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를 금하노라>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고등어를 금하노라 - 자유로운 가족을 꿈꾸는 이들에게 외치다
임혜지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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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미수다의 루저 발언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신장이 180cm이하인 사람은 루저라는 것이 발언의 요지였다. 발언 당시 상황이 어떻건, 또한 발언 이후 일부 네티즌들이 보여준 파쇼적인 대응이 어떻건 간에, 그녀의 발언 자체엔 문제가 있었다. 젊은 세대의 생각 없는 삶의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그녀는 우선 루저란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키가 작은 사람을 배려하는 방식도, 외모가 삶의 전부가 아니란 이치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생각 없는 발언이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처럼 별 생각 없이 살아간다. 생각 없이 살다보니 머릿속에 개념이 들어있을 리 만무하다.  

사실 개념을 탑재하기 위해선 먼저 비판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생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바탕에 깔려있는 생각이 과연 옳은지 의심하고 비판하는 순간, 나만의 생각과 가치관이 탄생한다. 과연 돈이 삶의 행복을 규정하는 것일까, 외모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나를 드러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과연 학벌일까 등등. 사회의 주류적 가치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린 개념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나를 포함한, 요즘 젊은이들이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 전에 들은 김용택 시인의 강의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 시인은 전북 임실의 덕치 초등학교에서 2학년 학생들을 가르쳤다. 시인은 학생들에게 자세히 보는 방법을 주로 훈련시켰다고 한다. 무언가를 자세히 보게 되면 그 과정에서 사물(또는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데, 이 때 이해한 내용은 오롯이 내 것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인이 가르친 2학년 학생들은 기존의 개념이나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다고 한다. 작고 사소한 것을 진지하게, 진정성을 갖고 바라봤다. 이처럼 사물을 자세히 바라보게 되면 생각이 생겨나고, 생각은 또 다시 고민을 낳게 된다. 고민은 글쓰기 등의 과정을 통해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김용택 시인은 바로 '생각->고민->논리적 정리'의 과정이 곧 자신만의 철학이라고 설명한다. 철학이 밑바탕이 되면 그동안 살아왔던, 그리고 살고 있는 과정에 대한 신념이 생겨나고, 앞으로 살아갈 과정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사물을 자세히 바라보는 것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생각이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불만이 많았다. 요즘 아이들은 자세히 바라보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고 했다. 또한 생각을 갖게 되는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오직 정답만을 외우고 있다고 했다. 때문에 정답은 많이 알아도 직접 생각하고 고민하는 방법을 모르는 학생이 많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논술까지도 정답을 알려주는 한국의 교육 문화 속에서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자신만의 생각을 끄집어내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한 임무처럼 보였다.


       <고등어를 금하노라>는 세상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생활하는 가족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독일인과 결혼해 두 아이를 두고 있는 주부 임혜지씨. 겉에서 보기에 임씨의 가정은 여느 가정처럼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돈보다는 시간을, 순간의 안락함보다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강요와 간섭보다는 자유와 존중을 우선시하는 삶을 실천해왔다. 세끼 식사를 온 가족이 함께하기 위해 직업적인 성공을 일부 포기했고,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소비를 최소화했으며,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난방과 온수, 자동차와 고등어를 포기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자신의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다.”  

임혜지씨의 삶은 고대 에피쿠로스학파의 삶을 연상시킨다. 에피쿠로스는 자신들을 아테네의 상업관계에서 제외시키고 독립을 누리는 대신 검소한 생활방식을 수용했다. 이는 임혜지씨의 삶도 다르지 않다. 남편과 아들의 머리를 25년간 직접 깎아주고 있으며, 웬만한 거리는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한다. 제철 음식을 사먹으며 쓰레기도 거의 남기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성공한 인생은 아니지만 나 스스로는 만족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진중하게 생각해보았는데, 내 인생이 편안한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없다는 것이다.”(P.21)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평가의 기준을 돈에 두는 한 나는 항상 패자로서 우울할 수밖에 없다."(P.23) 임혜지씨의 가족은 자본주의가 이식한 성공의 사고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성공 공식을 비틀어보고 의심하면서, 더 나은 자신들만의 행복 공식을 도출해냈다. 개념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가족이다.     

 

      육아에서도 임혜지씨만의 원칙은 이어지고 있었다. “핵가족 안에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기르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부모의 시간이 귀중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우리는 항상 돈 대신 시간을 선택했다.”(P.22) 부모의 돈이 아닌 시간을 받고 자란 아이들의 삶의 방식도 부모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교라는 거대한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그 시스템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적성이 비슷한 아빠를 따라 도약하는 아들, 취향이 다른 부모 밑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딸, 자긍심 지수를 학교 점수와 동일시하지 않는 현명함, 이런 점들이 모두 우리 아이들이 영재라는 증거다.”(P.81) 때문에 임혜지씨는 아이들 성적이 좋지 않다며 걱정하는 선생님들께 오히려 '얘들은 정서가 안정되어있으니 너무 심려하지마시라'달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식 공부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성적을 얻는 방법이 아닌, 삶의 열정을 심어주고자 한 것이 다를 뿐이다. 학력이 사람을 평가하는 제1척도가 되는 오늘날이지만, 임혜지씨는 “열정 없이 남 보기에만 그럴듯한 턱걸이 인생만 피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공부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이 단지 성적이 된다고 해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만큼은 가장 피해야 할 일이라고 아이들에게 누누이 강조했다.” (P.139) 이들은 단순하지만 기본적인 삶의 원칙에 충실했고, 때론 그 원칙이 사회의 주류적 가치와 배치될 때는 과감하게 주류 가치를 거부했다. 좋은 대학 나와야 성공한다는 주류 가치는 열정 없는 성공은 불행하다는 삶의 기본 원칙 앞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들은 개인의 삶에서 에피쿠로스적 행복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함께 사는 사회의 변화를 위해선 혁명가적 실천을 추구한다.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온수 물 목욕을 최소화하고, 밤엔 따뜻한 물주머니를 안고 잔다. 원시림에서 벌목한 가구나 생활용품은 피하고 야채나 과일 씻은 물을 모아 화초에 물을 준다. 때론 자신의 삶이 지나치게 궁상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녀는 이내 생각의 방향을 바꾼다. “나는 품위 없이 사는 사람일까? 아니다. 몰락해가는 로마에서 우유에 목욕하는 귀족 여인네들이 품위 없는 사람이지, 에너지의 불평등한 분배에 항거하고 물질의 속박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목욕을 자제하는 것은 대단히 품위 있는 행동일 것이다.” (P.50)  

물론 누군가가 물을 수 있다. ‘당신이 그렇게 궁상떤다고 세상이 바뀌기나 하나요?’ 이에 대한 임혜지씨의 답변이다. “세상은 앞에서 활약하는 주연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배경을 이루는 보통 사람들에 의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주연이 아님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이 ‘배경’의 위력을 항상 생각하며 ‘좋은 배경’이 되겠다는 뜻으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씨를 뿌리며 사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기로 했다.” (P.71) 자본주의의 주류적 가치를 거부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임혜지씨 가족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작은 실천을 해나간다. 개념 있는 삶의 실천적 버전이라고나 할까. 말 그대로 지행합일의 삶을 이들 부부는 살고 있다.


       몇 년 전, 아내는 채식주의를 선언했다. 아내는 채식주의 선언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내가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하기 위해 무언가 행동을 한다는 것이 내겐 중요했다. 때문에 육식주의자인 나는 세상의 주류적 가치를 거부하고, 자신의 가치를 위해 행동하는 아내의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세상엔 명품 백을 사고 여름마다 화려한 휴가를 가는 사람도 있고 아프리카 기아 어린이를 돕고 환경 운동을 위해 캠페인에 나서는 사람도 있다. 두 부류 모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이라는 점에선 같다. 하지만 난 후자의 삶이야말로 사회의 주류적 가치를 의심하고 자신만의 생각을 실천하는, 그래서 더 의미 있는 지성인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모든 사회에는 주류가 있고 지성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주류는 ‘주된 흐름’이란 말 그대로 전통을 이어가며 어제와 다름없이, 이웃과 다름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다수이다. 그리고 지성인은 주류의 방향을 잡아주는 소수이다. 지성인은 개인의 양식에 따라 판단하고 이를 용기 있게 표현해 주류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P.195) 지식이 많고 학벌이 좋아야 지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갖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아내와 같은 사람이야 말로 곧 세상을 바꾸는 지성인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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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심리학 - 천 가지 표정 뒤에 숨은 만 가지 본심 읽기
송형석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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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은 심리학을 읽고 있다. 알라딘 인문 서적 베스트셀러 1위~25위 중 무려 9권이 심리학 관련 타이틀을 달고 있다. 네이버의 인문/교양 베스트셀러 순위에도 1위가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이고, 1위에서 25위 사이에 무려 12권의 심리학 관련 책이 올라있다. 제목도 다양하다. 심리학 초콜릿, 심리학이 연애를 말하다, 심리에세이, 괴짜심리학 등등. 여기에 영화로 보는 심리학, 그림심리치유에세이, 몸짓으로 보는 심리학, 그리고 남자들의 문화심리학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서점 어느 곳에서나 새로 나온 심리학 서적을 소개해놓은 부스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지난주에는 우연히 두 편의 심리학 서적을 접하게 되었다. 올 해 심리학은 분명 인문/교양 출판 부분에서 두드러지는 하나의 트렌드였다. 그렇다면 왜 지금 대한민국은 심리학에 몰두하고 있을까.


질문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돈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유명한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이었다.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란 논문을 집필한 바 있는데, 이는 대도시란 삶의 공간이 인간의 정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 살펴본 연구다. 철학자 강신주에 따르면 공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오히려 공간에는 인간을 길들여서 그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상처받지 않을 권리>) 그렇다면 자본주의 이후 등장한 도시란 공간은 인간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우선 농촌과 달리 도시는 훨씬 더 다양하고 강렬한 자극을 쏟아낸다. 때문에 도시의 삶은 낯선 곳으로의 여행처럼, 일상 자체는 농촌의 삶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흥미롭지만 몸과 마음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동시에 외부의 환경도 예전보다 훨씬 빠르게 변한다. 농촌에서의 일이 매년 톱니바퀴 돌아가듯 반복적이었다면, 도시의 일은 급격하게 변하고 그에 대한 빠른 적응을 요구한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동시에 과거 농촌의 삶에는 개인적인 삶의 공간이 매우 좁았다. 김 씨네 개똥이와 박 씨네 순이가 손이라도 잡게 되면, 다음 날 온 마을에 두 사람의 로맨스에 대한 소문이 돌게 된다. 하지만 도시는 개인에게 충분한 자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아파트에 사는 옆집 주인과 인사 한 마디 나누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대도시의 군중에는 분명 익명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자유에 따른 대가도 분명 존재한다. 바로 고독이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사색의 자유와 함께 자신의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의 부재도 함께 가져왔다. 때문에 현대인은 자기 자신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됐고, 자연히 내 안의 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됐다. 농촌에 살던 개똥이는 이웃집 순이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지만, 현대인은 심리학에게 정신적 멘토 역할을 부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대도시가 등장한 지 한참이 지난 지금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일까. 난 신자유주의와 전 세계적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짐멜이 지적한 도시적 삶의 특징이 훨씬 더 강화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금융위기로 회사의 분위기도 급격하게 변화했으며, 그에 따른 조직원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사회 곳곳에서 유명인의 자살과 죽음, 심각한 범죄와 노동자들의 파업, 그리고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다. 개별 사건만으로도 개인의 정신적 삶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뉴스들이었다. 짐멜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자극에 견디며 살기 위해 현대인들은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대해 심장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머리로 반응하게 됐다’고 지적했지만, 최근에 벌어진 사건들은 무감각한 현대인들의 심장을 자극할 정도로 강렬했던 것이다. 이처럼 개별 도시인들이 겪는 심리적 혼란은 예전보다 훨씬 커졌다. 하지만 개인 간의 교류는 예전보다 훨씬 삭막해졌다. 심지어 같은 회사 내에서도 예전과 같은 선후배간, 동기간의 인간적인 교류가 이뤄지지 않는다. 누가 정리해고 대상에 오를지 모를 상황에선 모두가 경쟁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심리적 위안을 제공해줄 마지막 보루인 가정마저도 최근 들어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이제 현대인의 마음은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황무지가 되었다. 무수한 상처에도 어떠한 위안을 받지 못한다. 자연히 사람들은 심리학과 치유에세이를 찾게 된다. 책을 통해서라도 마음의 상처를 위로받고자 한다. 오늘 날 현대인들이 심리학 관련 서적을 찾는 이유다.


이번 주말, 두 개의 심리학 서적을 만났다. 처음 만난 책은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이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농촌에서의 삶은 집단적인 유대관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남녀의 개인적인 관계(사랑)에 대한 관심이 분산될 수 있었다. 하지만 파편화된 인간관계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사랑은 심리적 상처를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자연히 사랑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시인의 정서적 토대가 예전보다 훨씬 불안해진 상황에서 정서의 교감이 필수적인 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실제로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에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듣거나 볼 수 있는 상황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책은 사랑의 장애가 되는 여덟 가지 요소-무감각, 불안, 상실, 편력, 중독, 금기, 트라우마, 오해-를 이야기하고 그에 대한 극복 방법을 모색한다. 테라피스트인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 요소에 관한 케이스가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일종의 사례연구인데, 저자는 자신을 찾아온 환자들의 자세한 이야기를 통해 왜 우리가 쉽게 사랑 방해 요소를 갖게 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책은 모든 상황을 간단하게 재단하고 단순한 해결 방안을 제공해주는 카운슬러용은 아니다. 오히려 한 편의 연애소설 같은 사례 소개를 통해 각각의 문제에 대한 독자들의 개인적인 고민을 제공한다. 동시에 사랑에 실패했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내 안의 문제점을 돌아보게 만든다.


반면 두 번째 만난 <위험한 심리학>은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보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무한도전에 출연한 적이 있는 정신과 전문의가 쓴 책으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명령하듯 대하는 사람, 대화의 초점이 타인에게 가는 걸 못 참는 사람,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 로봇 같은 사람, 의심 많은 사람, 항상 뭔가를 해달라는 사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등등-의 마음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전달한다. 주변 사람 몇 명을 떠올리거나 내 안의 어두운 면모를 객관화하며 읽는다면 훨씬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다만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정의하다보니 상황을 쉽게 단순화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각각의 유형을 설명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사례들을 소개하다보니 각각의 사례들이 파편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차라리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처럼 각 유형에 관련된 사람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있게 소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사회생활을 하며 쉽게 만날 수 있는 유형들이 소개되어 있어, 실제 생활에 쉽게 적용해볼 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다만 왜 이 책의 제목이 위험한 심리학인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책의 내용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심리학 서적에 대한 관심이 반갑지만은 않다. 그만큼 이 시대의 도시인들은 더 많은 심리 치유를 원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다만 사회가 주입한 사고에 따라 오직 취업관련 실용서적만 읽던 사람들이 서서히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적어도 사회가 만든 성공 스토리가 개인의 내면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은 깨달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길 바란다. 단순한 심리 치유를 넘어, 현대 도시인들이 내면적으로 상처 받는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계속되는 상처를 막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개인적인 심리 치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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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발로땅을딛고 2011-03-30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좋습니다. 통찰력이 돋보여요. 저도 강신주 선생님의 글 잘 읽고 있답니다.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 - 사랑했으므로, 사랑이 두려운 당신을 위한 심리치유 에세이
권문수 지음 / 나무수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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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은 심리학을 읽고 있다. 알라딘 인문 서적 베스트셀러 1위~25위 중 무려 9권이 심리학 관련 타이틀을 달고 있다. 네이버의 인문/교양 베스트셀러 순위에도 1위가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이고, 1위에서 25위 사이에 무려 12권의 심리학 관련 책이 올라있다. 제목도 다양하다. 심리학 초콜릿, 심리학이 연애를 말하다, 심리에세이, 괴짜심리학 등등. 여기에 영화로 보는 심리학, 그림심리치유에세이, 몸짓으로 보는 심리학, 그리고 남자들의 문화심리학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서점 어느 곳에서나 새로 나온 심리학 서적을 소개해놓은 부스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지난주에는 우연히 두 편의 심리학 서적을 접하게 되었다. 올 해 심리학은 분명 인문/교양 출판 부분에서 두드러지는 하나의 트렌드였다. 그렇다면 왜 지금 대한민국은 심리학에 몰두하고 있을까.


질문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돈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유명한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이었다.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란 논문을 집필한 바 있는데, 이는 대도시란 삶의 공간이 인간의 정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 살펴본 연구다. 철학자 강신주에 따르면 공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오히려 공간에는 인간을 길들여서 그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상처받지 않을 권리>) 그렇다면 자본주의 이후 등장한 도시란 공간은 인간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우선 농촌과 달리 도시는 훨씬 더 다양하고 강렬한 자극을 쏟아낸다. 때문에 도시의 삶은 낯선 곳으로의 여행처럼, 일상 자체는 농촌의 삶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흥미롭지만 몸과 마음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동시에 외부의 환경도 예전보다 훨씬 빠르게 변한다. 농촌에서의 일이 매년 톱니바퀴 돌아가듯 반복적이었다면, 도시의 일은 급격하게 변하고 그에 대한 빠른 적응을 요구한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동시에 과거 농촌의 삶에는 개인적인 삶의 공간이 매우 좁았다. 김 씨네 개똥이와 박 씨네 순이가 손이라도 잡게 되면, 다음 날 온 마을에 두 사람의 로맨스에 대한 소문이 돌게 된다. 하지만 도시는 개인에게 충분한 자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아파트에 사는 옆집 주인과 인사 한 마디 나누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대도시의 군중에는 분명 익명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자유에 따른 대가도 분명 존재한다. 바로 고독이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사색의 자유와 함께 자신의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의 부재도 함께 가져왔다. 때문에 현대인은 자기 자신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됐고, 자연히 내 안의 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됐다. 농촌에 살던 개똥이는 이웃집 순이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지만, 현대인은 심리학에게 정신적 멘토 역할을 부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대도시가 등장한 지 한참이 지난 지금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일까. 난 신자유주의와 전 세계적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짐멜이 지적한 도시적 삶의 특징이 훨씬 더 강화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금융위기로 회사의 분위기도 급격하게 변화했으며, 그에 따른 조직원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사회 곳곳에서 유명인의 자살과 죽음, 심각한 범죄와 노동자들의 파업, 그리고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다. 개별 사건만으로도 개인의 정신적 삶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뉴스들이었다. 짐멜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자극에 견디며 살기 위해 현대인들은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대해 심장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머리로 반응하게 됐다’고 지적했지만, 최근에 벌어진 사건들은 무감각한 현대인들의 심장을 자극할 정도로 강렬했던 것이다. 이처럼 개별 도시인들이 겪는 심리적 혼란은 예전보다 훨씬 커졌다. 하지만 개인 간의 교류는 예전보다 훨씬 삭막해졌다. 심지어 같은 회사 내에서도 예전과 같은 선후배간, 동기간의 인간적인 교류가 이뤄지지 않는다. 누가 정리해고 대상에 오를지 모를 상황에선 모두가 경쟁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심리적 위안을 제공해줄 마지막 보루인 가정마저도 최근 들어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이제 현대인의 마음은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황무지가 되었다. 무수한 상처에도 어떠한 위안을 받지 못한다. 자연히 사람들은 심리학과 치유에세이를 찾게 된다. 책을 통해서라도 마음의 상처를 위로받고자 한다. 오늘 날 현대인들이 심리학 관련 서적을 찾는 이유다.


이번 주말, 두 개의 심리학 서적을 만났다. 처음 만난 책은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이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농촌에서의 삶은 집단적인 유대관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남녀의 개인적인 관계(사랑)에 대한 관심이 분산될 수 있었다. 하지만 파편화된 인간관계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사랑은 심리적 상처를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자연히 사랑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시인의 정서적 토대가 예전보다 훨씬 불안해진 상황에서 정서의 교감이 필수적인 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실제로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에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듣거나 볼 수 있는 상황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책은 사랑의 장애가 되는 여덟 가지 요소-무감각, 불안, 상실, 편력, 중독, 금기, 트라우마, 오해-를 이야기하고 그에 대한 극복 방법을 모색한다. 테라피스트인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 요소에 관한 케이스가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일종의 사례연구인데, 저자는 자신을 찾아온 환자들의 자세한 이야기를 통해 왜 우리가 쉽게 사랑 방해 요소를 갖게 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책은 모든 상황을 간단하게 재단하고 단순한 해결 방안을 제공해주는 카운슬러용은 아니다. 오히려 한 편의 연애소설 같은 사례 소개를 통해 각각의 문제에 대한 독자들의 개인적인 고민을 제공한다. 동시에 사랑에 실패했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내 안의 문제점을 돌아보게 만든다.


반면 두 번째 만난 <위험한 심리학>은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보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무한도전에 출연한 적이 있는 정신과 전문의가 쓴 책으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명령하듯 대하는 사람, 대화의 초점이 타인에게 가는 걸 못 참는 사람,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 로봇 같은 사람, 의심 많은 사람, 항상 뭔가를 해달라는 사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등등-의 마음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전달한다. 주변 사람 몇 명을 떠올리거나 내 안의 어두운 면모를 객관화하며 읽는다면 훨씬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다만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정의하다보니 상황을 쉽게 단순화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각각의 유형을 설명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사례들을 소개하다보니 각각의 사례들이 파편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차라리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처럼 각 유형에 관련된 사람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있게 소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사회생활을 하며 쉽게 만날 수 있는 유형들이 소개되어 있어, 실제 생활에 쉽게 적용해볼 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다만 왜 이 책의 제목이 위험한 심리학인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책의 내용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심리학 서적에 대한 관심이 반갑지만은 않다. 그만큼 이 시대의 도시인들은 더 많은 심리 치유를 원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다만 사회가 주입한 사고에 따라 오직 취업관련 실용서적만 읽던 사람들이 서서히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적어도 사회가 만든 성공 스토리가 개인의 내면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은 깨달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길 바란다. 단순한 심리 치유를 넘어, 현대 도시인들이 내면적으로 상처 받는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계속되는 상처를 막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개인적인 심리 치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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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정이 없다, 란 소리를 참 많이 들었다. 정은 따뜻함이니, 정이 없다는 말은 그만큼 차가운 인간이란 의미다. 내게 정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엄마, 아내, 동생. 그러니 정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도 쉽지 않다. 가끔 엄마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려면, 어느새 엄마는 ‘니가 6살 때 말이지’ 로 시작하는 오래된 근거를 끄집어낸다. 엄마의 얘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날 집 앞 동네를 지나고 있는 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하고 있더란다. 엄마가 가서 살펴보니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울고 있었던 것. 주위 사람들은, 뒤집어진 자전거와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주변에 엄마 안계시나’ 라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또래의 아이를 둘이나 둔 엄마는 놀라서 달려갔다. 역시나 얼굴에 찰과상을 입고 우는 아이는 내 동생이었으며, 뒤집어진 자전거는 내 자전거였다. 놀란 엄마는 주변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말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근데 넘어진 동생 주변의 인파 사이에서 낯익은 꼬마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 꼬마, 바로 나였다. 동생이 넘어져 울고 있는데, 주변 어른들이 ‘이 아이 엄마 안계시냐’ 며 웅성거리고 있었는데, 형이란 아이는 행인들 무리에 파묻혀 남의 일 구경하듯 서있었던 것이다. ‘넌 정말 어렸을 때부터 정이 없었어.’

     안타깝게도 정 없는 내 모습의 가장 큰 피해자는 부모님이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아들들이 그러겠지만, 난 부모님께 살가운 말 한 번 건네지 않는다. 오랜만에 집에 가서 ‘아버지 요즘 일이 많이 힘드시죠?’ ‘엄마, 요즘 건강은 괜찮아?’라고 말하면 좋으련만, 고작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곤 ‘엄마 배 안 고파’ ‘아빠, 이제 가야 되요’가 전부다. 그렇다고 부모님 방에 살짝 들어가 무뚝뚝하게 ‘엄마 용돈 써’ ‘아빠, 이 영양제 함 드셔보셔’라고 말하는 유형도 아니다. 결혼 후에는 예전처럼 자주 뵙지도 못하는데, 여전히 내 행동은 사춘기를 막 지나고 있는 중학생과 다를 바 없다. 일요일이면 아버지는 성당에 사시다시피 한다. 일요일에야 겨우 쉴 수 있는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자주 뵙지 못한다. 안타까운 아버지는 아들이 미사 보러 성당이라도 올 때면, 어떻게 서든 짬을 내 아들에게 다가와 자주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을 쏟아낸다. 손도 잡고 다 큰 아들의 얼굴도 만지고 싶어 하는 눈치다. 하지만 아들은 매몰차다. ‘오늘도 하루 종일 바쁘시네요? 점심은 아침을 늦게 먹어서요. 그럼 갈게요.’ 아들의 입에선 언제나 ‘갈게요’다. 그놈의 ‘갈게요.’ 뭐가 그리 바쁜지.

     소설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며 부모님 생각에 눈시울을 붉혔다. 매우 낯선 경험이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쓴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을 읽던 김연수가 눈물을 흘리던 부분을 읽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은 생선 먹을 때는 젓가락으로 뒤집고, 손에 음식이 묻어도 빨지 마라 등의 에티켓을 적은 딱딱한 책이다. 그런데 수많은 금기 사항 을 얘기하다 갑자기 이덕무가 어머니가 살아계실적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야기하며 ‘지금은 네 분 숙부가 다 작고하고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으며, 아버지만이 홀로 계시는데, 때로 그 일을 말씀하실 때마나 눈물을 흘리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하지만 아버지가 눈물을 흘릴 때 옆에서 함께 눈물을 흘렸을 이덕무를 상상하는 김연수의 글을 보자, 그 무덤덤한 한 문장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으며’가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건조한 문장 위로 정없는 아들에 홀대 당하는 우리 부모님의 부재가 순간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덕무가 쓴 에티켓은 전부 어머니가 그에게 하시던 말씀이었다. 결국 이덕무는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하나하나 적으며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슬퍼했던 것이다. “폐병이란 것은 기침병이다. 지금도 슬픈 생각에 고요히 귀기울이면 우리 어머니의 기침소리가 은은히 여태도 귀에 들려온다. 황홀하게도 사방을 둘러봐도 기침하는 내 어머니의 그림자는 또한 볼 수가 없다. 이에 눈물이 솟구쳐 얼굴을 적신다. 등불에게 물어봐도 등불은 말이 없는 것을 어이하리”


     이덕무는 어머니의 기침소리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깨어났다 죽어도 다시 들을 수 없는 그 소리. 그 문장을 읽으며, 난 엄마가 세상에 없을 때 엄마의 어떤 모습을 그리워할까 생각했다. 아들에게 밥을 주기위해 부엌에서 수선을 떨던 엄마의 얼굴이 가장 많이 보고 싶지 않을까. 일본의 하이쿠는 5.7.5의 음수율을 가진 정형시인데, 여기엔 매미소리 은유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한적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소리야’라는 식이다. 다음은 하이쿠에 대한 김연수의 설명이다. 삶의 여백이자 죽음의 적막을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어 귀를 때리는 한여름 매미소리를 역설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매미소리가 천지를 울리다가 문득 멈춘 상태. 그 찰나적인 상태가 바로 견딜 수 없는 삶의 여백이자 죽음의 적막이니까’ 아. 고작 17음자로 죽음을 얼마나 탁월하게 형상화해낸 문장인가. 그렇다. 죽음은 적막이다. 부모님이 떠나시면, 엄마의 경망스런 웃음도, 아빠의 이유 없는 짜증도 다신 들을 수 없다. '밥먹고 가라' 며 붙잡는 엄마의 말도, '자주 집에 들르라' 는 아빠의 말도 모두 침묵 속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풍수지탄이라. 이덕무의 글을 읽으며 부모님의 부재를 떠올렸고, 하이쿠에 묘사된 적막의 공포에서 죽음의 슬픔을 느꼈다. 정이 없는 내 행동이 부끄러워진 것은 물론이다.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데, 한 아저씨가 내 옆에서 러닝머신을 하고 있던 학생에게 다가왔다. 둘은 부자지간이었다. 아버지는 주름이 깊게 팬 게 나이가 꽤 많아 보였다. 조용히 늦둥이에게 다가온 아버지가 말한다. “OO야. 아빠는 찜질방에서 기다릴테니까 끝나면 와. 같이 샤워하자” 하지만 아들은 러닝머신에 달린 TV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한다.  

“나 늦게까지 할 거야”  

“언제까지 할 건데?”  

“몰라. 늦게까지 계속 할 거야”  

아버지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아들을 잠시 멍하게 바라보더니.  

“늦게까지 한다고?”  

“응”  

“알았어”  

아버지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한 30분이 더 지났을까. 실제로 내 옆 학생은 늦게까지 운동을 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러 들어가는 데 아까 봤던 아저씨가 무료한 표정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아니 그냥 자전거에 앉아 러닝머신을 하는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씁쓸한 표정과 주름을 보는 데, 이상하게 가슴이 너무 아렸다. 어쩌면 그렇게 익숙한 광경인지. 아버지의 주름살 위로 내 아버지의 얼굴이 덮쳐졌다. 간이고 심장이고 다 내주고, 그저 자식들 주변을 맴돌 뿐인 부모님들. 그들의 얄궂은 운명이 슬펐다. 그 날 결국 그 아버진 아들과 샤워를 함께 할 수 있었을까. 시간 나면 가장 먼저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적막이 찾아오면 가고 싶어도 못 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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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에 얽힌 내 추억은 고등학교 1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 처음 커피를 파는 곳, 커피숍이란 곳을 갔다. 거기서 첫 미팅을 했는데, 미팅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오직 기억나는 건 그 날 먹었던 콜라의 가격. 실제 슈퍼에서 파는 캔 커피를 버젓이 내놓고는 만 원에 가까운 가격을 받고 있었다. 그야말로 칼만 안 들었지 강도가 따로 없었다. 커피숍의 비싼 가격에 당시 난 미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 돈을 내고 이걸 먹어야 하는걸까' 라는 의구심부터 ‘아버진 밖에서 힘들게 돈을 버시는데 아들놈은 커피숍에서 비싼 콜라나 사먹고’하는 자책까지 온갖 잡생각이 들었다. 내가 당시 갔던 커피숍 이름은 '보디가드'. 이같은 커피숍은 80년대 말 처음 등장했다. 해외여행의 자유화로 원두 커피가 국내에 소개됐다. 커피숍은 당시 원두 커피를 이용, 아메리카노, 모카, 카푸치노와 같은 다양한 커피를 팔며, 다방과의 차별화를 실시했다. 세련된 인테리어에 고급 커피를 판다는 이미지는 젊은 층을 끌어들였고 커피숍은 삽시간에 확산됐다. 물론 어렸을 적부터 ‘커피 마시면 머리 나빠진다’는 얘길 무수히 들어온 내가 아메리카노가 뭐고 모카가 뭔지 알 턱이 없었고, 그저 콜라를 비싸게 판다는 사실이 날 언짢게 했다.


하지만 대학 입학과 함께 나도 커피숍 문화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숍에 앉아 친구들과 이런 저런 수다를 떠는 재미는 비싼 콜라의 충격을 희석시켜버렸다. 당시엔 모두가 커피숍을 즐겼다. 앉아서 두세시간 넘게 수다 떨기엔 커피숍만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다방이 처음 생겼을 때도, 대화를 나누기 위해 다방을 찾은 사람은 꽤 많았다. 그 시절 다방은 예전 사랑방을 대체한 공간이었다. 당시 직업을 구하지 못한 지식인들은 다방에 모여 시간을 보냈고, 예술가들은 다방에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며 창작활동을 했다. 실제로 충무로가 영화의 메카가 된 것도 당시 충무로에 태극다방이라는, 종로 다방보다 저렴한 다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국 다방이 커피숍으로 대체됐을 뿐, 50년대 식자층의 모습이나 2000년대 대학생의 모습은 다를 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고등학교 때 받은 커피숍에 대한 충격은 사실 내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난 장소 대여료, 더 엄밀히 말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 사용료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콜라를 비싸게 먹었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도 콧물 흘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도 않으며 편하게 미팅을 할 수 있었단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무지를 깨달은 이후 6~7000원짜리 콜라에 익숙해졌고, 더 이상 커피숍에서 음료를 마시며 밖에서 고생하는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커피숍은 순수한 대화의 공간이었다. 이는 곧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음을 의미한다. 난 커피가 써서 싫었다. 입사 첫 해 그런 날 보고 팀장이 한 마디 했다. “쓰면 설탕 타 묵어~” 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이상 커피를 계속 거부할 수 없었다. 어른들의 세상에서 커피는 필수품이었다. 회의를 할 때도, 거래처 손님을 만날 때도, 심지어 상사와 개인 면담을 할 때도 커피는 빠지지 않았다. 그 사이 커피숍은 외국계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으로 변해있었고, 출근하는 회사원들의 손엔 커피가 들려있었다. 대한민국의 커피사랑은 거부할 수 없는 도도한 물결이었고, 그 때부터 나도 쓴 커피를 억지로 마시기 시작했다. 커피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커피를 사랑했다.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적어도 초창기엔 커피가 근대화된 서구의 문물이란 점이 한국인을 매료시켰다. 서구의 근대화가 건국 목표처럼 여겨지던 시기, 많은 사람들이 근대화된 서구인이 되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물론 처음부터 쓴 커피를 좋아했던 건 아니다. 미군부대 인근에선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는 것이 선진 문화를 즐기는 것이라며 쓴 커피를 코를 잡고 마시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몇몇 어른들은 커피를 몸에 좋은 쓴 한약 정도로 생각하기도 했다. 또는 팀장의 조언대로 대부분이 엄청난 양의 설탕을 타서 마셨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커피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예전 보다 훨씬 많아졌다. 하지만 문화적 상징으로서, 커피가 지닌 매력 역시 아직까지 무시할 수 없다. 1900년대 초, 커피는 모던보이와 모던 걸의 전유물이었다. 다시 말해 커피는 신식 문물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그들이 마셨던 쓴 커피는 단순한 커피를 넘어선 문화였다. 100년이 흐른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다. 4,000원짜리 점심을 마시고 5,000원짜리 커피를 마시기 위해 줄을 서있는 사람들. 여전히 커피는 구별 짓기의 문화적 척도로 작동하고 있다. 다방 커피를 마시는 사람과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구별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다방은 윤락 행위의 장소로 전락했다. 대화를 나누기 위한 커피숍도 테이크아웃 커피 앞에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건 커피에 대한 사랑이다. 가격에 놀라고, 쓴 맛에 찡그렸던 나도 지금은 커피를 즐겨 마시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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