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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 미국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그 역사와 정치적 욕망
김진호.최형묵.백찬홍 지음 / 평사리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종교인의 과세에 대한 방송을 본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현재 종교인은 납세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 그들의 특권이 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50년 전부터 면세의 전통이 이어지면서 어느 새 관습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이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비판이 제기되었고, 이에 가톨릭과 조계종, 그리고 일부 목사가 세금을 납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대형 교회의 목사들은 세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다. 일례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수장인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는 한 달에 1억에 가까운 십일조를 내고 있지만 세금은 납부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의 회계는 그 누구에게도 감시받지 않는다. 얼마 전 재경부는 자선단체들의 거짓 영수증 발급을 막기 위해 자선단체 법인화를 시도했다. 다시 말해 이들 단체를 법인화하여 내부 회계의 투명성을 꾀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재경부는 어이없게도 자선 단체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종교단체를 이번 법인화 대상에서 제외 시켰다. 몇 년 전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부정 세습이 문제가 되었음에도 말이다. 공식적으로 이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 대선을 앞두고 수많은 종교인들의 표를 날리고 싶지 않은 정부의 속내가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음으로 양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회계의 투명성에 의심이 제기되도, 아무도 이들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한다. 정부도, 국회도, 언론도. 결국 한국의 대형교회는 견제 받지 않는 권력으로 성장해나간다. 부패하는 숙명을 타고난 것이 권력이라는 미국 역사학자, 버나드 베일린의 말을 떠올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대형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분명 정상은 아니란 생각을 할 수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교회가 보여주는 성격이다. 약자의 편에서, 소외된 사람의 편에 서야할 교회가 언젠가부터 강자의, 기득권층의 이익을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비판받지 않는 기득권의 표상으로 자리 잡은 교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즈음, 선배를 통해 한 권의 책을 추천 받았다. 교회 내부에서 교회를 혹독하게 비판한 책,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기독교의 보수성, 그 기원을 찾아 나선 <무례한자들의 크리스마스>들은 집요하게 달려간다. 세 명의 저자 중 첫 번째 저자는 기독교의 과거 행적으로 통해 그들의 보수성을 추적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 시작으로 1907년 평양에서 있었던 대부흥운동을 지적한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대부흥운동을 통해 종교에 경도되었으며, 동시에 혼란스럽던 당시의 한국 사회 상황을 외면하게 된다. 이후 교회는 종교의 비세속성을 강조하며 사회 개혁에 둔감하게 된다.(타계적 복음화; 영혼의 구원이 저 세상에 있음을 강조하여 현실의 문제를 등한시하게 만듦.) 이러한 이들의 전통은 70년대 독재 체제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국가조찬기도회’(대통령을 위해 아침 기도를 드려주는 것, 기도회는 박종철 치사사건이 일어난 기간에도 계속 됨)로 대표되는 70년대 교회는 당시 독재정권을 찬양하며 박정권의 반공, 성장제일주의 이데올로기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결국 한국 교회의 보수성은 김대중 정권에 들어서 급격하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저자는 기독교가 한국에 유입되는 과정을 통해 교회의 보수성을 찾아나선다. 한국 교회의 산파역할을 했던 미국의 북장로교파. 이들은 미국내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종파였다. 60,70년대 자유주의 분위기를 혐오하며 엄격한 교리를 강조했던 제리폴웰, 로버트슨 목사 등이 주축이 됐던 북장로교파는 이후 한국 교회의 선구자들을 키워낸다. 한국 교회의 친미, 반공보수는 결국 이들의 출생 때부터 결정된 것이다.
교회 내부의 비판이었던만큼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가 전하는 메시지는 효과적이다. 또한 비판받지 않는 기득권층을 흔들 수 있는 좋은 시도였다. 한국 대형교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만큼이나,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가 후벼파는 강력한 비판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강력한 목소리가 안타깝기도 했다. 한국 대형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좀 더 냉정하고 차분해야 한다. 목소리와 주장으로 이들을 비판하기 보다는 데이터와 사실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해야 한다. 노엄촘스키의 건조한 ‘팩트 나열 비판 방식’ 이 적절하다는 의미다. 현재 구체적인 자료 없이 대형 교회들을 비판하는 시민단체들처럼,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에도 사례와 증거가 주장에 비해 부족하다. 순복음교회와 금란교회가 구체적으로 범한 과오를 나열하지 않은 채 정황과 분석으로 이들을 비판한다면, 기독교도 입장에서 이들의 주장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겠는가? (물론 철저하게 폐쇄적인 대형 교회의 성격을 고려할 때 사실과 데이터를 구한다는게 쉽지 않을 것이다.) 저자가 세 명이다 보니 같은 말이 중언부언 반복된다는 점도 아쉬웠다. (책에 오타도 많고 비문도 눈에 띄었다. 시민단체의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장외에서 대형 교회를 비판하지 않는 한, 교회는 영원한 성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아직 경기장 안에서 이들을 강하게 비판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이들의 게릴라식 공격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들의 시도가 더 반가운 것은 교회 내부의 비판이라는 점. 다시 말해 아직까지는 한국 교회가 흐르지 않는 물로 전락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비판받지 않는 기득권층에 대한 나의 우려가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를 통해 조금은 줄어든 것 같아서 그래도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