거리지 말고/서성대지 말고/숨기지 말고/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문정희, 겨울 사랑) 가고 싶다고요. 때론 님이 그리워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서정주, 동천)놓기도 합니다. ‘여기에 내리고/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나희덕, 젖지 않는 마음)있다는 사실이 시인은 너무 슬픕니다. ‘꽃이/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최영미, 선운사에서)이라며 이별의 슬픔을 갈라진 마음이 상처사이로 드러냅니다. 시간이 한 참 흘러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내리던 집/그 여자네 집’(김용택, 그 여자네 집)을, 그 여자를 사랑했던 마음을 그리워합니다.
우리의 감정이 반드시 사랑과 연관되어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김종삼, 묵화)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광경이 우리의 감정을 흔들기도 합니다. ‘호박잎에 싸 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백석, 주막)고 말하는 소년의 모습에서도 ‘타래곱과 도루모기와/ 피터진 탁의 볏 찌르르 타는/아스라한 연기 속에서/목이랑 껴안고/웃음으로 웃음으로 헤어져야’(이용악, 슬픈 사람들)하는 피난민의 모습에서도 감정은 잔잔한 파도 속에 사로잡힙니다. 때론 나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삶 속의 진실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 진실은 절제되어있어 더 감흥의 폭이 큽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천상병, 귀천)며 삶을 소풍이란 언어에 담아내는 시인.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때도 있는데’(백석, 남산의주 유동 박시봉 방)라며 자신의 심연을 탐험하는 자의 심정을 드러냅니다.
책에 실린 더 좋은 시들을 소개할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책 속에 실려 있는 아름다운 그림들은 언어란 조그만 용기 속에 압축 포장되어 있는 감정들을 독자들이 쉽게 꺼낼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열립니다. 그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감정의 알맹이들. 어느새 내 감정도 그 알맹이들 속으로 녹아듭니다. 가끔 이렇게 우리는 머리가 아닌 가슴을 이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노을 (조태일)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사람들은 누구나
해질녘이면 노을 하나씩
머리에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서성거린다.
쌀쌀한 바람 속에서 싸리나무도
노을 한 폭씩 머리에 이고
흔들거린다.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누가 서녘 하늘에 불을 붙였나.
그래도 이승이 그리워
저승 가다가 불을 지폈나.
이것 좀 봐.
이것 좀 봐.
내 가슴 서편 쪽에도
불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