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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P.279)
취업에 목을 매던 대학교 4학년,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었다. 표면적으로는 야구 이야기였지만, 자본주의의 밑바닥을 도도히 흐르는 프로정신을 비판한 소설이었다. 여기서 프로정신의 요체는 모든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환경에 확실히 적응하라는 것. 다시 말해 일하기 싫다고 놀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 노동의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는 과거의 행동이 아마추어적인 행동이라면, 프로는 좀 더 합리적이고 체계체적인 노동 방식을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슐라르란 철학자는 전(前)자본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인식론적 단절’이 있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프로 정신은 두 사회의 인식론적 단절을 메우기 위해 등장한 일종의 구호였던 셈이다. 뛰고 싶지 않을 때는 뛰지 않고, 잡고 싶지 않을 땐 잡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 함에도, 프로정신은 우리에게 무조건 뛰고, 잡으라고 강조한다. 때문에 삼미슈퍼스타즈 선수들은 그렇게 지고도 야구를 즐겼지만, 프로에 진입한 우리들은 좋은 결과를 내고도 즐겁지 않다. 프로정신의 무력화, 바로 박민규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혁명적인 메시지였다.
‘보잘것없는 인간들에게 내면이 중요하니, 고귀한 영혼이 있다느니 말을 늘어놓는 건 선생님 자위를 하고 싶어 견딜수가 없어요, 하는 아이에게 그럼 공부에 집중해보지 않겠니? 자위가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지나친 자위는 건강에 해를 끼칠 수 있단다. 정 참지 못할 경우엔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기 바래 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P.221)
박민규의 신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역시 표면적으로는 연애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허점을 맹렬하게 공격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들고 나온 소재는 외모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그렇다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단순히 외모의 미추만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따분하고 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얼굴 못 생겨도 마음만 착하면 된다고 말하는 단세포적 사고를 조롱하고,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과 그에 대한 차별 뒤에 숨은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끄집어낸다. 그렇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개인의 도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구조에 관한 이야기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P.174)
부르디외는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에 허영이 자리 잡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심지어 허영은 너무나도 깊숙이 박혀있어서, 병사도, 요리사도, 인부도 찬양해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허영심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구별하고자 한다. 이 때 구분의 도구인 ‘취향’이 등장한다. 수준 높은 취향, 수준 낮은 취향. 부르디외는 취향이야말로 계급을 구별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원리라고 설명한다. 결국 높은 취향의 사람은 낮은 취향을 무시하고, 낮은 취향의 사람은 높은 취향에 열등감을 느끼며 끊임없이 높은 취향을 갖고자 노력한다. 다수는 소수가 만들어놓은 높은 취향 앞에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때문에 소수가 규정한 취향의 틀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이 틀이 무너지는 순간은 다수가 높은 취향에 도달했을 때다. 그 순간 다수가 도달한 높은 취향은 다시 낮은 취향이 되고, 상위계층은 또 다시 더 높은 취향을 만들어낸다. 이제 다수는 또 다시 더 높은 취향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부끄러워 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허영을 집요하게 공략한다. 이제 남들과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활발한 소비가 이뤄지고, 자본주의의 불빛은 더욱 화려하게 빛난다.
'외모는 돈보다 더 절대적이야....왠지 알아?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보잘것없는 인간이므로 보이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보잘것없는 인간일수록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세상을 사는 거라구. (P.219)
이제 다른 사람과 스스로를 '구별짓기(distinction)' 위해선 더 많은 소비라는 과시행위로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야 했고, 이 때 경제적 자본이 위력을 떨치게 된다. 하지만 구별짓기에서 경제적 자본만이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부르디외는 일차원적의 자본 외에도, 문화적 자본, 학력자본, 그리고 두 자본을 통해 발생하는 인맥 자본이 구별짓기에 활용된다고 봤다. 이러한 2차원적인 자본을'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이라 부른다. 아름다움이 강조되는 요즘, 외모 역시 주요한 상징자본 중 하나다. 더 많은 상품을 팔기 위해 자본주의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끊임없이 확산한다.그 결과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경제적 자본 못지않은 권력을 행사하고, 타인과 자신을 구별짓게 해준다. 때문에 경제적 자본이 없는, 즉, 부르디외가 상징 자본이라 일컬은 문화적 자본과 학력 자본이 없는 사람일수록 외모 자본에 목을 맨다. 외모 자본은 자본의 힘이 곧 계급을 결정하는 시대에, 보잘 것없은 인간이 유일하게 매달릴 수 있는 자본인 셈이다.
‘인간은 기대를 걸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포기를 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존재이다. 신의 기대대로 살 순 없다 해도, 그래서 인간은 끝까지 스스로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동물이다./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는 한은, 말이다.
외모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결국 화려한 소비다. 소비를 통해 남과 자신을 구분하고, 스스로 자율성의 쾌감을 만끽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영역이야말로 소비자가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산업자본의 음모, 나아가 소비자의 허영을 부추겨 소비를 촉진하는 산업자본의 전략이 관철되는 중요한 공간이라고 보았다. 소비가 활발한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무한경쟁의 각축장으로 내몬다. 그 결과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라는 계급이 형성되고, 사람들 사이의 평등한 공존은 쉽지 않게 된다. 취업 여부 하나로 친구들 사이의 계급이 구분되고, 경쟁에서 밀린 친구는 점점 더 낮은 계급으로 도태된다. 자본주의는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상대에게 대가 없이 무언가를 주는 치외법권 지역이 존재한다. 바로 사랑의 영역이다. 때문에 철학자 강신주는 ‘사랑이야 말로 자본주의로부터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소망스런 감정’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보드리야식 표현대로라면 상품이 가치나 상품이 아닌, 상징으로 교환될 수 있는 공간이고 부르디외의 표현대로 끊임없는 구별짓기의 폭력 속에서 위안을 받은 수 있는 공간이다. 자본주의의 링 안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혈투, 그 속에서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것 역시 상대방의 자본이 아닌,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을 통해 자본주의가 할퀴고 간 가슴 속의 상처를 보듬는다. 사랑이 있는 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 그게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