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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1687년 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를 출간한다. 자연세계를 탐구하기 위한 뉴턴의 이성적 활동이 집대성된 책이었다. 당시 이 책의 출간은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다. 이제 유럽은 서서히 종교의 시대에서 합리의 시대로 이동하게 된다. 일반인들의 쉬운 이해를 위해 역사학자들이 만든 구분에 따른다면, 바야흐로 근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성은 산업혁명과 독립혁명,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다주었다. 이 후 이성은 서양을 지배하는 절대가치가 되었다. 하지만 회의하는 이성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니체, 실존주의, 해체주의 등이 등장하며 이성에 내재된 비합리성을 공격한다. 작위적으로 나누자면 탈근대의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던 이성. 그 이성은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을 일으켰다.(1918년, 1939년) 지식인들은 이성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찾기 시작했다. 유럽에선 이렇게 400년에 걸쳐 전근대에서 근대로, 다시 탈근대로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한국도 유럽처럼 변화하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유럽이 400년 동안 경험한 움직임을 10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압축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결과 “서구에선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가 통시적으로 이어지는 선형성”을 띠는 반면, “한국에서는 시간마저 압축되어 세 개의 역사적 지층이 공시적으로 존재하는 비선형성”을 띠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한국에선 아직 근대화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빠른 성장을 위해선 이성의 도움이 필요했다. 한국은 성장에 도움이 되는 부분, 즉 경제 영역에 한정하여 서구의 근대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세기 영국정부가 영국노동자에게 가했던 차가운 이성의 활동은 한국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일례가 규칙적인 노동 확립이다. 초기 산업혁명 당시 영국에는 성월요일 관행(토요일 오후의 과음으로 인해 월요일 날은 쉬는 관습)이 있었다. 하지만 기업가는 노동자들의 관습(음주, 무질서한 축구경기, 권투 시합, 축제 등)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낙인찍고 이를 억압했다. 한국에서도 ‘인간개조’의 기치아래 노동자들을 시간의 틀에 가두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일본인들이 ‘게으르다’고 했던 조센징은 어느새 부지런한 노동 기계로 개조됐다.”(한국인의 주당 노동시간은 47.6시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아직 나머지 모든 영역에는 이성이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기술과 제도는 서구의 합리주의를 따라잡았지만 한국인의 습속(habitus)은 여전히 조선 시대에 머물러있다. 감성이 넘실되는 공간엔 이성이 자리 잡을 공간은 없어 보인다. 이를 증명할 예는 무수히 많다. 한국인은 모든 분야에서 전사가 되었으며(교통사고가 난 경우를 생각해보자. 독일인은 서로 인사하고 경찰이 알아서 처리하길 기다린단다.) 논문을 조작한 황우석 박사에게 변치 않는 충성심을 보여줬다.(황우석 사태에서 우리가 본 것은 데카르트가 그렇게 경계하던 ‘정념’의 현화였다.) ‘법이나 규칙의 지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크게는 법의 불평등한 적용에서부터 작게는 식당에서 떠드는 아이 내버려 두기까지)여전히 국가의 흥망은 왕(대통령)에게 달려있다는 주술적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더 많은 예를 들 필요도 없다. 말도 안 되는 일에 분노해봤던 우리의 경험을 떠올려보라. 그렇다. 우리의 습속은 근대화의 세례(?)를 아직 받지 못했다.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낯선 눈으로 한국의 문화를 파헤친다. 그는 “이 책의 목적은 한국인의 몸에서 그 ‘구성된’ 층위를, 다시 말하면 한국인의 아비투스를 드러내는데 있다.”고 말한다. 근대와 전근대, 그리고 미래의 시간이 혼합되어 극심한 변동과 불안정을 겪고 있는 한국. 그 변동과 불안정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혹사시키는 한국인. 진중권은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예리한 논리력으로 한국인의 아비투스를 두루 해부한다.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것이 되어 보이지 않던 우리의 존재를 끄집어낸다는 점만으로 이 책은 빛이 난다.
다만 저자가 진중권이란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다. 그가 ‘미래주의’로 구분한 부분은 한국인의 특성을 잘 집어내지만 엄밀히 보면 이 장(chapter)의 문제제기는 국적 간 문제라기 보다는 세대 간 문제에 가까워 보인다.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란 의미다. 현상을 구조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현상을 읽어내는 것에 그쳐 궁금증을 유발하는 부분도 있다. 진중권이라면 현상을 좀 더 깊게 구조적으로 분석해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억지스러운 부분이 읽히기도 한다. (이어령 교수의 글을 읽을 때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작은 옥에 티에 불과하다. 그의 방대한 지식을 타고 한국인의 아비투스를 살펴봤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내 머리는 포만감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